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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유고(石洲遺稿)> 해제

『석주유고(石洲遺稿)』
 『석주유고(石洲遺稿)』
ⓒ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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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주유고(石洲遺稿)>는 독립지사 이상룡(李相龍) 선생이 생전에 남기신 유묵(遺墨, 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으로 엮은 일제강점기 읍혈록(泣血錄)이다.

<석주유고(石洲遺稿)> 원문은 모두 한문으로 되어 있으나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연구책임자; 김희곤 안동독립운동기념관장)들이 국역한 것을 경인문화사(景仁文化社)에서 펴냈다.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으로 본관이 고성(固城)이요, 초명은 상희(象羲), 자는 만초(萬初)다.

1858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정통 유학자로 학문적 수업을 닦은 이상룡 선생은 유인식(柳寅植), 김동삼(金東三) 등 혁신 유림인사들과 함께 근대교육기관인 협동학교를 설립하고 본격적인 계몽활동에 이바지했다.

하지만 계몽운동만으로는 나라의 독립이 어렵다는 것을 깨달은 선생은 50이 넘은 1911년 1월에 만주로 망명하여 이회영(李會榮) 형제들과 함께 서간도에서 독립군 기지 개척에 힘썼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등을 통해 무장독립투쟁을 위한 독립군 양성에 이바지한 선생은 이후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에 취임하여 여러 분파로 갈린 독립운동계의 통합을 위해서 끝까지 노력한 인물이다.

<석주유고(石洲遺稿)>의 주요 내용

석주 이상룡 선생
 석주 이상룡 선생
ⓒ 석주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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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자 '신민회(新民會)'를 중심으로 한 독립지사들은 중국 서간도에 해외독립기지를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의 이회영 집안은 그해 12월에 60여 명의 가족단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이어 안동의 이상룡·김동삼 집안이 그 뒤따랐다. 

이상룡은 1911년 1월 6일, 홀로 고향을 떠나 신의주에 머물면서 전후 사정을 살핀 다음 가족에게 연락하였다. 그 며칠 후인 50여 가족단이 신의주에 도착하자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단동(丹東)에서 마차 두 대를 마련하여 새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섰다. 긴 망명의 여로 끝에 영춘원(永春源)에 잠시 머물렀다. 먼저 도착한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선생 등이 20리 떨어진 추가가(鄒家街)에 살면서 이상룡을 찾아와 앞일을 의논하였다. 그분들뿐 아니라 매일같이 이상룡을 찾아드는 동포들이 줄을 잇자, 그곳 현지인들은 이들 조선의 망명 가족단을 경계했다.

"이전의 조선인들은 남부여대로 산전박토나 화전을 일궈 감자나 심어 연명했는데, 이번에 오는 조선인들은 마차 수대나 말 수십 필에 살림을 가득 실어 오는 걸 보면, 이는 반드시 일본과 야합하여 우리 중국을 치러 온 게 분명하니 빨리 조선인들을 몰아내 주시오."

이러한 현지인의 고발에 따라 청국 관리와 군경 300명이 이 마을에 들이닥쳐 조선 망명 이주민의 집을 일일이 조사하고 "너희 나라로 도로 돌아가라"고 윽박질렀다. 그런 뒤 각지에 군사를 시켜 수비케 하고, 조선인에게는 절대로 집을 빌려주지 못하게 하여 망명객들은 한동안 노숙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이상룡은 중화민국 국회와 봉천성 유하현 지사에 진정하여 조선인의 거주를 허용해 줄 것과 중국 민적(民籍)에 들어갈 수 있도록 간곡히 청원하였다.

