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편집자말]
의심을 품는 것은 찬양 받을 일이다!
​당신들에게 충고하노니
​당신들의 말을 나쁜 동전처럼 깨물어보는 사람을
​즐겁게 존경하는 마음으로 환영하여라!

​(중략)

​모든 의심 가운데 가장 훌륭한 것은 그러나
겁 많고 허약한 사람들이 머리를 쳐들고 일어나
​그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이제는 더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 ​베르톨트 브레히트 '의심을 찬양함' 중에서

곡성 영화는 많은 미스터리 스릴러가 그렇듯 고립된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전남 곡성군의 고립된 마을이 영화의 무대다.

▲ 곡성 영화는 많은 미스터리 스릴러가 그렇듯 고립된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지리산 자락에 자리한 전남 곡성군의 고립된 마을이 영화의 무대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미끼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보려 한다. 누가 뭐래도 <곡성>과 관련해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가 미끼이기도 하거니와 감독 스스로가 자신이 창조한 세상을 바라보는 수많은 관객에게 미끼를 드리웠기 때문이다. 미끼는 대상을 꼬드겨 잡기 위한 것이다. 미끼의 본질은 상대를 속이는 것이고, 미끼를 무는 건 의심 없이 대상을 믿은 탓이다. 그럼에 미끼와 먼 것은 의심이고 친한 건 믿음이다.

기독교에선 신이 인간을 창조해 에덴동산에 던져놓았다고 말한다. 그 인간의 이름은 아담이고 그가 외로워해 짝으로 창조된 또 하나의 인간이 있으니 하와, 곧 이브다. 모두가 알다시피 뱀은 이브를, 이브는 아담을 꼬드긴다. 에덴동산에서 신이 금한 유일한 것, 즉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말이다.

신은 선악과를 따먹어선 안된다고 경고했었다. 그 말을 아담은 믿었고 이브는 의심했다. 이브의 의심이 자라나 아담을 설득했고 그와 그녀는 마침내 열매를 따먹었다. 결과는 자명했다. 그들은 선악과를 통해 옳은 것과 그른 것을 알았고 낙원 바깥에서 안에서보다 많은 것을 배웠다.

의심이 우리를 자유케 하리라 했건만

곡성 독버섯처럼 퍼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의심을 확인하려 산을 올랐던 부제(김도윤 분). 그는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려 했기 때문에 위기에 처한다.

▲ 곡성 독버섯처럼 퍼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의심을 확인하려 산을 올랐던 부제(김도윤 분). 그는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려 했기 때문에 위기에 처한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신은 완전하다. 적어도 그가 창조한 세상에서는. 나홍진이 <곡성>을 만든 것처럼 신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신에게 궁금함 따윈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을 근거로 모든 것을 판단하면 될 테고, 어쩌면 앎이 너무도 온전해 판단과 같은 인간의 언어조차 무용할지 모른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불완전 속에서 완전함을 추구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다. 그래서 인간에겐 의심이 필요하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리기 위해 치열하게 의심해야 한다. 저 브레히트가 말했듯, 자신을 억압하는 자들의 강력한 힘을 더는 믿으려 하지 않는 의심이 우리에겐 필요하다. 그 의심이 인간을 진보로 이끌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오늘도 저기 낙원에 갇혀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른 채 발가벗고 헤 웃고 있었을지 모를 일이다.

이제 영화로 들어가자. 두말할 것 없이 <곡성>은 잘 만든 영화다. 공허하지만 그 공허함이 드러나기 전까지 제법 효과적인 떡밥이 난무하고 순진한 관객의 머리채를 붙잡고 필연적으로 헛짚을 수밖에 없는 결말로 나아간다. 그 과정에서 나홍진은 자신이 한국 대중오락영화의 정점에 있음을 스스로 입증해 보인다.

