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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애도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마련한 추모 장소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지난 22일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애도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마련한 추모 장소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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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오전, 저에게 그날은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날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침대에서 일어나 휴대폰부터 부여잡고 SNS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5월 17일 새벽 1시 어느 노래방의 공용화장실에서 한 여성이 한 남성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제 타임라인은 피해 여성에 대한 추모와 함께 수많은 여성들의 '살아남았다'는 태그로 가득 찼습니다.

'살아남았다'는  말은 동시에 '(피해자가)나였을 수도 있어'라는 뜻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안도의 한숨은 거리로 향했습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포스트잇이 붙기 시작했습니다

'살아남았다', 저는 고민을 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썼던 적은 있을까? 가끔 농담처럼 하는 정도였지, 진심을 담아 말했던 적은 거의 없습니다. 진심을 담아 말했던 적은 물속에 빠져 죽을 위기에서 벗어난 순간뿐이었습니다.  수많은 여성들이 했던 '살아남았다'는 말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저는 남자라서 살아남았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살아남았다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저는 남자라서 어두운 밤길을 걸으며 두려웠던 적이 없습니다. 정확히는 두려움을 느꼈던 적이 있었지만, 믿지 않으면 생기지도 않을 귀신에 대한 두려움이었지, 보이는 폭력의 가능성에 대한 두려움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남자라서 탈의실과 화장실을 갈 때 몰래카메라를 걱정했던 적이 없습니다. 저는 남자라서 공용화장실에 들어갈 때 누가 들어오고 누가 언제 나가는지를 확인하고 걱정했던 적이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걱정했던 적이 있었지만, 볼일을 보는 나를 볼지도 모를 여성에 대한 걱정이었지, 보이는 폭력의 가능성에 대한 걱정은 아니었습니다.

"여자가 나를 무시했다", 가해자가 범행 직후에 한 말입니다. 가해자를 무시했던 당사자도 아닌 얼굴도 모르는 여성을 살해했습니다. 하지만 범죄가 살인이건 폭행이건 상관없이, 범행 직후 '(그) 남자가 나를 무시했다'고 말했던 이들 중에 가해자를 무시했던 당사자가 아닌 얼굴도 모르는 남성에게 범행을 저지르는 경우는 없습니다. 결국 피해자는 여자라서 죽은 겁니다. 사회가 여성을 낮게 보는 태도, '여성혐오'에 의해 죽은 겁니다.

이 사회에서 여성혐오는 여성을 향한 성적대상화와 성차별적 태도로부터 끊임없이 재생산됩니다. "따먹고 싶다", "가슴 만지고 싶다" 등의 여성에게 향하는 음담패설들은 그 정도가 굉장히 심각합니다. 남성들 간에 농담으로 하던 음담패설들이 여성들 앞에서 벌어지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성들 간에서의 농담보다 다소 완화되어, "가슴 크다", "꿀벅지다" 등의 말이 여성들 앞에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이 경우, 여성 개개인별로 반응이 다를 수 있겠지만, 기분이 나쁘다는 의사를 표현하는 여성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말을 듣고도, 사과하지 않고 칭찬이었다고 말하며 넘어가는 남성들도 있습니다.

일상적으로 사용하던 말들이 여성혐오를 조장하고, 이것이 종종 범죄로 발전하는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성들로부터 물리적 폭력을 겪었다는 수많은 여성들의 증언이 이를 증명하는 건 아닐까요?

누군가는 모든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모든 여성이 잠재적 피해자라는 점입니다. 5월 17일 새벽 이후, 많은 여성들은 폭력을 겪었던 지난날의 삶을 토로했습니다. 단순히 여성들의 말을 개개인의 피해의식으로 단정 짓기에는, 여성들의 경험은 너무도 보편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의 보편성이 수많은 여성들로 하여금 '살아남았다'는 말을 하게 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든 순간, 저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가족, 친구, 지인들이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을지도 모를 가능성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모든 여성이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죽을지도 모를 가능성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단순히 가해자를 처벌함으로써 끝나는 게 아니라, 여성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질 수 있도록, 누구나가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삶의 평등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삶의 평등은 단순히 치안만 강화함으로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삶에 공감함으로써 여성혐오가 사라질 때 이루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이를 이루기 위해, 저는 청주 곳곳에 추모공간을 만들고자 합니다. 저와 함께 추모공간을 만들지 않으실래요?

제 제안에 관심 있는 분들은 저에게 페북 메시지나 연락(010-3386-9119)을 주시면 됩니다. 저는 일단 청주 성안길 입구 쪽 지하상가에 추모공간을 만들고자 합니다. 성안길 입구 쪽 지하상가의 추모공간은 5월 25일(수) 오후3시부터 운영할 예정입니다. 무언가를 함께 하기가 부담스럽다면, 추모공간에 찾아오셔서 포스트잇을 남겨주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태그:#살아남았다, #여성혐오추방, #강남역10번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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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배달라이더 노동조합인 '라이더유니온'의 충북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배달노동을 하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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