삼가 신들은 동번(東藩, 동족 제후국, 여기서는 '조선'을 말함)의 유족으로 국란을 만났으나 용기는 안중근(安重根)이 적을 쏜 것에 미치지 못하고, 지혜는 민영환(閔泳煥)이 할복한 것에 미치지 못하는지라, 구차하게 목숨을 영위하면서 도망쳐 성명(姓名)을 숨기고 대국의 경계를 부평초처럼 떠돌게 되었습니다.  …

그리하여 본 현(縣, 유하현)의 경내에 가옥을 빌리고, 머리를 깎고 복장을 바꾸면서 먼저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끊고, 이어서 민적에 들기를 청하였는데 현조(縣照, 현에서 발급하는 외국인 거주등록증)를 받기에 이른 자는 약간입니다. 그때 미처 현조를 받지 못한 자들이 다시 지난 봄에 일제히 명단을 제출하고 겸하여 상부에 휘보(彙報, 보고)하기를 청하면서 영원히 거두어주는 은혜를 입기를 바랐습니다. …

저희들은 적인(敵人, 일본인) 손에 욕을 당하며 죽느니, 차라리 군자의 뜰에서 영광스럽게 죽을 것입니다. 이에 감히 존엄을 무릅쓰고 한 목소리로 호소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합하(閤下, 여기서는 유하현 지사)께옵서는 애타게 울부짖는 신들의 심정을 굽어 살피시어 특별히 물에서 건져주는 인정(仁政)을 베풀어 주소서.  - <석주유고(石洲遺稿)> 상권 549~552쪽 축약

다행히 이회영 집안과 총리대신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선대부터 깊은 세교가 있었다. 이에 이회영은 총리대신 위안스카이를 찾아가 협조를 구하고, 이상룡은 유하현 지사에게 간곡히 청원한 끝에 동포들의 입적과 토지 매매 문제가 원활히 해결되었다.

이로써 독립지도자들은 통화, 회인, 단동 지방에 여관을 설치하여 동지들의 활동과 국내에서 뒤따라오는 망명객들의 이주를 도울 수 있었다.

신흥무관학교 설립

만주로 망명한 독립지도자들은 동포들을 교육하는 일이 가장 시급했다. 이에 이회영·이계동(李啓東, 본명 鳳羲. 이상룡 아우) 두 사람은 봉천성에 청원하여 토지매매를 성사시켜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합니하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이 학교는 이회영 6형제들이 조국에서 가지고 온 큰돈과 이동녕·이상룡·김대락(金大洛)  독립지도자들의 열정으로 설립되었다. 하지만 중국 현지 관헌들은 조선 망명객들을 일본의 끄나풀로 오해하여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탄압이 가해졌다. 이에 이상룡은 다시 유하현 지사에게 청원하였다.

석주 이상룡의 친필 유묵으로, 유족들은 이를 목숨처럼 보존해 왔다.
 석주 이상룡의 친필 유묵으로, 유족들은 이를 목숨처럼 보존해 왔다.
ⓒ 석주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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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어에 "사람으로서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에 가깝다"고 하지 않습니까? 하물며 나라가 망해서 떠도는 우리 민족이 만약 교육을 받지 못한다면 어떻게 생존경쟁의 세계에서 스스로 존립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국의 학교에서 가르침을 받고자 하여도 언어가 통하지 않고, 학비를 계속 대기가 어렵습니다. 형편상 할 수 없이 생활이 극도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의식(衣食)을 절약하고 찬조를 받아 사사로이 학교를 설립하여 후진교육에 임하고 있습니다.

비록 인허(認許)를 청한 적은 없었으나 관료들의 찬조가 또한 많았습니다. 이는 대국이 너그러이 구휼해주는 은혜와 동족이 함께 장려하는 의리 덕분입니다. …

신흥학교로 말씀 드리자면 이는 저희들의 중등학당입니다. 소학(小學)의 설립이 수십 개소를 넘다보니 매년 졸업을 하는 사람이 통틀어 백여 인이나 됩니다.

소학을 마치면 중등교육을 받지 않을 수 없는데, 이 때문에 전대 청나라 선통 연간에 이 학교를 제2구의 추가가(鄒家街)에 설립하였고, 2년 후에 통화현 합니하(哈泥河)로 이전하였다가, 올 봄에 위치가 적절치 않다는 이유로 제3구의 고산자(孤山子)로 옮겨 왔습니다.

