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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말
"세월은 나는 화살과 같다"고 하더니 어느새 나는 일흔을 넘겼다. 예로부터 일흔은 '고희(古稀)'라 하여 매우 드물다는 말로 초목에 견주면 시들어 떨어지는 조락(凋落)의 계절을 맞았다. 그래서 이즈음은 지난 일들을 하나하나 반추하면서 주로 많이 반성하며 정리해 간다. 내 지난 인생을 성능 좋은 지우개로 지우고 싶지만 그런 건 없다. 그래도 가장 잘한 일은 교단에서 30여 년간 어린 영혼들을 가르친 일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연, '가연(佳緣)'은 사제(師弟)간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인류 역사와 문화는 사제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바담 풍(風)'이라고 발음하지만 너희는 바람 풍(風)하라고 가르치는 게 훈장인지도 모른다. 지명(知命: 50)을 넘긴 제자에게 띄우는 어쩌면 마지막 '바담 풍(風)' 얘기를 전한다.

<동행> 출판기념식장에서 제자 김홍걸군과 함께
 <동행> 출판기념식장에서 제자 김홍걸군과 함께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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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빛이 유난히 빛났던 과묵한 학생

김홍걸 위원장!

나는 이 글을 쓰기 전에 자네에 대한 호칭을 어떻게 부를까 문제로 조금은 고민했네. 이전에 네가 자네에게 띄우는 편지에는 '김홍걸군(君)'이라고 썼는데, 이제 지명을 넘긴 제자에게 '군(君)'이라는 호칭을 계속 부르기에는 내가 건방진 것 같아 이즈음 언론에서 호칭하는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이라는 직책 명으로 일단 모두에서 부르겠네.

하지만 내 속 마음은 자네를 가르쳤던 그 시절로 돌아가 '홍걸군'으로 부르고 싶다네. 아마도 그것은 훈장들의 오랜 잘못된 타성일 수도 있을 테지만 실상은 친밀감으로 그렇게 부르고 싶다네.

나의 아버지(박기홍) 제4대 민의원 선거 당시 민주당 공천장
 나의 아버지(박기홍) 제4대 민의원 선거 당시 민주당 공천장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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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자네를 처음 만난 때가 1979년 3월이었으니까 그새 37년의 세월이 지났네. 그때 자네는 내가 봉직했던 이대부속고등학교 신입생으로 그야말로 풋풋하고 신선한 여린 햇병아리와 같았다네. 그때 자네는 언론에서조차도 아버지의 이름조차도 부를 수 없었던 '재야인사' 시절로 가택연금 재야인사의 아들, 이후는 사형수의 아들이었지.

그런 탓인지 자네 얼굴에는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늘 깊은 우수가 드리워진 듯했고, 자네 입은 늘 굳게 닫혀 있었지. 하지만 수업 중 자네의 진리에 대한 탐구의 눈빛은 유난히 빛났고, 지적 욕구로 가득 찼음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네. 자네의 극도로 절제한 과묵한 그 모습과 빛나는 눈빛은 역설로 내 폐부를 아프게 찔렀다네.

그때 자네는 잘 몰랐을 테지만 나는 경북 구미 태생으로 구미초등학교 출신이었기 때문에 괜스레 어떤 미안함이 있었다네. 사실을 알고 보면 나의 아버지는 한때 정치인으로 제4대 민의원선거 때 고향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했다가 낙선한 분이시라는 걸 지금에야 밝히네.

그분은 자네 아버지를 고향 선배보다 더 흠모했던 분이었다네. 솔직히 나는 그런 아버지를 몹시 싫어했다네. 그래서 나는 교육자의 길을 외길로 걸어왔고, 퇴직 후에는 강원 산골로 내려와 반거들충이 농사꾼이 됐다가 이즈음에는 글쟁이로 소일하고 있다네.

