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 레스터 시티가 2015-2016시즌 프리미어리그 정상에 오르며 신데렐라 스토리를 완성했다.  어쩌면 레스터의 우승은 신데렐라 이야기보다 더한 기적이다. 쟁쟁한 강호들이 득시글거리고 철저한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현대 프로스포츠 세계에서, 레스터같은 언더독이 우승을 차지할 확률은 운좋게 왕자님을 만나 사랑에 빠질 확률보다 더 높다고 하기 어렵다.

레스터의 우승이 EPL과 현대축구에 남긴 의미는 무엇일까. 1992년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한 이래 올해 전까지 1부리그 우승을 차지했던 팀은 고작 5팀뿐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아래 맨유), 아스널, 맨체스터 시티(아래 맨시티), 첼시, 블랙번이다. 이중 94/95시즌 블랙번을 제외하면 나머지 팀들은 지금도 EPL을 대표하는 전통의 강호들로 남아있다.

132년 역사의 레스터는 올 시즌을 제외하면 EPL 출범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도 단 한 번도 1부리그 정상에 올라 본 적이 없는 철저한 변방의 구단이었다. 심지어 지난 14/15시즌에는 14위로 치열한 강등전쟁을 겪어야 했고 그 전 시즌에는 2부리그(챔피언십)에 있었다.

현대 프로스포츠는 사실상 '돈으로 클래스를 살 수 있다'는 게 진리로 여겨진다. 최근 유럽축구는 강팀과 약팀간의 빈부 격차가 점점 벌어지고 있다. 독일은 바이에른 뮌헨, 프랑스는 파리 생제르망의 장기집권이 이어지고 있고, 스페인도 레알, 바르셀로나, 아틀레티코가 몇 년째 1~3위를 나눠 가지는 3강 구도가 지속되고 있다. 엄청난 자본력으로 무장한 명문구단들은 리그 내 경쟁팀의 선수들을 쓸어담아 독주 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일류 선수들도 높은 몸값과 우승 가능성을 보장하는 명문구단으로 쏠린다.

레스터 시티의 '축구 미생들' 기적을 쓰다

 지난 5월 1일 맨유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한 레스터 시티. 리그 2위인 토트넘이 첼시와 비기면서, 레스터 시티는 1884년 구단 창단 이래 132년 만에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지난 5월 1일 맨유와의 경기에서 1-1 무승부를 기록한 레스터 시티. 리그 2위인 토트넘이 첼시와 비기면서, 레스터 시티는 1884년 구단 창단 이래 132년 만에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다. ⓒ 연합뉴스


EPL은 그나마 타 리그에 비하면 절대강자가 없는 편에 속하지만, 그래도 상위 4~5개 빅클럽과 나머지 구단간 전력 차와 재정적 격차는 상당하다. 레스터 선수들의 총 몸값은 약 6300만 파운드(약 1053억 원)로 올 시즌 1부리그 20개 구단 중 15위에 불과하다. 이는 선수단 인건비만 약 4억 파운드 이상으로 추정되는 맨시티-맨유-첼시 등과 비교하면 5분의 1도 안되는 수준이다.

레스터는 팀내 최고 몸값을 자랑하는 주포 제이미 바디의 주급이 8만 파운드(약 1억3000만 원)이고, 이적료의 경우 일본 선수 오카자키 신지가 기록한 825만 파운드가 곧 팀 역대 최고 이적료 지출이었다. 레스터의 우승은 돈으로 트로피를 살 수 있다고 믿었던 현대축구의 물질만능주의에 일격을 가하는 획기적인 사건인 셈이다.

더구나 레스터의 선수단 대부분은 올 시즌 전만해도 스타플레이어는 고사하고 타 구단에서 방출되거나 2류 취급받던 '축구 미생'들이었다. 올 시즌에만 리그 11경기 연속 골 기록 및 22골을 터뜨리며 잉글랜드 국가대표까지 승선한 바디는, 몇 년전까지 공장 노동자로 근무하던 7부리그 출신 선수였다.

리야드 마레즈(17골 11도움)는 알제리계 프랑스 빈민가 출신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수비형 미드필더 은골로 캉테는 170cm도 안되는 작은 체격으로 한때 입단 테스트를 전전하던 무명의 선수였다. 이 같은 인생 역전 스토리는 일종의 축구판 외인구단이라고 할 만한 레스터의 기적이 음지의 축구선수들에게 희망을 주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팀의 수장인 라니에리 감독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탈리아 출신의 라니에리 감독은 첼시, 유벤투스, 인테르, AS로마 등 수많은 명문클럽을 지도한 베테랑 감독이지만 묘하게도 우승과는 크게 인연이 없었다. 이 때문에 라니에리 감독은 사실 경력에 비하여 저평가를 받아온 대표적인 지도자로 꼽힌다.

'팀을 일정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는 있지만, 정상에 도달할 만한 독한 승부사 기질이 부족하다'는 게 그간 라니에리 감독의 이미지였다. 라니에리 감독은 유럽축구계에서 경력에 비하면 몸값도 낮은 편인데 소위 스타급 감독들의 1/3분도 안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교롭게도 그 때문에 빅클럽 구단들이 위약금 걱정없이 조금만 부진해도 자를 수 있는 감독으로 거론될 정도다. 이를 빗대어 한때 앙숙이었던 주제 무리뉴 감독으로부터 '루저'라는 조롱을 당한 적도 있다.

실리 축구로 명장의 반열에 오른 라니에리

올 시즌 라니에리 감독은 부임 첫 해 만에 레스터를 정상으로 이끌며 환갑을 넘긴 나이에 '명장'으로서 재조명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무리뉴는 전 시즌 우승팀이었던 첼시의 추락과 함께 시즌 중반도 넘기기 전에 경질되며 대조를 이뤘다.

