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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철학과 4학년 과목인 응용윤리학을 수강할 때 '규범윤리학'은 옳고 그름,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일반적인 기준인 규범에 관한 분야고, '응용윤리학'은 그런 규범을 현실에 응용하면서 사람들이 왜 그런 규범에 따라야 하는지 논리적인 증명을 하는 분야라 배웠다. 윤리학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분야이므로 특히 응용윤리학처럼 복잡하고 문제적인 사회에서 등장한 응용 분야는 현실에 개입할 여지가 많다.

그런데 한국은 참 기이한 사회다. 다른 사회 못지 않은 문제들이 끊이지 않으면서도, 정작 응용윤리학자들에게 발언권을 주고 시민들이 논점을 명확히 파악하게끔 돕는 경우가 거의 없다. 중·고등학교에서 철학적 사고를 훈련할 기회를 거의 제공하지 못하는 한국 사회는 응용윤리학자들을 전문가로 수용할 준비도 안 됐고, 응용윤리학자들에게 때때로 이의 등 피드백을 제기할 '강한 시민(교양 시민)'도 부족해 보인다.

어떤 이슈가 터지면 도덕적 분노감은 표출하고 싶은 사람은 많은데, 마음만 앞서니 논점을 정확히 겨냥하지 못한 조잡한 논리가 판을 친다. 나는 최근 동료 시민들 사이에서 기초 논리학 용어인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오남용되는 사례를 문제 삼고자 한다.

'강남 여성 선택 살해' 사건 피의자 김아무개씨(남·34)는 "여성이 나를 무시했다"는 이유로 일하던 식당 인근 남녀 공용화장실에 1시간을 숨어있다가 피해자(여·23)를 살해했다. 범행 전 화장실에 들어온 남성 6명에게는 해를 가하지 않았다. 범행 장소가 강남 번화가이고 여성을 계획적으로 노렸기 때문에,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있었다면 내가 죽었을 수도 있다(나는 잠재적 피해자다)'라는 생각이 든 여성들은 강한 감정이입을 했다.

잠재적 피해자의 존재는 잠재적 가해자의 존재를 전제한다. 여성으로 살아오며 느꼈던 신체적 위협에 대한 공포감과 울분들이 표출되자, 드물기는 하지만 남성들 사이에서 '나는 잠재적 가해자다'라는 반성이 나왔다. 하지만 가해자를 낳는 사회적 모순을 직시하지는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정희진은 아예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라면, 여성의 일상적 피해는 누가 저지른 일이란 말인가. 사회적 모순에 '잠재'라는 말은 있을 수 없다"며, 여성이 겪는 차별을 일상적, 사회적인 것으로 봐야 한다고 더 밀고 나갔다(☞관련 기사: 잠재적 가해자?).

나는 여성이 겪는 차별이 '일상적, 사회적인 것'이라는 결론에는 원론적으로는 동의하지만, 미리부터 그 결론을 강조하지는 않으려 한다. 사건 이후 남성들 사이에서 더 많이 나온 목소리는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성급하게 일반화하지 마라'는 반발인데, 사회적 맥락에 대한 무지는 둘째치더라도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논리적 개념을 오남용하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추모를 위해 강남역을 찾은 시민들은 추모의 글을 적은 메모지를 붙히거나 헌화를 했다.
ⓒ 하지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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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란 '몇 가지 특수한 사례로 일반화된 결론에 성급하게 도달하려는 오류'를 뜻한다. 쉽게 말하자면 여성을 표적 살해한 범죄자 한 명이 나타났다고 나머지 남성들까지 여성을 표적 살해할 가능성이 있는 범죄자처럼 공포스러워하는 건 논리적인 오류라는 주장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이건 사실 논리학을 끌어들일 문제도 아니고, 국어만 제대로 이해하면 기분 나빠할 이유도 없는 문제다. '잠재'라는 게 무슨 뜻인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숨은 상태로 존재함'을 뜻한다. '인간성'은 악한 충동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끔 통제하는 선한 마음을 통해 보완되면서 사회적으로 성숙한다. 그렇다고 악한 충동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단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상태일 뿐이다. 악한 충동이 평생 드러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악한 충동이 겉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크고 작고의 문제일 뿐 인간은 누구나 '잠재적인' 가해자다.

