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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란, 어른들이 하는 연애 같은 것이다.
▲ 타박타박 아홉걸음 여행이란, 어른들이 하는 연애 같은 것이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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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는 게 슬픈 건 더 이상 꿈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이 기다려지지 않고,
1년 뒤가 지금과 다르리라는 기대가 없을 때,
우리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견뎌낼 뿐이다.
연애란 어른들의 장래희망 같은 것이다.
- 드라마 <연애시대> 중

낯선 여행지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설레는 아침이다. 뭔가 거창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결국 나는 이 설렘을 나에게 선물하고 싶었던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는 사랑일까>에서 우리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상대방을 죽을 만큼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랑이라는 설레는 감정을 스스로에게 선물하기 위해서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여행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큰 마음 먹고 강원도 두메나 아프리카 오지를 가더라도 결국 나에게만 여행지일 뿐, 그곳 주민들에겐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다. 마치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신대륙이라고 외쳤던 것처럼. 그러니까 우리가 늘 여행 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은 실은 '설레고 싶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행하듯이 살고, 사는 듯이 여행하자. 창가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카자흐스탄 일레 알라타우 국립공원(Ile-Alatau National Park)의 설산을 향해 다짐한다.

여행하듯 살고, 사는 듯 여행하자.
▲ 타박타박 아홉걸음 여행하듯 살고, 사는 듯 여행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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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에 있는 동안 랜드마크 역할을 해주었던 케이블카 Кок-Тюбе
▲ 타박타박 아홉걸음 알마티에 있는 동안 랜드마크 역할을 해주었던 케이블카 Кок-Тюб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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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케이블카 꼭주베(Кок-Тюбе)를 타고 TV 타워가 있는 뒷산 위에 올라가면 알마티 전경을 조망할 수 있다고 하여 제일 먼저 그곳으로 향한다.

알마티에는 케이블카가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짧은 꼭주베이고 다른 하나는 일레 알라타우 국립공원의 심블락(Shymblack) 스키장까지 올라가는 긴 케이블카다(이 케이블카의 고유 명칭이 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 긴 케이블카는 현재 수리 중이라 탈 수 없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니 알마티 전경과 함께 저 멀리 지평선이 보인다.

광활한 대륙이라는 단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다. 도시의 시작과 끝이 한눈에 들어온다. 도시의 경계를 지도 위의 점과 선이 아니라 실제로 보다니. 생경하다. 한국에서는 언제나 시야를 가로막는 높은 빌딩 숲 속에 살았는데 전망이 탁 트이니 속이 후련하다. '끝없이 펼쳐진'이라는 말은 언제나 바다를 향한 찬사였는데, 이제 대지를 향하여 같은 말을 쓰게 되었다.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에서 공자는 태산에 올라 천하가 좁다 했는데, 우리는 노나라도 좁은 줄 모른다며 공자의 호연지기를 칭송했다. 공자는 정말로 태산에 올라서 천하가 좁다고 했을까. 내 그릇으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는 그야말로 호연지기다. 그나저나 이역만리에서 <관동별곡>을 떠올리는 나도 참 어지간하다.

나라는 작은 그릇으로는 공자의 호연지기를 담을 수 없다.
▲ 타박타박 아홉걸음 나라는 작은 그릇으로는 공자의 호연지기를 담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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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줬던 놀이동산
▲ 타박타박 아홉걸음 30년 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줬던 놀이동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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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에는 밤이 되면 예쁘게 반짝이는 대관람차가 있고, 카페와 식당, 동물원과 놀이공원 등 작은 유락시설 단지가 있었다. 한국의 그것과 비교하면 낡아 보이고 초라해 보였다. 비탈진 언덕을 이용한 롤러코스터 위를 달리는 2인승 궤도열차를 타고 환호를 지르는 노신사 두 분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났다. 1980년대 도시마다 있던 놀이동산 딱 그 모습 그대로다.

이곳 역시 그때쯤 만들어졌을 것 같은데 관리가 아주 잘 되고 있었다. 내가 갔을 때도 일하시는 분들이 가지치기와 페인트칠을 하고 있었다. 건너편의 TV 타워에도 전망대가 있다고 해서 더 높이 올라가 보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수리 중이란다.