다만 대중오락영화의 시선에서 한 걸음 벗어나 바라보면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들이 눈에 띈다. 무엇보다 쓰인 재료에 비해 나온 결과의 깊이가 너무도 얕다. 의심이란 주제부터가 그렇다.

<곡성>은 의심에 대한 이야기다. 베드로를 향해 '새벽닭이 울기 전 네가 나를 세 번 배신할 것'이라 말했던 예수의 이야기는 믿음에 대한 것이었지만, 이 영화에선 의심에 대한 것으로 변주된다. 의심이 가치 있는 판단이 되기 위해선 충분한 근거가 필요하지만, 인물이 처한 상황은 그를 허락하지 않고 영화는 결국 예고된 비극으로 치닫는다.

영화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순간인 부제와 일본인의 대면 장면도 마찬가지다. "네가 아니라고 말하면 돌아가겠다"고 하는 부제를 향해 일본인은 "너는 너의 의심을 확인하러 온 것뿐"이라고 답한다. "네가 돌아가고 말고는 너의 뜻에 달린 게 아니다"라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의심을 확인한다는 건 의심을 긍정적으로 해소하기 위해 근거를 마련하는 행위지만, 그는 그래서 절망과 대면한다.

의심에 대한 악마적 찬양

곡성 해골모양으로 시든다는 금어초. 모든 금어초가 해골모양으로 시드는 것은 아니어서 제작진은 많은 양의 금어초를 구해놓고 해골모양으로 시드는 꽃을 영화에 썼다고 한다. 금어초의 꽃말은 탐욕, 오만이다.

▲ 곡성 해골모양으로 시든다는 금어초. 모든 금어초가 해골모양으로 시드는 것은 아니어서 제작진은 많은 양의 금어초를 구해놓고 해골모양으로 시드는 꽃을 영화에 썼다고 한다. 금어초의 꽃말은 탐욕, 오만이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 속에서 나홍진은 의심을 품는 모든 인간을 파멸로 이끈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추방됐듯 인간이 의심을 통해 망한다는 게 그가 내보인 일관된 태도다. 종구가 차라리 독버섯이 범인이라고 믿었더라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나홍진 감독은 부활한 예수가 그를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질책하듯, 미리 의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의심하는 인물들이 잘못을 저지르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이들이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파멸로 이끈다. 의심이 죄악이라는 지극히 기독교적 태도다. 의심을 찬양하라는 브레히트의 문장은 나홍진이 창조한 세상에선 아무런 힘이 없다. 그는 의심하는 관객의 입에까지 억지로 미끼를 물린다. 미끼가 의심보다 믿음과 친하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하는 듯하다.

그러나 실상 극 중 인물들이 죄를 범하는 건 의심 탓이 아니다. 두려움 때문이다. 딸을 잃을 거라는, 자신이 상할 거라는 두려움이 그들을 죄로 이끈다. 두려움은 의심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극복한 인물은 거의 없다. 영화 속 유일하게 두려움을 극복한 건 부제뿐이지만 그는 의심을 가진 아담이 에덴에서 추방당했듯 나홍진의 세상에서 파멸과 마주한다.

의심과 믿음, 그 가운데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듯하다. 기독교 경전 속 구절들을 차용하면서도 그로부터 파생될 수 있는 깊이 있는 논의를 진척시키지 못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요컨대 <곡성>은 의심에 대한 악마적 찬양이다. 감독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영화 속 인간들은 의심으로 인해 파멸한다. 이 영화는 인간이 가진 귀한 무기의 가치를 타락시키려는 작품이다.

이런 영화라면 에덴동산 안에서나 상영돼야 마땅하다.

곡성 포스터. '미끼를 물었다'라고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자고로 의심한 고기는 미끼에 낚이지 않는 법이다.

▲ 곡성 포스터. '미끼를 물었다'라고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자고로 의심한 고기는 미끼에 낚이지 않는 법이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빅이슈>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곡성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나홍진 빅이슈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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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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