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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사태와 관련 아타 샤프달 옥시레킷벤키저 대표이사가 지난 2일 오후 영등포구 콘래드호텔에서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을 하는 가운데, 산소호흡기 없이 생활이 불가능한 피해자(만성폐질환) 임성준(13)군과 가족 및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장을 찾아 항의하고 있다.
 가습기살균제 사태와 관련 아타 샤프달 옥시레킷벤키저 대표이사가 지난 2일 오후 영등포구 콘래드호텔에서 대국민사과 기자회견을 하는 가운데, 산소호흡기 없이 생활이 불가능한 피해자(만성폐질환) 임성준(13)군과 가족 및 피해자들이 기자회견장을 찾아 항의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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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제조 기업의 임원과 담당 연구원들에게 사망사건에 대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최근 며칠 사이 언론을 통해 쏟아져 나오는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고 관련 기사들을 보면서 드는 의문이다.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옥시 레킷벤키저(아래 옥시)는 이미 거대 로펌인 '김앤장'을 법정 대리인으로 선임하고 본격 대비태세에 들어간 모양새다. 이와 관련, <시사iN>은 7일 옥시가 김앤장의 조언을 받아 "피해자들의 폐 손상은 특정 화학 물질에 의한 것이 아니라 황사·꽃가루·담배 등 다양한 원인에 의해 발생할 수 있는 '비특이성 질환'이다"는 의견서를 작성해 검찰에 제출했다고 전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을 들여다보면 1960년대 독일(당시 서독)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탈리도마이드 파문과 여러모로 닮은 꼴이다. 1950년대 후반 독일 서부 소도시 스톨베르크에 본사를 둔 그뤼넨탈 콘체른(아래 그뤼넨탈)은 탈리도마이드라는 화학성분에 기초해 '콘테르간'이라는 수면제 개발에 성공한다. 이 약은 시판되자마자 기적의 약으로 불리며 서독 수면제·진정제 시장의 50%를 점유했다. 콘테르간은 특히 임산부들이 선호했는데, 이 약이 입덧 완화에 효과가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자 그뤼넨탈은 1958년부터 콘테르간이 임산부나 유아에 해롭지 않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키기 시작했다. 1959년 한해 광고에 집행된 예산만 당시 돈으로 35만 마르크에 달했다. 이 같은 마케팅에 힘입어 콘테르간의 이름은 서독은 물론, 다른 유럽 국가와 일본에까지 퍼져 나갔다. 콘테르간 판매고는 1961년 월평균 2천만 정을 기록하며 정점을 찍었다. 바로 그때 파문이 불거졌다.

독일 항구도시 함부르크의 소아과 개업의인 비두긴트 렌츠는 1957년부터 자신의 병원을 찾는 아동 환자 가운데 유독 기형아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난 데 주목했다. 귓바퀴가 없는 사례, 어깨에 지느러미 같은 것이 자란 사례, 식도와 장이 기형적으로 자란 사례 등등 기형의 형태도 다양했다. 렌츠는 스스로 원인 규명에 착수했고 1961년 11월, 자신의 연구결과를 담은 편지를 그뤼넨탈 연구소에 보냈다. 그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그동안 관찰했던 몇 가지 사실들을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정확한 시점을 말할 수는 없지만 대략 1957년부터 독일에는 특별한 유형의 기형아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많이 출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략) 작년 독일에서는 2천 명의 신생아 중 한두 명이 그러한 기형아였습니다. 이 기형아 출산과 관련이 있을 만한 여러 요인들을 집중적으로 조사한 결과 함부르크에서 공통적인 한 가지 요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즉 임산부들에게 병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병력이 분명하고, 병을 치료한 처방전을 제시할 수 있는 14명의 임산부 모두가 임신 첫 달에 콘테르간을 복용했습니다. 콘테르간과 기형아 사이에 아무런 인과관계가 없다는 점이 입증될 때까지 콘테르간 판매가 중단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호주의 탈리토마이드 피해자 리넷 로(Lynette Rowe)씨의 눈물을 어머니가 닦아주고 있다. 리넷로씨는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에서 콘테르간을 복용했고, 그는 팔과 다리 없이 태어났다.
 호주의 탈리토마이드 피해자 리넷 로(Lynette Rowe)씨의 눈물을 어머니가 닦아주고 있다. 리넷로씨는 어머니가 임신한 상태에서 콘테르간을 복용했고, 그는 팔과 다리 없이 태어났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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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뤼넨탈은 렌츠의 요구를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나 렌츠의 소견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독일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주는 콘테르간 판매를 중단시켰다. 사법 조치도 이어졌다.

