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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 매스컴은 일제히 한국 소설가 한강이 세계 3대 문학상 중 하나인 맨부커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문학계는 물론 전 국민이 환호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맨부커상은 어떤 상이고 한강이 누구인지, 상금은 얼마나 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앞으로 이 문학상이 몰고 올 파장은 예측 불허이다.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음으로써 작가에게 생기는 부수적인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문학계는 물론 전 국민이 이런 축제 분위기에 들떠 있기 하루 전 16일 오후 페이스북에는 쓸쓸한 글이 하나 올라왔다. 베스트셀러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이 마포세무서로부터 근로 장려금을 신청하라는 통보를 받았다는 내용을 SNS에 올린 것이다.

최영미 시인이 sns에 올린 글
 최영미 시인이 sns에 올린 글
ⓒ 최영미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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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 장려금이란 연 소득이 1300만 원 미만이고 무주택자에게 주는 생활보조금인데 그것도 1년에 한 번 최대 수혜자가 210만 원 정도다. 최영미 시인의 경우 59만5000원을 받게 된다는 내용이다.

며칠 지나 다시 같은 SNS에 최영미 시인은 "그저 지인들에게 제 사정을 알리려고 글을 올렸는데, 이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 몰랐습니다. 여러분의 관심과 격려에 깊이 감사드립니다"라는 해명성 글이 올라오긴 했지만 이미 많은 신문 방송 매체가 한바탕 소동을 피우고 난 이후였다.

문인이 가난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많은 문인들의 사례를 통해 이미 다 알고 있는데 이렇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은 최영미 시인이 '베스트셀러 시인'이라는 점 때문일 것이다.

이를 지켜보며 과연 우리나라에서 글만 써서 생활할 수 있는 시인 작가가 몇 명이나 될까 생각해 본다. 베스트셀러 한 권 내고 다른 작품이 연이어 각광을 받지 못한다면 월 100만 원 수입이라고 해서 이상할 건 없다. 그 소득이 전적으로 문학으로 인한 것이라면 말이다.

나는 중앙문단의 실정은 잘 모른다. 내가 인천 문단에 소속되어 있어서 인천 문인들의 실상을 조금 살펴볼까 한다.

85세의 일기로 작고한 랑승만 시인의 납골당.
 85세의 일기로 작고한 랑승만 시인의 납골당.
ⓒ 최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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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말경 인천의 원로 랑승만 시인이 85세의 일기로 작고했다(관련기사 : 천상병 그리워하던 노시인, 바람되어 사라지다). 그분은 50세가 되던 해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35년 동안 가난과 병고로 고생을 하다가 돌아가셨다. 아내마저 떠난 병상을 결혼도 하지 않은 맏아들이 지키고 돌봤다.

빈소는 한산했다. 87세의 누나와 91세의 매형이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인천의 문인들이 간간이 다녀갈 뿐 타 지역에서는 아무도 문상 오는 사람이 없었다. 시인은 김관식, 천상병, 고은 등과도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 동국대 국문과를 졸업한 시인은 동국대학교 출신 문인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곤 했다. 그러나 1980년 한국잡지기자협회 이사회에 참석했다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오랜 병상생활로 그는 거의 문단에서 잊히고 말았다.

이날 장례식에서 더욱 안타까운 것은 문상객들에게 식사 대접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상되는 문상객이 많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식사 대접을 못하고 커피 한 잔씩 타 드리는 것으로 예를 갖추기로 했다는 것이다. 35년의 병상생활이 시인을 얼마나 피폐하게 했는지 알 수 있다.

시인은 나의 첫 시집에 발문을 써주었다. 나는 발인 전 날 밤늦게까지 빈소를 지켰다. 이튿날 새벽 발인식에 참석하고 장지까지 따라갔다. 운구는 병원의 직원이 도왔다. 이렇게 쓸쓸한 장례식은 내게는 처음이었다. 한 시인은 실토하기도 했다. "문상을 갔는데 빈소가 하도 쓸쓸하고 초라해서 누가 시인의 장례식인 걸 알까 봐 부끄러운 생각이 들었다"고. 19권의 시집을 내고 생을 마감한 시인의 마지막 길이 너무 초라하고 쓸쓸했다.

물론 부유한 문인도 많이 있다. 그러나 그 부는 문학과는 별개의 부다. 부모의 부를 물려받았거나 다른 사업으로 축적한 부다. 문학은 어쩌면 가난과 병고와 고독과 함께 존재하는 것 같기도 하다. 문인들의 가난이 결코 낯설지 않은 이유다.

그분에게 시는 목숨과도 같았다. 신앙과도 같았다. 헤아릴 수 없는 가난과 고독, 고통 속에서 19권의 시집을 펴낸 것은 시인의 문학 혼이며 정신력으로 가능했을 터. 그분은 평소에 한 지론을 견지해 왔다.

"나는 나의 시에서 맑고 강인한 생명력을 얻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학적 신조를 탄생시켰다. 즉, 시 한 편을 쓰면 10년은 더 살고, 시 한 편 발표하면 20년은 더 살고, 시집 한 권 세상에 내놓으면 30년은 더 산다는 문학 정신적 정신생명 부활의지이다."

인천엔 또 1980년대 반성 연작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며 등장한 유명 시인이 있다. 굵직굵직한 문학상도 몇 번 탄 시인이다. 그러나 그 시인 역시 원고료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대학의 시간강사와 문화센터 두세 군데에 출강하며 겨우 생활을 꾸려가는 형편이다.

일년에 시 20편을 발표하면 굉장히 많이 발표하는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20편의 원고료라고 해야 100만 원에 불과하다. 시집 인세라는 것도 몇몇 운이 좋은 시인들의 얘기지 웬만한 문인들에겐 화중지병일 뿐이다.

지금은 유명세를 타는 K 시인이 있다. 이분이 문단에 등단하기 전에 만나 얘기를 나눈 일이 있다. 한 달이면 보름 정도 노동판에 가서 일하고 보름은 틀어박혀 오로지 시에 매달린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문학에 대한 열정을 반신반의 했다. 그러나 20년 쯤 후 그는 유명 시인이 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서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의 시도 그렇지만 그의 집념과 문학에 대한 신념과 열정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문학으로 부를 일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어떤 재물보다 값진 문학을 안고 살면서 삶의 보람을 찾고 일생 동안 추구해야 할 목표를 갖게 되지 않았는가.

얼마 전 인천의 문인들과 술 한 잔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 자리에서 한 아동문학가가 술의 힘을 빌려 묻는 것이었다.

"제가 문학만을 계속 해야 할지, 취직해서 돈을 벌어야할지 지금 기로에 서 있습니다. 선배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마땅한 데 있으면 취직해. 직장 다니면서도 쓸 수 있잖아."
"......"
"지금 인세 받는 게 월 얼마 정도 되지?"
"250만 원 정도..."


이 후배작가는 동화를 써서 재미를 톡톡히 보고 있는 친구다. 베스트셀러도 있고 동화 두 권이 중국으로 수출되는 등 촉망받는 작가였다. 인세 250만 원이면 일류급 작가가 아니면 생각할 수 없는 고액이다. 그러나 계속 작품이 팔린다는 보장도 없다. 그래서 아마 나에게 글만 써야 할지 취직을 해야 할지를 물은 것 아니었을까.


태그:#최영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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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의 시, 수필, 칼럼, 교육계 이슈 등에 대해 글을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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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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