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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봉산이라 입도 허가가 나지 않았지만 1885년에 최초로 입도 허가를 받은 두포마을 모습
 황장봉산이라 입도 허가가 나지 않았지만 1885년에 최초로 입도 허가를 받은 두포마을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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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남쪽 해상 20km쯤 떨어진 해상에는 비렁길로 유명한 아름다운 섬 금오도가 있다. 금오도는 옛부터 황장봉산으로 지정되어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다가 고종 22년(1885) 허민회(許民會) 반포로 봉산이 해제되어 민유지가 됨으로써 개척되었다.

조선시대 금오도는 궁궐을 짓거나 보수할 때, 임금의 관을 짜거나 판옥선 등의 전선을 만들 재료인 소나무를 기르고 가꾸던 황장봉산(黃腸封山)이 있었다. 황장봉산으로 지정되면 일반인에 의한 벌채와 입산이 금지된다. 남면 소재지인 금오도 우학리에서 4㎞ 정도 떨어져 있는 두포는 황장봉산과 깊은 관련이 있는 마을이다.

두포 마을을 굽어보는 옥녀봉 아래에는 '두모제'라는 큰 저수지가 있어 금오도와 안도주민의 식수원이다.  하루에 천톤을 생산하는 저수지로 사계절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두포 마을을 굽어보는 옥녀봉 아래에는 '두모제'라는 큰 저수지가 있어 금오도와 안도주민의 식수원이다. 하루에 천톤을 생산하는 저수지로 사계절 내내 물이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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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6월 15일인 유두와 7월 15일인 백중에 우학리와 소유, 대유, 여천 주민들이 모여 수제비도 해먹고 홍합도 채취했던 '물맞는 통'이다. 무더운 여름날 금오도 주민의 해수욕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수량이 많아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면 땀띠가 사라졌다고 한다.  마을 주민이 숨은 명소가 있다며 알려준 '물맞는 통'으로 가는 길은  밀림이어서 접근이 힘들었다
 음력 6월 15일인 유두와 7월 15일인 백중에 우학리와 소유, 대유, 여천 주민들이 모여 수제비도 해먹고 홍합도 채취했던 '물맞는 통'이다. 무더운 여름날 금오도 주민의 해수욕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수량이 많아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면 땀띠가 사라졌다고 한다. 마을 주민이 숨은 명소가 있다며 알려준 '물맞는 통'으로 가는 길은 밀림이어서 접근이 힘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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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 침입이 잦았던 조선시대 금오도는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왜구의 침입여부를 조사하고 토벌하던 군인까지 배치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직전 금오도의 지리적 중요성에 대해서 이순신 장군도 크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이 <난중일기>에 나타나 있다.

소나무의 중요성 때문에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었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세종 30년(1448년)에 발간된 <세종실록> 내용이다.

"병선은 국가의 도둑을 막는 기구이므로 배를 짓는 소나무를 개인적으로 베지 못하도록 이미 일찍이 법으로 정했는데, 무식한 무리들이 가만히 서로 나무를 찍어 베어 개인의 배를 짓고, 혹은 집 재목을 만들어 소나무가 거의 없어졌으니 실로 염려됩니다.

전부터 소나무가 있는 곳에는 나무하는 것을 엄금하고, 나무가 없는 곳에는 그 도의 감사로 하여금 관원을 보내 심게 하고 옆 근처에 수령과 만호로 하여금 감독 관리하고 배양하여 용도가 있을 때에 대비하게 하소서."

18세기 이전 황장목 관리를 위해 섬 출입을 금지했다가 해금을 명하기도 했던 금오도에 사람이 들어가 살 수 있도록 왕이 정식으로 허락한 해는 1885년이다. 금오도 개척 당시 조정으로부터 권농관이 파견되어 두모리 1367번지에 관사를 짓고 주변 섬사람들을 동원해 방파제를 쌓는 등 이곳이 금오도에서 가장 먼저 개척됐다.

당시 경차사관 산하 도포수였던 박정안이 1885년 정월에 가장 먼저 입주하였고 1889년 6월에 최순익이 초대 금오도 둔장으로 임명받아 본격적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두포 주민들은 금오도 개척 100주년을 맞아 1985년에 '금오도 개척 100주년 기념비'를 세우고 자축했다.

금오도가 봉산이었을 때 사슴 사냥을 위해 내려오는 관청 소속 포수들이 처음 도착한 포구라 하여 '첫개'라 불린 두포는 마을 뒷산에 있는 옥녀봉과 관련된 전설로 인해 두포라 불렀다. 

옥녀봉에 살던 선녀 옥녀가 뽕잎을 이용해 누에를 쳤는데 누에고치가 많아 말(斗)로 되었다. 주변의 모하 마을은 곡창지대였기 때문에 옥녀의 누에와 모하 마을은 곡식을 교환하기 위해 알맞은 도량형 도구인 말(斗)이 필요했으므로 두포라 불렀다.