알마티 시내를 걷다 보면 생경한 풍경을 자주 보게 된다. 옛 것과 새 것들이 공존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알마티는 1929년부터 1997년 아스타나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카자흐스탄의 수도였고, 지금도 인구 100만 명이 넘는 카자흐스탄 최대의 도시이다. 특급 호텔과 고급스러운 펍이 많은 번화가인 도스틱 애비뉴(Dostyk Avenue)를 걷다 보면 도로 좌우로 고풍스러운 건물들이 즐비하다. 알마티는 전형적인 직교형 계획도시로 오래된 건물은 아마 도시 형성 초기에 지은 건물로 보였다.

낡은 놀이동산이 아쉽지 않은 도시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손끝으로 하나 하나 쓰다듬고 싶은 예쁜 집들과 고풍스러운 빌딩들
▲ 타박타박 아홉걸음 케이블카에서 내려다 본 손끝으로 하나 하나 쓰다듬고 싶은 예쁜 집들과 고풍스러운 빌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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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심 속 숲속을 걷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이런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 타박타박 아홉걸음 도심 속 숲속을 걷는 것만으로 행복했고, 이런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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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큰 건물들 사이에는 어김없이 아름드리나무들이 우거진 숲이 블록마다 있었다. 공원은 연인들의 데이트코스, 아이들의 놀이터, 노인들의 산책로 등으로 이용되면서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다.

놀이동산을 보면서 '참 놀거리가 없나보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알마티는 굳이 인위적인 유락시설을 만들지 않아도 햇살 좋은 날 도심 곳곳에 펼쳐진 숲속을 산책하고 겨울에 마음껏 스키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OO방으로 불리는 밀폐된 개인의 공간이나, 거대한 쇳덩이에 매달려 오르내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즐거운 곳이었다.

참, 거의 모든 공원에는 동상이 세워져 있었다. 처음에는 보이는 동상들 마다 사진을 찍다가 나중에는 너무 많아서 포기했다. 그리고 내가 찍고 있는 이 동상의 주인공이 누군지 모른다는 무지도 한몫했다.

훌륭한 사람이 많아서일까, 동상을 많이 세우는 문화적 관습인걸까
▲ 타박타박 아홉걸음 훌륭한 사람이 많아서일까, 동상을 많이 세우는 문화적 관습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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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자유롭게 달리는 전기 버스와 고풍스러운 지하철 역사
▲ 타박타박 아홉걸음 도로를 자유롭게 달리는 전기 버스와 고풍스러운 지하철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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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조금 더 걸으니 해운대 센텀시티에나 있을 법한 쇼핑센터가 있었고, 저 멀리 외관 전체가 유리로 된 세련된 건물도 우뚝 서 있었다.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들도 아주 오래되어 자동차 박물관에 있어야 할 것 같은 삼륜 자동차부터 최고급 세단까지 섞여 있었다.

알마티 시내를 달리는 시내버스도 전기선을 따라 달리는 버스와 일반 버스 그리고 고풍스러운 노면전차가 섞여 있었다. 개통한 지 오래되지 않은 듯한 지하철은 전체 노선이 8개 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하철 역사 내의 고풍스러운 모습은 지상의 알마티와 닮아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낡은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는 것 같았다. 이것이 도시를 보며 생경함을 느낀 이유였다. 낡은 놀이 공원에 정성껏 페인트칠을 하고 사람들은 또 그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명품 브랜드가 입점한 주상복합 건물의 위층은 베란다에 문틀도 하지 않은 집이 많았지만 고풍스러운 모습 그대로 서 있었다. 신도시와 재개발에 익숙해져 살다가 와서 그런지 당연한 도시의 풍경이 생경하게 느껴진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1981년에 완공되었는데 올해부터 재개발 절차에 들어간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사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재개발을 하면 집값이 오른다고 한다. 집주인들은 좋겠다. 여행 마치고 돌아가면 집이 없어졌다거나 하지는 않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여행이란 어른들이 하는 연애 같은 것

