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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멍난 양말
 구멍난 양말
ⓒ 강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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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모시고 장례식장에 가기로 했다.

"이거 말고 검정 옷 없어요?"

친정 대문을 나서는 엄마를 잡고 물었다. 언니가 했던 "작은 이모는 격식 차려"란 말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엄마와 집으로 들어갔다. 마음이 급하다. 대문 앞 좁은 도로에 정차해 있는 남편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안방에서 옷장을 뒤졌다. 검은 옷을 챙겨 드리고 보니 이번엔 엄마의 양말에 콩알만하게 뚫린 구멍이 보인다.

"엄마, 양말 갈아 신어. 구멍 뚫렸잖아? 양말 어디 있어?"

여든다섯 엄마가 다리를 구부려 양말 끝을 본다. 별거 아니라는 듯 '씩' 웃으며 엄마가 말한다.

"괜찮아. 안 보여."

속이 터진다. 엄마가 다리를 구부릴 때 엄마 발바닥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양말 발바닥엔 500원짜리 동전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엄마! 안 보이긴 뭐가 안 보여. 엄마한테나 안 보이지. 다른 사람한테는 다 보여. 그리고 여기도 구멍 크게 뚫렸네!"

답답한 마음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엄마는 깜짝 놀라 움찔하신다. 잠깐 사이 말이 없다.

"너까지 엄마한테 큰소리를 치고 그럴래? 할머니 되면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란단 말이야."

차에서 기다릴 남편 생각에 마음이 급해져서 소리가 커졌다. 내 잘못이다. 큰소리 치면 엄마가 섭섭해 하시는 걸 뻔히 알면서.

"엄마 미안해. 내가 마음이 급해서."

양말까지 갈아 신고 차에 탔다. 그래도 그냥 장례식장에 갔으면 어찌할 뻔했나? 이모한테 우리 남매 모두 분명 한소리 들었을 거다. 내가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지 싶다. 엄마 연세 여든 다섯이라 그런 작은 것들 챙기는 게 다 불편해지신 모양이다.

작은이모는 엄마보다 네 살 어리다. 언젠가 한 번 엄마 생신을 깜빡 잊은 적이 있었다. 엄마가 말을 한 건 아니었는데 집에 전화했던 이모가 그 사실을 눈치챘다. 결국, 이모한테 꾸지람을 들었다. 이모는 우리 남매가 유일하게 무서워하는 친척 어른이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언니랑 형부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작은이모랑 이모 아들인 이종사촌 오빠네 가족도 만났다. 엄마는 사촌 오빠의 아들을 기특하게 바라본다. 나이는 스무 살 정도로 키도 크고 훤칠하게 잘 생겼다.

"예쁘게 생겼어. 착하고."

모두 제일 나이 많은 엄마의 덕담에 웃고 좋아했는데 사촌 오빠는 표정이 안 좋다.

"아니야 이모. 안 착해. 말 안 들어."

사촌 오빠가 엄마의 손을 다정히 잡고 있다.

"그러는 너는. 너도 옛날에 말 안 들었어."

엄마가 오빠에게 말한다. 사촌 오빠가 당황해하며 웃는다.

"이모, 그런 이야기를 지금 여기서 하면 안 되지."

한바탕 모두 웃는다. 그중 제일 크게 웃은 사람은 물론 사촌 오빠의 아들이었고.

시골서 아이 셋 낳은 엄마, 칠년 뒤 나를 낳았다

나는 엄마 나이 서른아홉에 태어난 늦둥이다.
 나는 엄마 나이 서른아홉에 태어난 늦둥이다.
ⓒ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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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 자릴 잡고 앉았다. 이모가 옆 테이블에 앉아서 언니랑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나에게까지 그 말이 들린다.

"야, 내가 쟤 태어났을 때 너희 집 가느라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몰라. 미역 사 들고 고척동에 들어가는데 길이 안 좋았어. 질퍽해서 버스가 들어가야 말이지. 그래도 어떻게? 들어가긴 가야 해서 군인 트럭 얻어 타고 갔다니까."

