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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17일 새벽 강남역 인근 한 노래방 공용 화장실에서 34세 남성이 23세 여성을 끔찍하게 살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경찰은 정신분열증 환자에 의한 '묻지마' 범죄로 규정했다. 시민들은 '여혐(여성 혐오)' 범죄로 보았다. 범인은 "여성에게 무시당하는 것이 싫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이 묻지마 범죄자의 특성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만성분노형'이 45.8퍼센트로 가장 많았다. 만성분노형은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의도를 잘못 해석해 분풀이로 범죄를 저지르는 유형이다.' (출처: <헤럴드경제> 2016년 5월 25일 기사 "여자가 위험하다?…여자라서 위험하다!")

이번 사건의 배경에 우리 사회 일각에 퍼져 있는 여혐 정서가 깔려 있는 게 아니냐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성 차별적 문화나 여혐 풍토를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에 따른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치열한 경쟁 문화 속에서 낙오한 일부 남성들이 그에 대한 반발로 여혐 행태를 조장하고 퍼뜨린다는 것. 그럴까.

대중매체가 퍼뜨린 '환상'... 현실 속 여성의 삶과 달라

미국 여성학자이자 문화비평가인 수전 J. 더글러스 미시간대 언론학 교수가 쓴 <배드 걸 굿 걸>(글항아리 펴냄)에 따른다면 '아니오'라고 답해야 할 것 같다. 더글러스는 여성의 이미지와 관련하여 대중매체가 퍼뜨린 "힘의 환상"(13쪽)을 지적한다. "여성의 해방이 기정사실이고, 여성이 실제보다 더 강하고 유능하며 성적으로 주도적일 뿐만 아니라, 실제보다 더 대담하고 존경을 받는다"(13쪽)라고 강조하지만 실제 현실 속 대다수 여성들의 삶은 다르다는 것이다.

<배드 걸 굿 걸> 표지
 <배드 걸 굿 걸> 표지
ⓒ 글항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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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의 힘에 대한 환상으로 인해-기자 주)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발생했다. 즉, 현실 도피주의와 쾌락을 가정하며, 소녀와 여성들을 위해 여전히 행해져야 할 많은 일을 가리고 심지어 지워버리는 상상된 힘의 이미지들, 성차별을 허용되는 것, 심지어 재미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며, 페미니즘이 이제는 완전히 무의미하고 급기야 해롭기까지 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미지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환상 속에서 소녀와 여성들과 관련하여 종종 언급되는 내용, 즉 이들이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 그리고 이들이 될 수 있는 존재와 될 수 없는 존재에 대해 언급되는 내용을 들어보면, 힘이라는 빛나는 신기루 이면에 성차별주의라는 시커멓고 교활한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5~16쪽)

이 책이 다루는 문제는 저자가 "교활한 뱀"에 비유한 현대의 성차별주의다. 이를 위해 19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대중매체가 만들어낸 환상의 등장과 진화, 그 기원, 모순적인 메시지와 그것의 결과 등을 살핀다. 수많은 영화, 드라마, 뉴스 등 대중매체의 다양한 유형들이 분석 대상이 되었다.

대중매체에 대한 저자의 비판은 신랄하다. 그것들은 한 손으로 무언가를 주면서 다른 한 손으로 그것을 빼앗아간다. 여학생과 여성들의 욕구에 의해 생겨난 환상을 통해 대리만족을 제공하는 한편 여성에 대한 아첨과 폄하를 자극적으로 혼합하여 여성들을 혼란케 하는 마케팅을 벌여 모든 것을 판다는 것.

대중매체, 의도한 속임수? 의도치 않은 우연의 결과?

저자의 문제의식을 압축적으로 담고 있는 핵심 열쇳말은 "진화된 성차별(enlightened sexism)"이다. 그것은 새로운 성별 체제가 가하는 위협에 대한 의도적‧비의도적 반응으로 정의된다. 진화된 성차별론은 여성들이 페미니즘을 통해 충분한 진보를 이룩하고 실제로 완전한 평등이 실현되었으니 이제는 여성들에 대한 성적인 고정관념을 부활시켜도 무방하며, 심지어 그것이 즐거운 일이라고 주장한다.

