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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 중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번화가 강남 한복판에서 20대 여성이 무참히 살해당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뒤의 현상이다. 대한민국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사건 수사결과는 아직 다 나오지 않았지만, 이미 사건은 여성 혐오범죄로 누군가에 의해 규정되었다. 이를 신호탄으로 여성 혐오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가 거리 한복판으로 쏟아졌다.

수십 명의 여성들이 희생당한 유영철 사건이나, 무고한 여성이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이 되어 살해당한 우위안춘 사건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현상이었다. 대한민국 개국 이래 처음 겪는 방식의 저항에, 엇나간 반응과 격양된 목소리가 엇갈리며 달아오른 여론은 아직도 식을 줄 모르고 있다. 하지만 이 이슈는 이 사건 때문에 갑자기 솟아나온 것이 아니다.

지난 2015년 12월 7일. 유튜브에는 "아빠에게(Dear dad)"라는 영상이 업로드 되었다. 국내에는 유튜브의 원본 영상보다도 한글 자막 영상이 페이스북에 공유되어 더 많은 반응을 이끌어낸 영상이다. 내용은 곧 태어날 딸이 그녀의 아버지에게 간절하게 올리는 부탁이다.


딸이 당하게 될 모멸과 성폭력, 그리고 직접적인 폭력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모든 사건의 원인은 그녀의 아버지가 무의식적으로 제공한 셈이 된다. 여성에 대한 멸시와 혐오의 표현들을 "장난"이라는 포장 속에 아무 죄책감 없이 사용한 것, 그리고 그것이 주변 남성들이 여성에 대한 혐오를 무의식 속에 심어놓은 것, 끝내 그것이 물리적, 사회적으로 발현하는 동안 모든 단계를 아무렇지 않게 넘겨온 것. 이 모든 톱니바퀴들은 순조롭게 작동하여 무명의 딸은 폭력과 범죄의 피해자가 되고 그녀와 얽힌 삶들은 함께 엉망이 되어간다. 그 모든 것을 막기 위한 부탁은 단 한가지이다.

"제발 주변의 남성들이 여성을 '창녀'라 부르고 모욕하는 것을 막아주세요."

여성에 대한 혐오와 원죄의 의식은 사실 인류 역사에서 그 뿌리가 깊다. 성경 속에서 선악과를 따서 인류가 낙원에서 추방된 원인도 여성에게 있고, 그리스 신화 속에서 인류에게 재앙을 안길 상자를 열어본 것도 여성이다. 고대 그리스의 트로이 전쟁은 남성들이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은 헬레네가 되어야 했으며, 중국 상나라가 멸망한 원죄도 폭군의 애첩에 불과했던 달기가 뒤집어써야만 했다. 오랜 역사 속에서, 여성들은 어딘가 모자란, 남성들의 욕망의 대상으로 철저히 타자화 되었다.

이처럼 오래된 여성혐오는 많은 페미니즘 전문가들이 말하듯 남성중심 사회가 작동하는 중요한 장치이자 여성에게 벌어지는 모든 차별을 정당화 하는 수단이었다. 상대적인 약자집단에 대한 억압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의식에 강제로 주입 시키는 주사바늘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그 효과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드러난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가리지 않는 데이트 폭력, 특정 대륙에서 아직도 자행되는 여성 할례, 경악스러운 논리로 생명을 앗아가는 명예살인, 인도 전역에서 벌어지는 무차별적인 성폭력 범죄 등등. 인류와 그 역사를 함께해온 여성 혐오의 포자는 지구촌 곳곳을 지독하게 좀먹고 있다.

"왜 정신질환자가 여성을 대상으로 벌인 사건이 여성 혐오 반대론으로 번지는가?"에 대한 물음에 답은 이미 언급되었다. 앞에서 말했듯 전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자행되는 여성 학대 범죄들이 그 중에 일부다.

또 범죄자 개인에게는 "아빠에게(Dear dad)"가 지목하듯 문화적으로 형성된 무시, 멸시, 혐오의 감정이 범죄의 대상을 특정하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특히 그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담론이 되었을 경우의 참상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대로 다양한 형태를 보인다. 특히 대검찰청의 통계가 보여주듯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강력범죄 중 여성 피해자의 비율이 높아졌다는 것은 이 우려가 기우가 아님을 보여준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 지난 17일 새벽 서울 강남역 부근 남녀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20대 여성을 살해한 사건과 관련, 21일 오후 강남역과 사건 현장을 오가는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추모행진'이 수백명의 시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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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의 사회 동향으로 인해 이번 사건의 초점은 여성혐오에 맞춰졌지만 한국 사회는 이미 혐오범죄의 많은 유형을 접해왔다. 이미 1970년대부터 모습을 나타낸 어린이 연쇄살해, 노약자 연쇄살해 등의 살인범들은 혐오범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왔다. 자신의 불행한 원인을 약자에게 전가하며 비논리적 혐오증상을 보인 살인범들이 적지 않았다. 사회적 강자라 해서 예외는 없었다. 1990년대 지존파 사건에서는 부유층 혐오가  강력 범죄로 이어지기도 했다. 누군가가 불특정 집단에게 혐오감을 갖는 사회 환경이 조성된 순간 누구나 표적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들이다.

이번 강남 살인사건의 CCTV 화면을 많은 방송사들이 경쟁적으로 공개한 바가 있다. 한 방송사는 사건 이후 피해자의 남자친구가 현장에서 쓰러져 오열하는 영상을 내보내기도 하였다. 사생활에 대한 관음증이라는 비판이 많은 대목이었지만 그 장면은 많은 남성들의 가슴에 직접 와 닿는 그림이었다.

이처럼 여성혐오 사건의 피해자는 당사자뿐만이 아닌 것이다. 그녀를 사랑했던 모든 사람이 가슴을 찢는 고통을 평생 안고 살아갈 피해자다. 도시에 사는 모두가 위기감을 가진 이번 기회에 혐오 범죄의 싹을 잘라야 한다. 여성 혐오를 걷어내지 못하면 그 다음은 무엇이 될지 모른다. 장애인 혐오, 아동 혐오, 노인 혐오, 혹은 남성 혐오.


태그:#강남역 살인사건, #강남역, #여성혐오, #혐오범죄, #묻지마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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