이모가 말한 쟤는 나였다.

"내가 그렇게 낳지 말라고 말렸는데. 내 말을 안 듣고 낳아서 날 이렇게 고생시키나 싶어서 내가 그날 어찌나 화딱지가 나던지."

모두 웃는다. 엄마가 나 임신했을 때 이모가 낳지 말라고 말렸구나. 모르고 있던 사실을 처음 알았다. 난 엄마 나이 서른아홉에 태어난 늦둥이다. 엄마는 결혼하고 첫 딸을 얻었고 사 년 뒤 아들딸 쌍둥이를 낳았다.

서울 태생인 엄마는 쌍둥이를 낳았을 때 아버지 근무지를 따라서 충청도에 살고 있었다. 쌍둥이 낳고 몸조리 할 때도 주변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엄마가 꽤 고생하셨다.

마른 체구의 엄마는 젖도 잘 안 나왔다. 그 고생을 하고 시골서 혼자 아이 셋을 키웠으니 칠 년 뒤 나를 임신했을 때 이모가 출산을 반대할 이유는 충분했다. 없는 살림에 고생하는 언니가 늦둥이까지 낳으려 하니.

엄마가 늦은 나이에도 나를 낳으려고 했던 이유는 누나 둘 틈에서 '언니, 언니'하고 따라다니는 오빠에게 남동생을 만들어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세상일이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리고 '딸'이었다. 얼마나 그때 말 안 듣는 엄마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그때 태어난 내가 지금 앞에 앉아 있는데도 이모는 저 말씀을 하실까?

"이모, 그래도 제가 그때 태어났으니까 지금 여기에도 와 있죠."

내 말에 이모도 웃으신다.

생각해 보니 우리 엄마 고생하는 걸 이모가 제일 많이 알고 있겠다 싶다. 이모 고생하는 건 엄마가 제일 많이 알고. 이모 걱정 속에서 난 태어났다. 아니 난 엄마의 배 속에 자리 잡으면서부터 이모의 걱정거리였다.

장례식장 오기 전에 언니랑 통화하며 우리 아이들이 이래저래 속을 썩인다고 어찌하면 좋겠느냐고 하소연을 했던 일이 생각난다. 내 자식이 내 속 썩이는 걸. 누구한테 시시콜콜 이야기하겠나? 바쁜 남편 붙들고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해 보았자 별 도움이 안 된다. 남편 머리엔 그런 소소한 일들은 입력이 안 된다. 남편에게 이야기 한 적도 있다.

"지금 당신 내 이야기 듣고 있는 거야?"
"미안해. 나 (회사일 생각에) 당신 말이 하나도 안 들어 와."

이런 식이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내 자식 흉을 볼 수도 없다. 그러니 언제나 내 상담창구는 언니가 될 수밖에. 언니가 없었으면 내가 자식 셋의 엄마 노릇을 지난 이십 년간 어찌했었을까 싶다. 그러니 엄마에게도 이모에게도 그런 사람이 필요했을 거다.

이모들이란 조카의 말썽을 엄마 다음으로 많이 아는 사람이다. 엄마 속 썩이는 조카를 만나면 '니 엄마 속 좀 그만 썩여!' 하고 혼내고 싶어 입이 근질 글질한 사람도 이모고.

왜 우리 남매가 이모를 무서워 했는지 이젠 그 이유를 알겠다. 남편 몰래 자식 흉보고 이야기할 사람. 그래서 엄마에겐 여자에겐 자매가 필요한가 보다. 나에게 언니처럼 엄마에겐 이모가.

내 고민을 덜어주는 언니가 고맙고 엄마의 속 시끄러움을 들어준 이모가 고맙다. 이모에게 들었던 꾸지람도 실은 이모가 엄마를 사랑하는 방법이었구나 싶다. 그 덕분에 엄마는 우리 남매 엄마 자리에서 육십 년을 도망 안 치고 여태 살아 올 수 있었던 것 같다.


태그:#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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