… 대국이 이미 우리의 무고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토지 조세와 가옥 임대에 모두 은혜로운 조치를 취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독 중등교육은 허가치 않아 새로 자라나는 자제들로 하여금 지식을 계발치 못하게 한다면, 이는 공화의 선정에 흠결이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각하께서는 특별히 성념(盛念, 너그러운 마음)을 베푸시어 이런 사유를 간곡하게 성공서(省公署, 관공서)에 아뢰어 주소서. 그리하여 우리 신흥학교가 영원히 존속을 보장받고 한인(韓人)의 자녀들이 소멸되는 것을 면하게 해주신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 <석주유고(石洲遺稿)> 상권 553~557쪽 축약

이회영 6형제, 이상룡, 이동녕, 김대락 등 독립지도자들의 간곡한 청원과 그분들의 열정에 힘입어 신흥무관학교가 비로소 설립되었다. 이 신흥무관학교는 우리 독립운동사의 정수(精髓)로, 그 졸업생은 3천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은 1920년의 청산리 전투의 주역으로 시작하여 이후 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의혈단에 이르기까지 용맹스럽게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눈물로 올리는 글

이상룡은 서간도 망명 초기 현지인들의 배척운동을 해소하고 그들과 친화감을 도모하게 위하여 변장(變裝)운동을 전개했다. 우선 당신부터 머리를 자르고 복식(服飾, 옷의 꾸밈새)을 바꾸었다. 그러자 동포 가운데 일부는 이런 변장운동에 크게 반발했다. 이에 이상룡은 동포들에게 읍소하였다.

어리석은 석주(石洲)는 눈물로 붓을 적시면서 동포형제들에게 공경히 한 말씀 올립니다.

 …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두 가지의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산업입니다. 사람이 거북이나 뱀이 아닌 이상 공기로만 호흡하며 살 수 없으며, 새나 짐승이 아닌 이상 날개나 털을 덮은 채 살 수 없으니, 추위나 굶주림을 면하려면 음식과 의복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산업은 우리 사람들의 기혈(氣血)이나 명맥(命脈)이 아니겠습니까?

재산이 넉넉하면 능력이 절로 생겨나서 신체가 건강해 질 수 있고, 자손도 번성해 질 수 있으며, 재산이 궁핍하면 만사가 군색하여 질병이 그로 인해 침범하고 인구가 감소하게 됩니다.

지금 우리 동포들은 이역에 떠돌면서 송곳 꽂은 땅조차도 자신의 소유로 된 것이 없어서 한 톨의 곡식, 한 뼘의 베도 반드시 돈을 지불해야 얻을 수 있습니다. 산업이 어찌 우리들이 먼저 마음을 쏟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둘째는 교육입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인간에게는 도리가 있는데,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고서 편안히 거처하며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禽獸)에 가깝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 내용을 반대로 하여 "사람이 교육이 없으면 배부름과 따뜻함, 안일을 누릴 수 없다"고 말하겠습니다. … 우리 동포가 무슨 까닭으로 조상 때부터 전래되어 온 3천리 옥토를 다른 민족에게 빼앗기고 이역에서 떠돌며 슬픈 비바람 속에서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까?

이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교육이 발달하지 못하면 지식과 기능이 타인에게 필적치 못하여 남의 압박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 생각이 여기에 이른다면 우리들은 비록 삼순구식(三旬九食, 30일 동안 아홉 번 먹음)을 하더라도 교육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 <석주유고(石洲遺稿)> 상권 559쪽 축약

석주 이상룡이 살았던 안동 임청각
 석주 이상룡이 살았던 안동 임청각
ⓒ 이항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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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 운동사 연구의 귀중한 사료(史料)

오늘의 잣대로 지난 시대를 재단치 말라는 말이 있다.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우리 백성들은 나라도 없는 암흑세상이었다. 그런 캄캄한 세상에서도 "내 가족과 후손들을 일본인의 종이 되게 할 수 없다"고 고래 등과 같은 집과 문전옥답을 버리고 만주로 망명하여 조국광복의 후일을 기약한 독립지사들이 있었다.

이분들은 오로지 조국광복을 위하여 낯설고 물선 이역 땅에서 풍찬노숙을 하며 일제와 맞서 투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동포를 가르치며 광복의 씨앗을 뿌렸다. 그 고난의 세월을 피눈물로써 기록한 글이 <석주유고(石洲遺稿)>다. 곧 <석주유고>는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사료(史料)로 길이 보존해야 할 국보다.


국역 석주유고 - 전2권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엮음, 경인문화사(2008)


태그:#『석주유고(石洲遺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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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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