라니에리 감독의 리더십은 올 시즌 내내 레스터의 비상과 함께 화제를 모았다. 레스터의 스타일은 엄청난 체력과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 압박축구다. 수비를 두텁게 하고 경기장을 좁게 활용하여 수적 우위를 확보하면서 찬스가 나면 빠른 스타일로 최단 시간과 루트로 공격을 마무리짓는 패턴이다. 포메이션 역시 4-2-3-1보다는 한물 간 것처럼 여겨지던 4-4-2 시스템을 거의 시즌 내내 유지했다.

특이하게도 레스터는 올 시즌 볼 점유율(46%, 18위)과 패스 성공률(70.2%, 20위)이 모두 올 시즌 EPL 최하위권이다. 바르셀로나 '티키타카'의 성공 이후 높은 점유율과 짧은 패스를 바탕으로 경기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 현대축구의 대세처럼 여겨지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이다.

라니에리 감독은 철저한 '실리 축구'의 신봉자다. 라니에리 감독은 펩 과르디올라나 무리뉴처럼 자기만의 색깔을 선수에게 요구하지도, 벵거처럼 내용과 과정에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때그때 선수와 팀 전력에 맞춰 그에 최적화된 전술을 짜내는 것이 라니에리 감독의 특기였다.

유럽축구에 대한 정보가 많아지면서 국내에서도 많은 지도자와 팬들이 제로톱이건 티키타카건, 어떤 스타일이 유행한다고 하면 확고한 철학없이 그저 흉내에 가까운 무분별한 모방을 하는 경우가 많다.  선수에 따라 시대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할 수도 있는 게 축구라는 세계다. 라니에리의 유연한 발상은 축구에서 모범답안이 하나로 정해져 있다는 신념이 얼마나 잘못된 오만인지를 깨우쳐 준다.

또한 라니에리 감독은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와 컵대회 등 각종 대회를 누비면서 단 23명의 선수단만을 가동했다. 유럽클럽 대항전을 치른 다른 빅클럽들에 비하여 경기수가 적었다는 것을 감안해도, 언제든지 부상같은 돌발변수가 발생할 수 있는 장기레이스에서 보기드문 소수정예 체제였다. 올 시즌 EPL 대부분의 팀들은 유럽클럽 대항전을 치르지 않아도 대부분 30명 이상의 선수들을 가동했다.

반면 레스터는 마크 알브라이턴, 웨스 모건, 케스퍼 슈마이켈 등이 이번 시즌 전 경기에 출전한 것을 비롯하여 캉테와 마레즈는 35경기, 바디가 34경기를 소화했다. 주전 대부분이 큰 부상없이 풀시즌을 소화한 셈이다. 이는 체력적인 변수를 극복하고 레스터가 장기 레이스에서 안정적인 조직력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밑거름이 됐다. 이는 한편으로 레스터가 선수 스카우트와 관리, 팀 운영에 이르까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구단을 이끌어 왔는지를 증명한다.

계속되어야 할 레스터 시티의 도전

레스터 시티, 올 시즌 리그 우승 확정  2일(현지시간) 영국 레스터에서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첼시 FC와 토트넘 홋스퍼 FC의 경기가 무승부로 종료되면서 리그 우승이 확정된 레스터 시티 FC의 팬들이 환호하고 있다. 

승점 77점으로 리그 선두를 달리던 레스터 시티는 이날 리그 2위인 토트넘이 첼시와 2-2로 비기면서 승점 70점이 돼 남은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올 시즌 우승을 확정지었다.

▲ 레스터 시티, 올 시즌 리그 우승 확정 2일(현지시간) 영국 레스터에서 잉글랜드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 첼시 FC와 토트넘 홋스퍼 FC의 경기가 무승부로 종료되면서 리그 우승이 확정된 레스터 시티 FC의 팬들이 환호하고 있다. 승점 77점으로 리그 선두를 달리던 레스터 시티는 이날 리그 2위인 토트넘이 첼시와 2-2로 비기면서 승점 70점이 돼 남은 경기 결과에 관계없이 올 시즌 우승을 확정지었다. ⓒ 연합뉴스/EPA


물론 운이 따라준 점도 부정할수 없다. 레스터는 올 시즌 승점 77점으로 벌써 우승을 확정했는데 이는 2010년대 들어 가장 최소 승점 우승 기록이다. 최근에는 2010-2011시즌 맨유(80점)가 가장 적은 승점으로 우승을 확정한 케이스였다. 레스터는 아직 2경기가 더 남이있지만 역대 챔피언들에 비하면 확실히 운이 좋았다.

올 시즌 프리미어리그는 첼시, 맨유, 맨시티, 리버풀 등 전통의 강호들이 동반 몰락하는 현상이 어느 때보다 두드러졌다.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로 꼽혔던 아스널조차도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뒷심 부족으로 후반기에 주저 앉았다. 끝까지 레스터와의 우승 경쟁을 펼친 팀이 역시 EPL 우승경력이 없을 뿐아니라 평균연령 25세에 불과한 젊은 팀 토트넘이었을 만큼, 레스터의 우승 경쟁에 큰 부담이 될만한 강호가 없었다.

그렇다고 레스터의 돌풍이 평가절하당하는 것은 아니다. 레스터 시티는 EPL을 넘어 현대축구 역사상 가장 극적인 신화로 남을 만한 우승을 역사에 기록했다. 이 우승은 앞으로도 꽤 오랜 시간 축구팬들의 기억 속에 회자될 것이다. 레스터의 위대한 도전은 올해의 기적이 단지 우연이나 행운이 아니었음을 다음 시즌 증명하는 것으로 계속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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