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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서울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범죄 동기에 대해 정신질환, 계급, 여성혐오 등 다양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지만, 하나만은 분명하다.

수많은 여성이 이 사건에 불안감을 느끼고 있으며, 자신의 경험을 적극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번 살인 사건의 동기와 무관하게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얼마나 불안에 떨며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 청소년 모임에서 활동하는 10, 20대 청년들과 이야기 나눴다.

인터뷰 참여자
- 사이(10대 여성), 따오(20대 초반 여성), 세주(10대 여성), 화수(10대 남성)

"아, 오늘도 한 명의 여자가 남성에게 살해당했구나"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것에 놀랐어요"

22일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애도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마련한 추모 장소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22일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애도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마련한 추모 장소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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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을 처음 접했을 때 어떤 느낌이 들었나요?
따오: "'아, 오늘도 한 명의 여자가 남성에게 살해당했구나.' 이런 사건이 너무 비일비재해서 무서울 정도로 무감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이 사건이 SNS에서 화제가 되고 사람들이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고, '여자에게 무시당해서 죽였다'는 가해자의 증언이 올라오며 여성혐오 범죄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범죄 발생 장소가) 저도 몇 번 이용했던 곳이고, 잘 아는 곳이라 더 소름이 끼쳤어요. 정말 내가 죽었을 수도 있었는데... 그때부터 나의 일로 다가오더라고요."

사이: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오른 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지난 주 목요일에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제에 가서 발언을 듣다가,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어요. 제 지인이 어떤 사람이 자기 허벅지랑 엉덩이를 만진 것 같다고 얘기했어요. 그때 저는 '난 모르겠는데 네가 예민한 거 아냐?'라고 말했어요. 되게 마음이 무거워요. 저도 피해자이자 동시에 가해자란 생각이 들고... 지금도 마음이 무거워요."

따오: "저도 강남역 10번 출구에 가서 추모 글귀를 담은 포스트잇을 하나하나 보면서, 저와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여성들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다음 날 추모제에서 시민 발언을 했는데, 이야기하면서 무서웠어요. 지금도 SNS를 보면 얼굴을 밝히고 인터뷰한 여성들의 사진이 캡처돼 돌아다니면서 인신공격 등을 당하고 있잖아요. 제 사진을 보고 누군가 저를 기억해서 길거리에서 폭행을 당하거나 염산을 맞을까봐 걱정이 됐어요.

그래서 모자를 썼는데 마스크 쓰고 집회에 오신 분들이 많더라고요. 집에 돌아와서 한 방송을 보는데 도입부가 '강남역 10번 출구에 페미니즘 관련 여성들이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채 신상을 공개하기 꺼려했지만, 이 당찬 여고생 000양은 얼굴과 실명을 드러내고 당당하게 얘기를 했다'였어요. 보면서 '세상이 미쳐 돌아간다'고 느꼈어요."

-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이 지금은 화제가 되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관심이 떨어질 수 있어요. 이후의 이 문제의 방향은 어떻게 되어야 할까요?
따오: "정말 중요한 게, 이런 범죄는 '매우 나쁜 사람'만이 일으키는 거라고 인식하잖아요. 하지만 누구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어요. 성폭력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고, 이 원인이 개인이 아닌 성별 권력에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사이: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취급하는 건 문제다'라는 말 자체가 이미 '가해'라고 생각해요. 한 번이라도 성별에 근거한 권력을 이용해 타인의 외모 품평을 했거나, 몰카 야동을 봤다면 이미 가해자라고 생각해요."

따오: "소위 '진보적'이라는 남성들도 그런 경우가 많아요. 여성 활동가들의 외모를 품평하기도 하죠. 젠더 이슈에 가장 예민하게 반응한다는 운동사회 안에서도 (관련 사건이 터졌을 때) 성폭력 피해 대책위 구성이나 가해자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진 적 없어요. 사적인 공간에서 당사자가 듣지 못하더라도 그게 성폭력이라는 인식을 하면 좋겠어요."

"여성도 자유롭지 않은 여성혐오"
"자신이 가해가 될 수 있다는 걸 인정하는 것부터"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인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일베 회원 등이 나타나 '여성혐오' 등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며 추모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충돌을 우려해서 경찰 수십명이 출동해 현장에 배치되었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희생자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모인 강남역 10번출구에서 일베 회원 등이 나타나 '여성혐오' 등에 대해 입장을 드러내며 추모객들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충돌을 우려해서 경찰 수십명이 출동해 현장에 배치되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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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은 여자 대 남자의 싸움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여혐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혼자 찔려서 화내는 사람들을 보며 굉장히 답답했어요. 맞는 걸 인식했으면 바꿀 생각을 해야지, 약자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댓글을 다는 게 이상했어요. 여성 인권이나, 청소년 인권이나 시작은 가해자가 자신이 가해자라는 걸 인정하는 데서부터라고 생각해요. 여자도 여혐을 해요. 청소년 인권도 권위주의고, 자신이 꼰대라는 걸 인정해야 출발점에 서는 것 같아요."