'진화된 성차별은 여성운동의 성과를 기정사실로 간주하고, 이를 대가로 여전히 외모와 생물학적 운명으로 판단되는 성적 대상화, 아둔하지만 섹시한 여자라는 시대 역행적인 여성의 이미지를 부활시킨다. 그 결과, 진화된 성차별의 시대에서는 외모 변신(makeover) 쇼, 결혼 상대 찾기, 모델 선발 쇼, 여성의 가슴에 대한 새로운 강조(그리고 가슴 확대 수술 홍보의 대대적 증가), 셀러브리티 저널리즘의 아기와 모성에 대한 집착('임신으로 인해 불룩해진 여자 스타의 배를 감시하는 행태'의 등장),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주부를 택하는 관행에 대한 찬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23~24쪽)

저자에 따르면 진화된 성차별은 '아이러니'로 구성된다. 구체적인 작동 방식은 다음과 같다. 티브이 속 사람들은 부유한 집에서 모든 걸 누리며 자라났고,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우월한 시청자인 당신은 그들을 무시하거나 조롱하므로 그들보다 상위에 있다!

자본주의에 포박된 오늘날 여성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대중매체의 시선은 편집증적이다. 저자에 따르면 대중매체는 여성이란 신체에 의해 규정되고, 그 정체성이 신체에 존재하며, 신체 또한 성적으로 매력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여성에게 대담한 모험과 도전을 부추김으로써 힘과 주도권에 대한 환상을 선사하지만 곧장 여성들을 끌어당겨 속박한다는 것이다. 의도한 속임수일까, 의도치 않은 우연의 결과일까.

'대중매체는 여성 각료들이 등장하고, 가정폭력 문제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이를 비판하며, 미국인들로 하여금 종전과는 전혀 다른 가족 구성을 포용할 수 있도록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여성 대통령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도 잊지 말자. 미국은 어떤 선진국보다도 어머니와 자녀를 위한 지원 체계가 미약하며, 약 190만 명의 여성이 매년 남편이나 애인으로부터 폭행을 당하고, 전체 여성의 약 18퍼센트가 강간 또는 강간 미수의 피해자다. 또 남성이 1달러를 벌 때, 백인 여성은 75센트를 벌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은 62센트, 라틴계 여성은 53센트를 번다.' (39~40쪽)

2012년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를 쓴 미국 언론인 토머스 프랭크는 이 책에 대해 "유쾌함과 멋과 발군의 유머 감각으로 대중문화의 가짜 페미니즘을 대해부한다"라고 극찬했다. 전통적으로 강요된 여성상과 능력있는 주체로서의 새로운 여성상이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통해 여성들을 "유능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주술"(부제)의 압박 아래 밀어넣는 것이 가짜 페미니즘 아닐까. 하지만 당연히 대다수 평범한 여성들은 '슈퍼우먼'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성 평등에 관한 한 품격있는 문화 국가로 보기 힘들 것 같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2015년 성 격차 지수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145개국 중 115위였다고 한다. '황색언론'과 인터넷에는 여자 연예인의 치마 길이나 가슴골 사진이 넘쳐난다. 여성을 성적(性的)으로 대상화하고 비하하는 언어나 이미지가 대중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제20대 국회의원 당선자 중 여성 의원 비율은 17퍼센트다. 2000년대 이전에는 그 비율이 0~1퍼센트 사이에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여성의 사회적 위상이 커졌음을 보여주는 보기라고 할 수 있을까.

4대 강력범죄(살인, 강도, 성폭력, 방화) 전체 피해자 중 여성 비율은 88.7퍼센트다. 15~30세 사이의 젊은 연령대에서 여성 피해자 비율은 94.7퍼센트에 이른다. 여혐 분위기 확산의 진원지로 꼽힌다는 '일베' 사이트의 한 회원이 '밀실'에서 '거리'로 나서고 있다. 멀었다. "배드 걸 굿 걸" 모두에게 대한민국은 안전하지 못하다.

덧붙이는 글 | 정은균 시민기자의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배드 걸 굿 걸>(수전 J. 더글러스 지음, 이은경 옮김 / 글항아리 / 2016.5.9. / 577쪽 / 2만 3000원)



배드 걸 굿 걸 - 성차별주의의 진화 : 유능하면서도 아름다워야 한다는 주술

수전 J. 더글러스 지음, 이은경 옮김, 글항아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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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배드 걸 굿 걸>, #진화된 성차별, #가짜 페미니즘, #성 평등, #여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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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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