개발과정에서 사라진 귀중한 역사 자료

두포 주민 정순남(76세)씨. 뒤에 보이는 바위아래에 판옥선과 조운선에 쓰이던 철물을 만들던 대장간  풀무 3개가 있었지만 도로를 놓으며 없애 버렸다고 한다.
 두포 주민 정순남(76세)씨. 뒤에 보이는 바위아래에 판옥선과 조운선에 쓰이던 철물을 만들던 대장간 풀무 3개가 있었지만 도로를 놓으며 없애 버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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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무골에는 판옥선과 조운선에 들어갈 철물을 주조하던 대장간이 있었다. 왼쪽은 양귀못이고 오른쪽은 외귀못이다. 소장자가 필자를 위해 보여줬다.
 불무골에는 판옥선과 조운선에 들어갈 철물을 주조하던 대장간이 있었다. 왼쪽은 양귀못이고 오른쪽은 외귀못이다. 소장자가 필자를 위해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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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포에는 불무골이 있다. 대장간에서 쇠를 달구거나 또는 녹이기 위하여 화덕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는 기구를 풀무라 부른다. 두포에는 판옥선과 조운선을 만드는 데 사용하는 못을 만드는 풀무 3기가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음운변화를 겪어 불무가 됐으리라고 추정된다. 도로가 생기기 전 풀무를 보고 자랐던 이 고장 출신 정순남(76)씨의 얘기다.

"커다란 바위 아래 풀무 3기가 있었어요. 옛 풀무의 흔적이 잘 보이지 않다가 바닷물이 들어와 주위를 씻어 가면 풀무가 보였어요. 당시 한 사람이 지나다닐 정도로 길이 좁아 도로를 낼 때 부친(정사쇠)께서 풀무를 없애지 말자고 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말을 듣지 않아 아까운 걸 없애 버렸죠."

정순남씨는 이 동네에서 태어나 1957년 경 도회지로 나갔다가 귀향했다. 옛사람들의 배수로 시설을 볼 요량으로 정씨의 집으로 가다가 몇 그루 남아있는 아름드리 소나무와 2층으로 된 돌담과 돌담에 구멍이 나있는 모습이 신기해 정순남씨에게 물었다.

금오도에서 태어난 정순남씨가 2층 돌담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며 돌담 끝으로 필자를 데리고가 자세히 설명해줬다. 바닷가 경사진 땅에 돌담을 쌓아 흙을 올려 집과 마당을 만들고 난 후 새로운 돌담을 쌓았다.
 금오도에서 태어난 정순남씨가 2층 돌담의 원리에 대해 이야기해준다며 돌담 끝으로 필자를 데리고가 자세히 설명해줬다. 바닷가 경사진 땅에 돌담을 쌓아 흙을 올려 집과 마당을 만들고 난 후 새로운 돌담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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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 없던 시절에 집안에서 바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지은 돌담창으로 집집마다 있었다.
 유리가 없던 시절에 집안에서 바깥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지은 돌담창으로 집집마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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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소나무요? 황장봉산에 사용됐던 소나무로 조운선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고 그래요. 내가 태어났을 때 이 정도 크기였는데 지금도 그대로 있어요. 2층 돌담을 만드는 이유는 해안가 땅이 경사져 1차로 돌담을 쌓고 흙을 채워 마당과 집터를 만든 후에 그 위에 집을 짓고 돌담을 쌓습니다. 경사진 해안가에 사는 사람들의 지혜죠. 돌담에 사각형 구멍이 있는 것은 집안에서 바깥 상황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지금이야 유리창이 있으니 그런 게 필요 없지만 옛날에는 유리가 없었잖아요."

얘기하고 있는 사이 동네 이장인 최영귀(64)씨가 오셔서 마을 내력에 대해 설명해줬다. 벼농사와 방풍농사가 주요 생산품인 마을에는 52호에 90여 명이 산다. 바닷가에서 수산업보다 농사를 더 많이 짓는다는 게 이상해 상황을 들어보았다.

금오도개척 100주년 기념비 옆에 선 최영귀 이장. 뒤에는 황장봉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다.
 금오도개척 100주년 기념비 옆에 선 최영귀 이장. 뒤에는 황장봉산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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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농사보다 소득이 높다는 방풍으로 중풍에 효험이 있어 방풍이라 불린다
 벼농사보다 소득이 높다는 방풍으로 중풍에 효험이 있어 방풍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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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고대구리와 이각막, 통발을 해서 소득이 괜찮았지만 지금은 단속을 심하게 하니까 살길이 없어 도시로 떠나버렸습니다. 전에는 고구마, 보리농사를 지었지만 지금은 묵혀두거나 방풍농사를 지어요. 노인들에게 쌀보리 농사는 힘들고 방풍이 소득이 높거든요."

섬의 옛 정취를 그대로 간직한 금오도는 <혈의 누><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인어공주><도희야>의 배경이 되었고 '비렁길'이 유명해져 해마다 50만 명의 관광객이 찾는 명소다. 칸 영화제에도 출품했던 <도희야>의 여주인공 배두나는 두포의 한 펜션에 한 달여 머물며 영화를 찍었다.

불무골 마을버스 정류장에는 불무골 대신 분무골이라는 이름이 적힌 버스 정류장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 이름도 정확히 모른채 정류장에 틀린  이름을 붙였다며 시정을 요구했다.
 불무골 마을버스 정류장에는 불무골 대신 분무골이라는 이름이 적힌 버스 정류장이 있다. 마을 주민들은 마을 이름도 정확히 모른채 정류장에 틀린 이름을 붙였다며 시정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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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은 "관광객이 많이 들어오지만 식당이나 민박하는 사람들이 혜택을 받지 일반 사람들에게 특별한 혜택은 없고 오히려 쓰레기만 버리고 간다"고 말하며 금오도개척 100주년 기념비 옆에 서서 황장봉산에 대해 자랑했다.

"옛날엔 숲이 엄청났습니다. 지금 많이 베어 버렸어요. 진남관 기둥을 금오도 소나무를 써서 지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아름다운 경치에 아름드리 소나무로 가득했던 금오도가 옛모습 그대로를 간직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를 상상하며 되살아날 황장봉산을 그려본다. 먼 훗날을 기약하며 노력한다면 아직도 늦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두포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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