자네 고1때 친구들과 함께(왼쪽 은건상, 오른쪽 신민철)
 자네 고1때 친구들과 함께(왼쪽 은건상, 오른쪽 신민철)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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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 빠진 그림을 그리는 화가

나는 자네를 연상하면 두 장면이 또렷이 떠오르네. 그 하나는 1980년 여름 설악산으로 수학여행 갔을 때네. 그때 '세계민속제'라는 이름으로 남학생들에게 여장을 하게 해 미스 유니버스대회를 치르는 축제였는데, 그때 자네는 인도대표로 출전했었지. 그 '인도 여인'은 키도 훤칠하게 큰 데다가 가슴이 풍만해 그날 관객들의 환호와 휘파람 그리고 박수를 가장 많이 받았던 걸로 기억하고 있네. 그리고 나 자신도 그때 자네를 보고 남성이 여성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는 것을 체득했다네.

그리고, 또 한 장면은 자네 고2 때 늦은 가을 어느 날 하교시간, 교무실로 나를 찾아와서 대단히 겸연쩍은 표정으로 교내 문예 응모작을 편지 봉투에 담아 두고 갔지. 자네가 교무실에서 사라진 후 곧장 그 봉투를 열자 원고지도 아닌 대학노트 용지 두 장에다가 각각 시 한 편을 담았더군.

<여수(旅愁)>

고2 김홍걸

영원의 역전에서
완행열차를 기다린다.

빈 가방을 들고 서성대는 마음은
미지의 이웃과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저마다의 행로가 달라서
언어가 통하지 않는다.

영혼의 닮은 사람을 찾아
거울 앞에 서면

거울 속에서
낯익은 얼굴이 외면해버린다.

시간을 놓친 티켓처럼
인생이 쓸쓸해 웃는다.

<가을>

고2 김홍걸

무덤 뒤켠에 사는 시인은
거리에서 잔뜩 취하고는
곧잘 이곳을 지나간다.

그때마다 그는
들국화 따위를 짓밟고는
영원의 꿈에 젖고 싶었지만

그런 풍성한 가을은 이제
이 근처엔 없었다.

그 근처에 낯선 화가 하나가
맥 빠진 그림 같은 걸 그리고 있었다.

- <우리생활 17호> 1981. 2. 5

이희호 전 영부인 '동행' 출판기념식장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사하다.
 이희호 전 영부인 '동행' 출판기념식장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사하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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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되기를 바라다

두 편의 시를 읽자 뭔가 내 마음을 할퀴는, 한 어린 영혼의 상처받은 모습이 아른거렸다네. 그
며칠 후 교내 문예현상 공모를 마감한 뒤 심사하면서 나는 자네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올렸네. 다른 학생의 응모작과 우열을 가리기는 힘들었지만, 그때 사형수 아들인 자네의 마음을 위무해 주고, 아울러 자네에게 용기도 줄 뿐 아니라, 또 한편으로는 그것을 계기로 자네가 장차 시인이 되기를 바라는 내 속내도 있었다네.

그 후 후문을 들으니까 자네의 반응보다 당시 청송교도소에 수감돼 있었던 자네 아버지가 자네의 당선된 시를 보고 대단히 기뻐했다는, 어린 자네는 사형수 아버지보다 더 속이 깊고, 더 냉정하고, 과묵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네.

몇 해 전, 자네 고1 때 급우였던 뉴욕 세인트존슨 병원 신민철 박사 귀국환영 모임에 초대받아 갔더니, 그날 모인 친구들은 학창시절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네. 그때 자네 얘기도 많이 했는데, 그날 친구들 얘기로는 세상 사람들이 자네의 과묵함, 순결함은 잘 모른 채 일방으로 매도하는 것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네. 사실은 나도 그 점을 동감하면서 학창시절, 아니 그 이후에 자네를 만나 좀 더 세상사를 가르쳐주지 못한 걸 무척 후회했다네.

사실 나는 지난 번 편지에서 이미 밝힌 바 있지만, 자네가 이 땅의 한 시인으로나 아니면 한 통일전문 학자로서 남북을 오가면서 조국의 통일을 앞당기는 그런 일을 드러나지 않게 하거나, 현대사 특히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그런 학자로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해 봉사하는 그런 사람이 돼주길 바랐다네.

하지만 자네의 인생길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이미 자네는 '이립(而立)'은 물론, '불혹(不惑)'도 지나고 '지천명(知天命)'도 지난, 장년이기에 자네가 이즈음 찾은 길이 오히려 늦은 감이 있네.