독일 연방검찰은 1961년 12월 그뤼넨탈 경영진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약 6년 반에 걸친 수사 끝에 그뤼넨탈 주주 9명과 연구원, 고위 임원들을 기소했다. 그러나 기소된 그뤼넨탈 고위직 가운데 처벌받은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법에는 법'으로 맞선 그뤼넨탈 

그뤼넨탈은 먼저 18명의 변호사를 고용해 검찰과 맞섰다. 이들은 분야별로 업무를 분담하고, 검찰이 제시한 증거들을 무력화시켰다. 무엇보다 이들은 검찰 측 증인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심지어 가장 먼저 콘테르간과 기형아 출산 사이의 인과관계를 제기한 렌츠를 증인에서 배제시키기까지 했다. 변호인단은 렌츠가 '편견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증거 부적격 청원을 제기했고, 재판부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다.

관련 법의 허점은 혐의 입증을 더욱 어렵게 했다. 당시 의약품 관련 법에 따르면 신약 개발 시, 약을 복용하는 임산부의 태아에게 미칠 영향까지 조사하는 시험은 의무사항이 아니었다. 그뤼넨탈은 콘테르간 개발 과정에서 태아 실험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약품 관련 법 규정으로 인해 검찰은 죄를 물을 수 없었다. 결국 검찰과 그뤼넨탈의 법정 공방은 수사착수 시점으로부터 9년만인 1970년 기소 중지로 매조지 됐다. 법정공방의 유일한 수확이라면 탈리도마이드 성분이 팔과 다리에 이상 현상을 일으키고 신경조직을 손상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뿐이었다.

콘테르간 파문은 의약품 관련법의 허점과 함께 '기준'의 중요성도 일깨웠다. 콘테르간은 세계 40여 개국에서 인기리에 팔려나갔으나 유독 미국에서는 시판되지 않았다. 미 식품의약국(FDA)은 '동물에게 탈리도마이드 성분실험을 실시한 결과 심각한 기형동물이 나왔다'며 콘테르간 시판을 허가하지 않은 것이다. 독일이 콘테르간 파문으로 들끓자 케네디 대통령이 FDA의 능력을 인정하고 치하한 건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법정 공방 이후 그뤼넨탈은 콘테르간 때문에 기형으로 태어나야 했던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회피해왔다. 그러다 파문이 불거진 지 50년만인 지난 2012년 9월 피해자와 가족들에게 "지난 50년간 인간 대 인간으로 여러분께 다가서지 못한 점에 용서를 구한다"고 사과했다.

옥시 파문으로 돌아와 보자. 구멍투성이의 관련 법령, 느슨한 성분 기준, 대형 로펌의 등장 등등 옥시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은 콘테르간 파동과 비슷한 궤적을 밟고 있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환경운동연합, 민변환경보건위원회는 지난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사건에 대해 옥시 레킷벤키저의 이사진 8명 전원을 살인죄, 살인교사죄, 증거은닉죄 등으로 처벌해 달라고 고발장을 제출했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 가족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환경운동연합, 민변환경보건위원회는 지난 2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가습기살균제 참사 사건에 대해 옥시 레킷벤키저의 이사진 8명 전원을 살인죄, 살인교사죄, 증거은닉죄 등으로 처벌해 달라고 고발장을 제출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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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어린이날인 5일 옥시 본사가 있는 영국으로 날아가 시위를 벌였다. 이에 대해 라케쉬 카푸어 옥시 본사 CEO는 "우리는 이번 사태를 인정해야 하며, 재발방지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나 개인적으로도 재발방지를 위해 헌신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전망은 밝지 않아 보인다. 검찰이 올해 초부터 수사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그러나 김앤장을 등에 업은 옥시가 어떤 식으로든 허점을 찾아내 법망을 빠져나갈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만에 하나, 옥시가 그 어떤 법적 조치를 피해간다면 소비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악덕기업들이 계속 활개칠 것이 분명하다. 옥시 사태를 예의주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덧붙이는 글 | 참고서적: <누가 역사의 진실을 말했는가 - 소크라테스에서 나치까지 2천년 역사를 뒤흔든 법정세계사>(푸른하늘, 1998)



태그:#탈리도마이드, #그뤼넨탈, #옥시 , #가습기 살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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