이렇게 말하면 꼭 논점을 이탈시키려는 남성들이 나타난다. 가령 '그렇다면 여성도 낙태를 통한 태아 살인의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냐'는 식이다. 이런 식의 시도는 최소한 두 가지 논리적 오류에 빠진다. 첫째는 '잘못된 유비추론의 오류'다. '자신의 논증을 정당화하기 위해 비교하는 대상의 중요한 차이점은 간과하면서 받아들이기 힘든 유사성만을 강조하는 오류'를 뜻한다. 낙태 문제는 응용윤리학적으로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몇 개월부터 '태아'로 인정할지, 낙태가 왜 비윤리적인 행위인지 규범윤리학적 근거를 들어 논리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여기에 성공해도 왜 낙태 문제에서 잠재적 가해자를 이야기하는데 굳이 '성별'을 강조해야 하는지도 증명해야 한다. 낙태 문제에서 '여성'을 굳이 잠재적 가해자로 지목할 논리적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낙태는 미혼모 낙태일지라도 맥락을 따져보면 여성의 개인 선택으로만 환원하기에는 남성의 책임도 상당히 수반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피장파장의 오류'다.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의 잘못을 지적하는 오류'를 뜻한다. 설사 낙태가 비윤리적이고 여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볼 근거가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다른 문제에서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볼 근거까지 무력화시키는 건 아니다. 지금 당장의 논점은 낙태 문제가 아니라, 여성을 향한 신체적 위협이기 때문이다! 인터넷상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수준 낮은' 오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왜 나를 갖고 그래? 너네도 잘못하잖아!' 수준의 논리를 어린이도 아닌 성인들이 쓰는 셈이다.

핵심은 인간은 모두가 잠재적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이지만 '특별히 특정 성별을 '잠재적 가해자'로 강조하는 일이 무의미한 일이 아닐 때가 언제냐'다. 경찰청 범죄 통계를 보정하면 여성은 강력범죄와 상해·폭행 범죄라는 신체적 위협 상황에 처하면 '가해자'보다 '피해자'일 경우가 남성보다 약 16.6배, 성범죄를 제외해도 4.46배 높다. 범죄자의 85.99%가 남성임을 감안하면 여성이 주로 피해자일 때 남성은 가해자다(☞관련 기사: 경찰청 통계 군더더기 잘라내면, 여성 '공포' 이해돼).

이렇게까지 이야기해도 '범죄자라는 소집단을 갖고 남성 전체를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반문하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성급하다'의 기준은 대체 무엇인가? '성급하다'는 사실판단이 아니라 엄연히 가치판단이다. 그것은 사회규범적인 성격을 갖는다.

어떤 현상이 '과학적 발견'으로 인정되기까지는 '매우 보수적인 기준이 선택'된다. 과학자들은 같은 조건에서 같은 방식으로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때 이를 '재현성이 있다'고 말한다. 과학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중력파 검출 성공 때, 통념적으로 과학적 발견을 인정하는 기준인 5시그마(350만 번 중 1번 오류가 날 확률)를 넘긴 5.1시그마가 인정되었다. 한편 사회과학 분야는 연구 대상인 사회가 실험실이 아니며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많아, 우스갯소리로 3시그마만 돼도 '꿈의 재현성'이라고 부를 정도로 관대한 기준을 선택한다.

하물며 과학적 탐구도 아닌 일상에서 신체적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심리적 본능인 '공포'를 발동시키는 여성에게는 대체 어떤 원칙을 갖고 '성급하다'고 재단할 건가. '성급하다'는 가치판단에도 엄연히 원칙이 필요하다. 현재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용어의 오남용은 여성에게 시급한 '의심의 이득의 원칙'을 무시한다.

철학자 피터 싱어.
 철학자 피터 싱어.
ⓒ free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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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의 이득 원칙'이란 공리주의 윤리학자 피터 싱어가 <실천 윤리학>에서 제시한 원칙이다. 이를테면 "사냥꾼은 덤불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사슴인지 동료 사냥꾼인지 확실하지 않다면 쏘지 않는 게 옳다"는 논리다. 싱어는 이 원칙을 사냥꾼의 입장에서 쓰기는 했지만 사슴의 입장에서 "사슴은 덤불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사냥꾼인지 동료 사슴인지 확실하지 않다면 경계해도 좋다"고 바꿔 여성들의 공포에 응용해도 문제가 없어 보인다.

인생은 실험이 아니라 실전이다. 철학자 카뮈는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판단하는 것" 즉 살고 죽는 문제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철학적 문제라고 말한다. 자신들이 '잠재적 가해자'로 경계 받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여성과 함께 사회 구조를 바꾸기보다 한 톨의 위화감도 허용하지 않는 게 최우선 관심사인 일부 이기적인 남성들은 원칙도 없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는 철학적 개념을 오남용해 사태를 여성 개개인이 비약적인 인식을 하고 있는 걸로 결론 내리는 편이 마음 편한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카뮈의 지적처럼 그런 고민은 보다 근본적인 고민인 살고 죽는 문제에 비하면 하찮아 보인다. 쉽게 말해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불쾌감이 다 무슨 소용인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결론은 각자의 몫이지만, '이미' 생명을 유지하며 인생의 가치를 인정할 것을 암묵적으로 공유하는 사회인들이 고작 불쾌감 따위로 신체적 위협에 대한 공포를 호소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를 '성급하다'며 묵살하는 건 자기모순이다.

