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다큐프라임 <공부의 배신> 1부 '명문대는 누가 가는가'에서는 고등학생 예원의 입시 이야기를 담았다.

EBS 다큐프라임 <공부의 배신> 1부 '명문대는 누가 가는가'에서는 고등학생 예원의 입시 이야기를 담았다. ⓒ EBS 다큐프라임


"얘 봐, 얼마나 어른스럽고 의젓하냐. 예원이가 우리 학교로 왔으면 얘는 분명히 의대 갔을 거다. 너네 같은 애들이 다 깔아주는데, 어떻게 못 가."

일시 정지를 누르고 난 후 과학(선생님이 맞겠지만, 열일곱은 그 단어에 서툴다)이 꺼낸 이야기에 헛웃음이 나왔다. 뒤처질 수 있다는 불안감에, 할당된 하루의 공부를 끝마치기 전에는 잠들 수도 없다는 저 애는, 그래, 분명 나와는 다르게 어른스러웠다. 그 애가 너무나도 어른스러워서, 저 모습이 '과학'과 학교가 우리에게 바라는 성장이라면 차라리 어른이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지난 16일 EBS 다큐프라임 <공부의 배신> 3부작 중 1부 '명문대는 누가 가는가'가 방영됐다. 이 다큐멘터리는 그렇게나 중요하다는 입시 '3역' 재력, 정보력, 지역에 있어 불리한 위치에 있는 고등학생 세 명의 입시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아냈다.

'특색 수업'이라고 쓰고 "시간 때우기"라고 읽는 시간에 과학이 틀어준 이 다큐의 첫 번째 주인공 예원이는 익산에 살면서 자율형 사립고등학교 상산고를 준비하는 열일곱 살이다. 글씨를 너무 많이 써서 손가락이 짓눌려 고무 밴드로 손가락을 고정하고도 힘이 들어가지 않아 손목을 이용해 공부를 해나가는 예원이의 목표는 의대 진학. 결국 의대 진학률을 고려해서 지망했던 상산고등학교에 입학하는 데 성공하지만, 첫 중간고사 수학 성적은 395등 중 313등. 이야기는 그렇게 끝난다.

"지금 이거 보고도 쳐 자는 놈들은, 평생 저런 괴물들 바닥 깔아주면서 사는 거야. 저런 걸 보면 자극을 좀 받으라고. 익산, 저 촌에서 사는 애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상산고 가서는 313등 하잖아. 쟤가 우리 학교 왔으면 의대 갔지. 너네 같은 애들이 바닥 깔아주니까."

눈물이 날 것 같던 마음은 곧 분노로 변했다. 저 애는 지금 얼마나 좌절하고 있을까, 결국 좁히지 못했던 차이에 얼마나 화가 날까. 그런 건 과학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단지 과학이 우리에게 바란 것은 화면에 나오는 저 한 명의 '경쟁자'를 보고 자극을 느끼라는 것이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져버릴 것 같은 웃음을 짓는 예원이를 '괴물'이라 칭하면서.

경제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홀로 생활기록부 19장을 빽빽하게 채우고, 인강(인터넷강의)으로 혼자 공부를 해나갔지만 수능 최저 등급을 맞추지 못해, 고려대학교 진학에 실패한 두 번째 주인공인 한 언니. 과학은 "쟤는 공부 제대로 안 했어, 너네도 명문대 가려면 수능을 무시하면 안된다고"라며 우리를 타박했다.

"야, 우리 진짜 열심히 공부하자."

 "우리 열심히 공부하자"고 말하는 아이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선생님들. EBS는 실수했다.

"우리 열심히 공부하자"고 말하는 아이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선생님들. EBS는 실수했다. ⓒ EBS 다큐프라임


종이 치고, 침울했던 교실에서 누군가 제일 먼저 꺼낸 말은 이 한마디였다. "야, 우리 진짜 열심히 공부하자." 집에 돌아와서 접속한 수험생 커뮤니티에서도 이 다큐멘터리에 대해 다들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우리, 진짜 열심히 공부하자." 어떤 친구의 학원에서는 이 다큐멘터리를 적극 추천했단다.

공부가 결국 우리를 배신하고 말 것이라는 섬뜩한 메시지를 담은 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그걸 알면서도, 아니, 그걸 알기에 더 열심히 공부하자고 말하는 또래들은 스스로 자신의 결핍으로 인해 받는 차별을 자신이 메워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도 예원이나 진영이 언니를 보고 이것이 '공부의 배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수의 그들에게, 다수의 교사들에게 그것은 EBS <공부의 왕도>보다 더 힘이 나는 '자극 영상'이 되었다.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도록 학교와 사회에서 교육받아왔기 때문이다.

책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어떤 사람들은 투 스트라이크를 맞은 상태로 인생을 시작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면서 산다." <공부의 배신> 1부 '누가 명문대에 가는가'는 투 스트라이크를 맞은 채 시작한 수험 생활 과정을 보여준다. 매일이 뒤처짐에 대한 불안감뿐인 공부, 그렇기에 한시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공부.

학교는 그나마 최소한의 평등이 보장되는 작은 사회다. 삼진 아웃 직전의 인생과 3루 인생 모두가 공존한다. 진짜 사회보다는 훨씬 더 여린 구성원들로 이루어졌다는 게 차이일 뿐. 그런 우리의 사회에서 차이는 당연하다고 말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그것을 따라잡는 건 모두 "너희의 몫"이라 말하는 교실이 있다. 전달 방식의 차이일 뿐, 이 교실은 지방이든 수도권이든 어디에나 존재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까지 본 적도 없고, 어쩌면 앞으로 볼 일 없을 누군가를 항상 견제하며 공부한다.

결국 공부만이 우리를 배신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학교의 배신이자 어른들의 배신인 거다. 아니 어쩌면 아무도 우리를 배신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착하기나 했어야 배신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가.

EBS 시리즈는 언제나 우리에게 답을 주지는 않지만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그래서 누가 명문대에 가는가? 만약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3역을 고루 갖춘 3루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면, 그것만으로 준비는 끝났다, 잘했다. "수능을 무시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해나가면 된다. 이미 투아웃을 맞아버렸다고? 걱정하지 마라. 핑계 대지 말고 '저런 괴물이 내 경쟁자구나' 생각하며 더 힘을 내라. 그것이 지금의 교육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니까. 그렇게만 한다면, 우리 모두는 3년만 고생해서 명문대에 입학하는 거다. 그때까지 조금만 더 버텨보자. '공부는 배신하지 않는다'며 끝없이 자신을 속이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아직 서투르고 하고 싶은 말을 담백하게 하지 못한 채 가시만 돋아있는 글일까봐 무섭네요. 혹시 제 글을 읽어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피드백 꼭 부탁드립니다!
EBS 다큐멘터리 공부의 배신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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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부터 오마이뉴스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팟캐스트 '말하는 몸'을 만들고, 동명의 책을 함께 썼어요. 제보는 이메일 (alreadyblues@gmail.com)로 주시면 끝까지 읽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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