매일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찾았던 Dostyk Plaza
▲ 타박타박 아홉걸음 매일 저녁 식사 준비를 위해 찾았던 Dostyk Pla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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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열풍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해 준 쇼핑몰
▲ 타박타박 아홉걸음 한류열풍이라는 말을 실감하게 해 준 쇼핑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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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마티에 오기 전까지 카자흐스탄에 대한 이미지는 황량한 중앙아시아와 닮아 있었다. '중앙아시아 어딘가에 있는 개발도상국'이 내가 가진 일방적인 편견이었다. 그러나 카자흐스탄은 개발도상국도 후진국도 아니었다. 큰 마트가 있어서 장을 보러 들어간 쇼핑몰 도스틱 플라자(Dostyk Plaza) 내부는 우리와 다를 것이 전혀 없었다. 낯익은 구조와 낯익은 매장들이 입점해 있었다. 그리고 카자흐스탄에도 아시아를 강타하고 있는 한류 열풍을 직접 느낄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반도국가라고 하지만 북쪽에 북한이 있으므로 완전한 섬나라다. 그래서 사실 외국을 제집 드나들 듯이 살기는 쉽지 않다. 뉴스를 통해서 한류열풍이라는 단어를 닳도록 보고 들었지만,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서 아이돌 그룹 모델들을 보니 조카처럼 반갑기도 하고 없던 애국심이 불쑥 솟아났다.

토종 우리나라 브랜드를 찾는 재미가 쏠쏠했다. 특히, 문구류를 파는 국산 브랜드를 찾았을 때는 나도 모르게 '와!' 하고 감탄사가 나왔다. 나는 속칭 문구류 중독자기 때문이다. 반가운 마음에 들어가 보니 흥미로운 제품은 없었고, 가격표가 흥미로웠다. 한국에서 파는 가격 그대로 카자흐스탄 화폐인 텐게(Tenge)로 받고 있었다. 1텐게는 3.5원 정도이니 3.5배의 가격으로 팔고 있는 셈이었다. 3.5배는 좀 심했다 싶다.

알마티에 있는 모든 한국 상점과 물건들을 통틀어 가장 반가웠던, 문구류 전문점
▲ 타박타박 아홉걸음 알마티에 있는 모든 한국 상점과 물건들을 통틀어 가장 반가웠던, 문구류 전문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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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여성들은 대체로 화장을 짙게 한다. 눈 화장을 특히 짙게 하는데 원래 크고 깊은 눈이 더 뚜렷해져서 모두가 미인들이다. 그래서 그런지 거리 곳곳에 화장품 매장이 참 많다. 쇼핑몰 안에도 화장품 매장들이 많이 입점해 있었고, 요즘 한국에서 살신성인의 자세로 법조계와 정·재계 거물들의 비리를 고발하고 계시는 회장님 때문에 더 유명해진 매장도 좋은 자리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도 로비로 입점하신 건 아니겠지요?

식품 코너에 들어가서 또 한 번 놀랐다. 식료품의 가격이 한국과 차이가 크게 났기 때문이다. 카자흐스탄에 오기 전에 이곳의 물가는 한국과 비슷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떤 종류의 물가를 기준으로 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행객들이 느끼는 생활 물가는 정말 저렴했다.

생수 1리터 120텐게(400원), 커다란 바게트 150텐게(500원), 맥주는 200텐게(700원)면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 사람들이 커서 그런지, 땅이 넓어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양이 많다. 기억나는 물가들을 조금 더 나열하면 버스와 지하철은 80텐게(300원), 휘발유는 리터당 95텐게(350원), 담배 한 갑은 350텐게(1200원), 여행자 숙소 도미토리 1박에 2000텐게(7000원), 점심 한 끼 든든한 케밥은 600텐게(2100원) 정도였다.

대형 마트 안에서 한국 식자재들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국 라면은 종류별로 마음껏 고를 수 있었고, 가격도 한국에서와 다르지 않았다. 그 외에도 필요한 것들은 모두 있었다. 쇼핑을 마치고 숙소에서 라면을 끓이고, 스시용 쌀로 밥을 하고, 구운 김을 펼쳐 고추 참치를 넣고 김밥을 만들어 저녁을 먹는다. 싸구려 홍차를 사서 티백도 필터도 없이 찻잎 그대로 컵에 넣어 우려내도 향이 좋다. 기분 탓이리라. 나는 설레고 있었고, 아무런 감흥 없이 도착한 알마티에 점점 정이 쌓여갔다. 여행이란 어른들이 하는 연애 같은 것이다.

중앙아시아 한가운데에서도 김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나라 카자흐스탄
▲ 타박타박 아홉걸음 중앙아시아 한가운데에서도 김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는 나라 카자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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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 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타박타박, #아홉걸음, #배낭여행, #세계일주, #알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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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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