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브루클린> 포스터

영화 <브루클린>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바야흐로 세계화 시대다. 세계화라는 건 한 사람이 영향을 주고받는 생활권이 세계 전체로 확장됐다는 뜻이다. 누구나 돈과 시간만 있으면 내일 중에 지구 반대편에서 쇼핑하는 것도 가능한 세상이다.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대부분 사람이 태어난 곳으로부터 반경 수백 킬로미터를 벗어나지 않고 일생을 보냈다는 점을 떠올리면 정말이지 놀라운 변화다.

여기에 더해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가장 넓은 바다를 단 몇 초 만에 뛰어넘어 연락을 전하는 일까지 가능케 했다. 현대를 살아가는 여행자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대륙을 활보하면서도 가족이나 친구들과 상시적인 연락을 주고받는다. 과거와 같이 완전한 단절 속에 미지의 땅을 여행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삶은 여행과 다르다. 인간에겐 어딘가 뿌리내릴 곳이 필요하다. 연락이 가능하다고는 해도 연락은 연락일 뿐이다. 삶의 터전이란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그 땅으로부터 불과 몇 킬로미터를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니까. 인간을 둘러싼 기술이 발전했을 뿐 아직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인은 태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서울로 대학을 진학한 지방 출신 학생들도 향수병을 겪는다. 낯선 땅엔 친구가 없고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롭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고립감과 향수는 타지에서 생활하는 모든 이가 마주하는 문제다. 하물며 바다 건너 낯선 세상에 홀로 둥지를 트는 건 오죽할까. 그곳이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외양을 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라 해도 말이다.

대서양 건너 새 둥지를 틀기까지

브루클린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고향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는 에일리스(시얼샤 로넌 분)

▲ 브루클린 미래가 보이지 않는 고향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하는 에일리스(시얼샤 로넌 분)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지난달 개봉한 <브루클린>은 대서양을 건너 낯선 나라에 새 둥지를 튼 한 여성의 이야기다.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인 1950년대, 고향인 아일랜드를 떠나 미국 브루클린으로 이주한 에일리스가 바로 그녀다. 영화는 새로운 땅에서 삶을 시작하는 여성의 이야기인 동시에 고향을 떠나 먼 타지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해야 했던 아일랜드 사람들의 이야기다.

원작자인 아일랜드 소설가 톰 코이빈은 철저히 그와 같은 작품을 의도했고 가장 평범한 아일랜드 처녀가 브루클린 처녀로 탈바꿈하는 이야기를 통해 1950년대 경제난을 피해 뉴욕으로 대거 이주한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삶을 그려내고자 했다. 그럼에 영화의 주인공 에일리스는 단순히 새로운 땅에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성장드라마의 여주인공에 그치지 않는다. 그 시대 아일랜드 이민자를 대표하는 상징적 인물이 되는 것이다.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영국, 이탈리아계와 함께 초창기 미국 주요 이민자 계통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이들이 새로운 나라에서 하나의 세력을 이룰 만큼 대규모 이주를 한 데는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 자리하고 있다.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이라 알려진, 1845년부터 1850년까지의 감자 역병 창궐이 바로 그것이다. 이 기간에 아일랜드 인구의 1/8 이상이 기아로 사망했고 다시 그만큼이 목숨을 걸고 신대륙으로 이주를 선택했다.

빈털터리 신세로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에 발을 디딘 이들이 항구에서 멀리 벗어날 여력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1세대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뉴욕항 브루클린 지역에 터를 닦았다. 이후 인접국인 영국의 압력과 가난에서 헤어나지 못한 아일랜드 내부 사정이 겹치며 수많은 아일랜드인이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아일랜드가 가혹한 경제난에 시달린 1950년대도 다를 바 없었다. 많은 젊은이가 미래를 찾아 이민을 선택했고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동포가 있는 브루클린을 목적지로 삼았다. 영화 속 에일리스가 그랬듯.

아일랜드판 <국제시장>, 두 영화의 차이는?

브루클린 향수병에 시달리는 에일리스(시얼샤 로넌 분)와 그녀가 만난 따뜻한 남자 토니(에모리 코헨 분).

▲ 브루클린 향수병에 시달리는 에일리스(시얼샤 로넌 분)와 그녀가 만난 따뜻한 남자 토니(에모리 코헨 분).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브루클린>이 에일리스를 주인공 삼아 펼치는 이야기는 사실 평범하기 짝이 없다. 여느 시골 소녀가 도시에 유학 와서 겪게 되는 어려움과 그를 극복하기까지의 여정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젊은 처자가 주인공이다 보니 사랑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아일랜드와 미국, 대서양을 가로지른 갈팡질팡의 삼각관계는 당연한 귀결이다.

하지만 영화의 제목 <브루클린>이 의미하는 바는 결코 가볍지 않다. 에일리스에 앞서 미국에 정착해 산업역군으로 활약했을, 하지만 현재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나이 든 이민자들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장면에선 더욱 그렇다. 새로운 나라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고층빌딩을 세우고 다리를 놓고 댐을 건설하며 고향을 그리워했을 이들, 하지만 반평생을 낯선 땅에서 분투하고 난 뒤 남은 건 어제와 같은 오늘뿐이다. 저기 고향 땅에선 젊고 영리한 뒷세대들조차 여객선에 몸을 싣지만 브루클린엔 아일랜드가 아닌 미국만이 자리하고 있다.

아일랜드에서 떠나온 뒤 아일랜드를 상징하는 녹색 옷을 벗고 점차 세련된 패션을 선보이는 에일리스, 상대적으로 부유한 아일랜드 남자 대신 이탈리아계 이민자를 선택하는 그녀. 영화는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나가는 한 인간의 드라마를 넘어 어찌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아일랜드인이 미국 사회에 편입됐던 가슴 아픈 광경을 그려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선배세대의 노고를 잊지 않음은 물론이다.

여러모로 <브루클린>은 아일랜드판 <국제시장>이라 할 만하다. 선배세대가 살아간 시대와 그들의 수고로움을 한 인간의 삶을 통해 내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하지만 주제를 다루는 방식에 있어 두 영화 사이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윤제균 감독이 선배세대의 지나간 삶을 매우 극적이고 노골적이며 과장된 시선에서 그려낸 것과 달리 존 크로울리는 그 시대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 전체의 이야기를 에일리스의 신세계 적응기와 맞물려 담담하고 세련된 방식으로 표출한다. (참고 : '국제시장', 우리를 이렇게 기억해도 괜찮은 걸까)

덕분에 영화는 그 시대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아일랜드인은 물론, 바다 건너 다른 문화권 관객에게까지 호소할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 될 수 있었다. 존중할 만한 작품이다.

브루클린 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귀국한 아일랜드에서 엄친아 짐 패럴(도널 글리슨 분)을 만나 흔들리는 에일리스(시얼샤 로넌 분).

▲ 브루클린 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귀국한 아일랜드에서 엄친아 짐 패럴(도널 글리슨 분)을 만나 흔들리는 에일리스(시얼샤 로넌 분).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브루클린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존 크로울리 시얼샤 로넌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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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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