따오: "저를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가장 많이 했던 건 할머니와 엄마였어요. 여성으로서 차별을 받고, 그렇게 평생을 살아왔기에. 그런데 또 신기한 게 할머니가 엄마보다 심해요. 할머니는 '여자애가 그렇게 떠들지 마라', '어차피 시집갈 건데 뭣 하러 그런 걸 하냐?'고 말하시는데, 엄마는 '옛날 분들이니까 그렇지' 얘기하세요.

근데 또 엄마도 편견에 바탕을 둔 이야기를 해요. 제가 중학교 때 빨간색 가방을 샀는데 '빨간색을 변태들이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런 걸 사'라고 하셨어요. 이런 걸 보면 여성의 여성혐오가 희석되고 있지만 아직은 먼 것 같아요. 1970년대 기사를 보면 성폭행 피해자인 여성에게 가해 남성과 결혼하라고 이어줬다는 기사가 있어요. '어차피 버린 몸 결혼을 하라'면서 '판사들은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이런 표현이었어요. 지금처럼 공론화되는 것 자체가 많이 발전된 것이라 생각해요."

"내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도 문제 있습니다
"여성 상위시대는 여성이 남성들이 원하는 이미지에 부합할 때만"

22일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애도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마련한 추모 장소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22일은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 피해 여성을 애도하기 위해 강남역 10번 출구에 마련한 추모 장소를 볼 수 있는 마지막 날이었다.
ⓒ 김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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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혐오는 무엇이라고 생각해요?
따오: "저는 사회 운동을 하시는 분들과 많이 만나요. 굉장히 진보적인 분들이세요. 그런데 여성혐오 관련해서는 '나는 여성혐오 안 해. 내가 여자를 얼마나 좋아하는데?'라고 말하세요. 그게 여성혐오인데 말이죠.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 좋아하고, 물건같이 대상화시키는 거잖아요. 제가 '숭배와 혐오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을 보고 감명을 받았어요. 여자 아이돌도 청순, 소녀스러운 이미지를 소비하고 좋아하는데 속옷이 노출되거나, 성적으로 보이는 행동을 하면 바로 돌변하잖아요. 흔히 말하는 성녀와 창녀 프레임 같기도 하고. 여성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는 것이 혐오인 것 같아요."

세주: "조금 세게 말하면, 여성이 들었을 때 여혐이라고 생각하면 여혐이라고 생각해요. 가해자 중심에서 생각하면 모든 게 합리화될 수 있다는 걱정이 들어요."

사이: "'여성 상위시대'라는 말이 허용되는 건 그 여성이 젊고 예쁘고 여성성이 인정받을 때, 그때거든요. 가수 아이유도 남성들이 원하는 이미지, 즉 청순하지만 은근히 섹시한 수동적인 이미지였을 땐 비판받지 않았죠. 하지만 셀카 사건이 터지고, 아이유의 성적인 주체성을 드러났을 때 여론이 확 돌아섰잖아요. 이게 바로 여혐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성이 드러날 때만 여성을 숭배하잖아요. 여성을 사람이 아닌 성적인 대상으로만 바라본 거잖아요."

따오: "저는 사회 운동을 하면서도 흔히 얘기하는 '코르셋녀'였던 것 같아요. 같이 일하던 여성활동가 중에 브래지어를 거부하는 분이 있었어요. '너 (가슴) 다 보여, 왜 (브래지어) 안 입고 다녀? 뭐라도 걸쳐'라고 했어요. 그 외에도 데이트폭력, 이별폭력이 이슈가 되면서 '저 남자 되게 찌질하다'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그리고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저도 진짜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여자 집단은 피곤하고, 뒷말도 많고... '메갈리아'가 생기며 충격을 많이 받았어요. 저 말고도 많은 여성들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해요. 메갈리아의 모든 면이 긍정적이라 볼 수는 없지만, 저도 모르게 불편하게 여겼던 여성혐오를 하나의 언어로 정리하며 얘기하게 된 것이 (편견에서 벗어난) 시작점인 것 같아요."

사이: "저도 여자인 친구들끼리 장난이지만 서로 외모 지적도 하고, 스스로도 코르셋을 가지고 있었는데 계속 생각하다 보니 제가 남성중심 사회에서 자라왔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강자가 약자에게 가하는 폭력과, 약자가 그에 저항하는 것은 다른 지점이 있어요."


태그:#강남역살인사건, #여성혐오, #페미니즘, #청소년운동, #청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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