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가씨>를 보고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떠올랐다.

영화 <아가씨>를 보고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이 떠올랐다. ⓒ CJ 엔터테인먼트


한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했다. 다음날 많은 여성이 그가 죽은 곳에 찾아와 꽃을 놓아두었다. 애도의 글을 담은 쪽지가 우후죽순 벽을 채워갔다. 다음날 여성들은 삼삼오오 촛불을 손에 들고 한자리에 모였다. 며칠 뒤에는 마스크를 쓰고 국화 한 송이를 든 채 거리를 행진했다. 여성들은 서로 연대했고, 어떤 남성들은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은 대상으로만 여겨지던 여성의 주체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영화 <아가씨>를 보고 일련의 사건들이 새삼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영화 또한 '생존을 위한 여성의 연대'를 큰 줄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아가씨>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 한반도를 배경으로, 억압에 맞서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귀족 아가씨 히데코(김민희 분)의 이야기를 다룬다. 히데코의 후견인이자 이모부인 코우즈키(조진웅 분), 히데코와의 결혼을 원하는 남자 백작(하정우 분), 여기에 히데코의 새로운 하녀 숙희(김태리 분)까지. 두 남자와 한 여자는 각자 자신의 목적을 위해 히데코를 이용하려 한다. 히데코가 이들 사이에서 '누구와 연대하고 누굴 적으로 규정하는지'를 관찰하는 과정은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이다.

영화 초반, 백작이 히데코에게 접근하는 건 귀족과의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이루기 위해서다. 그는 히데코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 숙희와 공모하고, 이성 경험이 없는 처녀 히데코를 대놓고 유혹한다. 백작에게 있어 중요한 건 돈이고, 여자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정복할 수 있는 대상이다. 그가 가난했던 과거를 "여자들에게 포도주 살 푼돈조차 없던 때"라 표현하고, 자신의 목표를 "(여자 앞에서) 가격을 확인하지 않고 포도주를 골라 주문할 수 있을 정도의 돈을 갖는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도 그래서다.

 코우즈키에게 히데코는 성적 판타지의 도구다.

코우즈키에게 히데코는 성적 판타지의 도구다. ⓒ CJ 엔터테인먼트


이모부 코우즈키에게 있어서 히데코는 성적 판타지의 도구이자 대상이다. 그는 춘화집과 음란 서적을 수집하고 이를 베낀 뒤 사람들을 모아 경매에 부친다. 매일같이 낭독회를 열어 히데코로 하여금 남성들 앞에서 이 책들을 읽게 한다. 심지어 책에 등장한 섹스 체위가 실제로 가능할지 궁금하다는 반응에는 히데코로 하여금 인형에 대고 이를 재연하게 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여성으로서 히데코의 성은 철저하게 억압한다. 어린 시절의 히데코가 성기를 뜻하는 일본어 단어를 배우다가 장난스레 키득거리자 사정없이 뺨을 갈기는 코우즈키의 모습은 이중적 성 관념을 지닌 남성의 태도를 대변한다.

숙희가 같은 여성인 히데코를 이용하는 설정은 두 남자의 그것보다 훨씬 뼈아프다. 그녀는 지긋지긋한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히데코의 부를 빼앗으려 하고, 이를 위해 백작과 공모한다. 여성으로서의 약자성을 벗어던지기 위해 남성과 연합해 같은 여성을 짓밟으려는 것이다. 백작은 숙희를 이용하고, 숙희는 히데코를 이용한다. 이 먹이사슬의 맨 위에는 남성이 있고, 두 여자는 파이 한 조각을 두고 제로섬 게임을 벌인다. 여성이 오롯이 여성의 힘만으로 승리하기란 요원한 일이 된다.

인물들 사이의 얽히고설킨 중상모략 속에서, 아가씨 히데코와 하녀 숙희가 계급을 넘어 성애 관계로 발전하는 영화의 전개는 의미심장하다. 숙희는 백작의 '작전'을 돕기 위해 히데코에게 '진짜 성'을 가르쳐주는데, 덕분에 히데코는 코우즈키의 억압에 갇혀있던 자신의 성을 발견하고 이를 주체적으로 분출하게 된다.

이후 영화는 몇 번에 걸쳐 두 여성의 정사를 긴 시간을 들여 적나라하게 훑고, 둘의 교성과 질척이는 파찰음을 더해 관객으로 하여금 더할 나위 없이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겪게 한다. (이후 전개와 무관하게) <아가씨>는 우리를 향해 역설하는 것만 같다. 여성은 남성에게 의존하지 않고도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오히려 여성 간의 연대야말로 자유를 향한 최선의 선택지가 될 수 있다고 말이다. 6월 1일 개봉.

 여성 간의 연대를 보여주는 영화 <아가씨>는 6월 1일 개봉이다.

여성 간의 연대를 보여주는 영화 <아가씨>는 6월 1일 개봉이다. ⓒ CJ 엔터테인먼트



아가씨 김민희 김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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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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