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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18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에는 지난 17일 새벽 노래방 화장실에서 발생한 '강남역 살인'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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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전 살아남았습니다. 제가 돈이 많아서 혹은 나이가 많아서 혹은 노래방을 가지 않는 사람이라서 살아남은 걸까요? 그 순간 그 자리에 있지 않은 '우연'이 절 살렸습니다. 왜냐면 저는 여자니까요. '여자라서 죽였다'는 말에 전 아직 죽지 않아 안도감을 느낀 것이 아닌, 오히려 언제 또 범죄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크게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왜냐면 저는 앞으로도 계속 여자일 테니까요.

"일찍 다녀" "조심해"라니요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요. 비싼 브랜드 커피를 마시며 동등함을 추구해야 할 남자들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사람인걸까요, 아니면 그저, 김치녀라 불리는 그런 여자와 개념녀라 불리는 그렇지 않은 여자로 나뉘는 카테고리 속에서 어떤 카테고리를 선택해서 살지만 정하면 되는 여자인 걸까요.

강남역 10번 출구 근처 건물 화장실에서 20대 초반 여성이 한 남자의 무차별 칼부림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여성분은 어떤 카테고리를 지닌 여자였기에 죽임을 당한 걸까요. 우리는 계속해서 확인하고 있습니다. 기사로, sns로, 뉴스로 이 여성분은 단지 '여성'이었기 때문에 한 순간에 소중한 생명을 잃었다는 것을요.

단순한 살인사건, 묻지마 살인으로 보기엔 가해자의 범행동기가 너무나 명확하지 않나요. '여자'에게 무시 받는 것이 화가 나, 본인을 무시했던 '여자'들에게 분풀이를 위해 일면식도 없는 '여자'를 죽였다는 것을요. 이것은 명확한 여성혐오가 불러일으킨, 지독하게 끔찍한 살인사건입니다. 그런데 '모든 남자가 그런 것은 아니니 잠재적 범죄자로 몰지 마시길'이라니요, '화장실녀', '노래방녀'라니요, '가해자는 목사를 꿈꾸던 여자에게 무시 받은 남자'라니요.

여자 대 남자로 싸우자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이 없어진 이 마당에 성별로 나뉘어 '너희가 잘못이야', '너희 정말 끔찍하다'라는 말들로 편을 갈라 승강이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적어도 누군가가 '여자'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다는 것에는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요. 전혀 범죄가 일어날 법한 상황이 아닌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누군가가 변을 당했습니다. '일찍, 일찍 다녀'라뇨, '조심해'라뇨.

팩트에 더 집중을 해보자고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그 팩트에는 범행 동기라는 게 절대 무시될 수 없는 사항이라는 말도요. 원인 없는 결과는 없을 테니까요. 모든 남성분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모는 것이 아니에요. 세상엔 저런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분들이 더 많을 테고 저런 생각조차 갖지 않고 건강한 생각을 가진 분들이 훨씬 더 많을 테니까요. 하지만 본인의 반응이 '난 아냐', '내 일이 아냐' 혹은 '난 저 자리에 없었으니까', '앞으로 더 조심해서 다녀야지'와 같은 형식이라면 우린 좀 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르게 바라봐야 할 시간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 그건 '러시안 룰렛'

지난 17일 새벽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의 노래방 화장실에서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용의자 김모(34)씨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19일 오후 서울 서초경찰서를 나와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향하기 직전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지난 17일 새벽 서울 서초구 강남역 인근의 노래방 화장실에서 여성을 흉기로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용의자 김모(34)씨가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위해 19일 오후 서울 서초경찰서를 나와 서울중앙지방법원으로 향하기 직전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 최윤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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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까지만 해도 굉장히 부끄러운 생각이지만 전 여자로 사는 것에 굉장히 만족하며 살았어요. 만족하며 살지 못하는 여자들을 보고 '자기 생각만 곧게 유지하고 남자한테 기 안 죽으면 되지, 여자들도 너무 스스로 기죽고 다 맞추려고 하는 거 잘못된 거야'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가만히 눈 감고, 귀 닫고 살아온 세월을 더 이상 태연하게 버티기 힘들어지는 순간들이 찾아오고부터 생각이 바뀌었어요. 저는 단지 운이 좋아서, 저는 단지 환경이 좋고, 제 주변 사람들엔 꽤 좋은 사람들이 많아서 충분히 만족하고 살아올 수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한국에서 여자로 산다는 것은 '러시아 룰렛'이라는 말도 돕니다. 전 그냥 그 룰렛에 아직 걸리지 않은 여자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한참 걸렸네요. 제가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당장 내일 뭘 먹고, 누구와 사랑을 하고, 어떤 직업을 가질지에 대해 나름의 큰 고민을 하고 있는 동안 그 순간에도 어딘가에선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사는 여자분들도 존재한다는 것을요. 제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단지 미지수 X에 들어갈 임의의 숫자처럼 다른 어떤 누가 돼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란 것을요.

남자든 여자든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살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있어요. 누구나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불운도 굉장히 높은 확률로 있는 것도 맞고요. 그런데 그 두려움과 공포에 맞서 싸워야 할 비중이 훨씬 더 높은 여자들의 목소리를 좀 들어달라는 말을 하고 있는 거예요. 남자혐오를 조장하는 것도 아니고 여성우월로 이끌고 가고 싶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누구도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 누구도 차별 받지 않는 곳에서 두려움이나 공포감대신 즐거움과 행복함을 더 많이 느끼고 살고 싶다는 것뿐입니다.

저 또한 앞으로도 제가 하고 싶은 일은 거리낌 없이 하려고 합니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제 즐거움을 누리고 생각하며 살려고요. 노래방이든 클럽이든 술집이든 대낮이든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물놀이든 여행이든 공중화장실 이용이든 모두 다요. 물론 두려움을 안고 하겠죠. 언제 닥칠지 모를 범죄를 의식해서 항상 저 또한 조심하고 또 조심하려하는 무의미한 불편함을 그래도 감수하겠죠.

이런 불편함을, 이런 두려움을 제발 외면하지 말아주세요. '난 아냐'와 같은 무관심한 말로, '남자 대 여자 싸움 조장하지마'라는 어긋난 말로 세상을 더 이상 아프게 하지 말아주세요. 같이 배려하고 같이 생각하고 서로 관심을 조금이라도 가지면서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싸움을 만드는 것에만 집중하지 말고 대체 어쩌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됐는지, 어떻게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에 그 '원인'에 촉각을 더 곤두세우는 세상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 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태그:#여자,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 #칼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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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기사와 문학 그리고 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저의 부족한 생각과 관찰을 통해 좋은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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