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2014년 딱 한 해 동안 강력범죄(방화 제외) 및 상해·폭행 범죄자 중 남성의 수는 22만4515명이다. 인구가 늘어난 2016년 4월 기준 남성 인구 2578만1628명으로 나눠도 0.87%다. 남성 인구 중 형사 처벌을 받지 않는 만 14세 미만 인구를 제외하면 100명 중 1명은 되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단순 범죄자 비율만 보면 적어 보일지 모르지만 여성은 일단 범죄에 노출되면 '가해자'보다 '피해자'일 경우가 남성보다 16.6배 높고, 적은 확률도 일단 노출되면 피해를 돌이키기 힘들어 공포의 무게가 다르다.

매일매일 사람들 마주치다 보면 범죄에 노출될 확률은 증가한다. '여성이라면 성폭력에 노출된 경험 한 번쯤은 있다'는 여성들의 호소가 근거 없는 주장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그렇다면 사회인들은 여성이 안 조심해도 되는 사회 구조를 조성할 때까지, 아래 '경우2'보다 '경우1'이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주므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성급하게' 운운하기 전에 '의심의 이득이 원칙'부터 따를 필요가 있는 게 아닐까?

[경우1] 여성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경계할 때
① 남성이 가해할 때: 여성이 어느 정도 범죄로부터 피신 , 대처 가능(중대한 이득)
② 남성이 가해하지 않을 때: 일부 남성이 느끼는 위화감(경미한 손해→여성이 안 조심해도 되는 사회 구조를 조성하는 시민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과실에 따른 부담일 수 있음)


[경우2] 여성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경계하는 걸 막을 때
① 남성이 가해할 때: 여성은 위험에 처함(심각한 피해)
② 남성이 가해하지 않을 때: 아무 일도 없음


강신명 경찰정장.
 강신명 경찰정장.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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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나에게는 내 불쾌감이 여성의 생명보다 더 소중하다'까지 주장하는 남성도 있을 수 있다. 필자는 솔직히 이들에게까지 어떤 논증을 제시하는 게 과연 의미가 있을까 의문이다. 논쟁은 상대방을 나와 동등한 주체로 인정하는 가운데 성립하는 대화 과정이다. 자기 생명은 소중하게 여기면서 타인의 생명은 자신의 불쾌감보다도 하찮게 여기며 자기 세계에 갇힌 극단적인 우월주의자들에게는 논쟁보다는 다른 접근이 필요해 보인다.

그러나 이들을 적극적인 차원에서 설득할 수 없더라도 여성들의 주장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되는 건 아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성급하다'는 말은 가치판단이다. 여성들이 '성급하다'고 판단하려면 그 판단의 입증할 책임은 판단한 쪽에서 져야 하는 거다. 도대체 무슨 기준으로 성급함을 재단할 건가?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는 표준논리학(형식논리학)이 아닌 비표준논리학의 영역(비형식논리학)에서 다루어지는 오류다. 표준논리학에서처럼 이가율(문장의 진리 값은 오직 참과 거짓 뿐이라는 원칙)이 성립하지도 않고, 진리 값이 모호한 논리체계 가령 확률논리에서 자주 언급되는 오류다. 여성이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경계하는 건 국어의 의미상으로도 연역적으로 문제가 없고, '의심의 이득의 원칙'을 적용할 때 확률논리적으로도 문제가 없다.

공리주의가 갖는 인권 침해 위험 가능성을 걱정하는 의무론적 윤리학의 입장에서 봐도 여성들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경계하는 건, 남성의 인권에 위해를 가하는 실질적인 조치와도 무관하다. 오히려 인권 침해는 (심지어 비정신질환자의 범죄율보다 낮은 범죄율을 보이는) 조현병 환자들을 관리하겠다는 경찰의 발상에서 벌어지는 실정이다.

한국은 현재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 사회'다. 불신을 넘어서는 첫걸음은 당신부터 여성이 조심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구조'를 만들자고 목소리를 내고 여성과 연대해 자신이 가해자가 아님을 실천으로 증명하는 일이다. 논리학은 타인의 중대한 고통을 묵살하기 위한 말장난에나 사용하라고 쓰는 도구가 아니다.


태그:#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의심의 이득의 원칙, #강남 여성 선택 살해, #여성혐오, #조현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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