일찍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다"라고 해 사람이 정치를 떠나 살 수 없음을 얘기했다네. 사실 정치는 곧 최고의 종합예술이기도 하네. 솔직히 강원 산골에 사는 나도 가능한 현실을 벗어난 삶을 살려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게 정치와 직결되지 않은 게 없으니 어찌 사람이 정치를 외면할 수 있겠는가. 더욱이 많은 젊은이들이 못 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오늘의 이 현실을 어찌 외면한 채 나 혼자 독야청청 오불관언(獨也靑靑 吾不關焉)하겠는가.

[관련 기사]
① 홍걸군, 그 시절 자네는 문학청년이었지
② 한 학부모에게 안흥찐빵을 보낸 까닭

'마지막 수업'

서론이 길었네. 이제 본론으로 정계에 갓 입문한 자네에게 옛 훈장 시절로 돌아가 몇 마디 들려주겠네. 물론 자네는 그새 많은 공부도, 독서도 하였기에 이미 다 아는, 어쩌면 케케묵은 진부한 얘기일 테지만 마음의 밭은 매일매일 매어주거나 갈아주어야 잡초가 돋아나지 않는다네. 잠시 37년 전, 그 눈빛 초롱초롱하던 그 시절로 돌아가 내 말을 들어주시게나.

첫 번째 말.

"정(政)이란 정(正)이다." - 논어 안연(顔淵) 편

새삼 설명이 필요 없는 말일 테지만,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나라를 바로잡는 것이라네. 자네가 정계에 있는 한 늘 이 말을 명심하시게.

두 번째 말

"나에게 유익한 세 벗이 있고, 해가 되는 세 벗이 있다. 정직한 사람을 벗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을 벗하고, 견문이 많은 사람을 벗하면 유익하다. 허식적인 사람을 벗하고, 아첨 잘하는 사람을 벗하고, 말을 잘 둘러대는 사람을 벗하면 해가 된다."(子曰 : 益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損者三友 ; 友便辟, 友善柔, 友便侫, 損矣)

이 말씀 역시 공자의 말씀이네. 흔히들 공자의 말씀이라면 낡고 고리타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한 마디 한 마디 깊이 새겨들으면 시공을 초월한 만고불변 진리의 말씀이라네.

오늘날 정치는 혼자 하는 게 아니기에 자네 언저리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들 것이네. 그때 항상 이 말을 가슴 깊이 간직하면서 자네와 마음과 마음이 통하는 진실한 동지가 필요할 때는 꼭 그 사람을 이 말씀에 대입해 보시게. 그러면 그 어떤 사람이 나와 가까이 할 사람인가에 대한 자네 나름대로의 판단이 설 거네.

자네에게는 무척 아픈 얘기일 테지만 오래전 자네가 무슨 일에 연루돼 곤욕을 치를 때 나는 자네에게 이 말씀을 들려주지 못한 걸 무척 후회했다네. 이제는 이미 지난 일로 그때 젊은 나이에 예방주사 한 방 잘 맞은 감도 있지만, 자네가 성공한 정치인으로 길이 우리 역사에 남을 큰일을 하기를 기대하는 한 훈장의 바람으로 간곡히 당부하는 말이네. 꼭 명심하시게.

세 번째 말.

요즘 내 모습, 많이 늙었지?
 요즘 내 모습, 많이 늙었지?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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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평화통일의 역군이 되어주시게."

이 말은 나의 부탁뿐 아니라, 자네 선친의 고명(顧命)이기도 할 테고, 8천만 겨레의 한결같은 염원일 걸세.

분단 70년이 지나 80년으로 이르는 이즈음에도 남과 북은 아직도 평화통일보다 상대를 무력으로 제압하려는 시도로 남북 양측이 모두 민생을 도탄으로 빠트리고 있다네.

이는 강대국 무기업자들의 농간에 놀아나는 꼴로 정말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 아닐 수 없네. 남과 북이 지금의 국방비를 반만 줄여도 북의 동포들은 기아에서 해방이 될 것이며, 평양을 제외한 북의 마을과 도시도 그렇게 어두운 밤이 되지는 않을 것이며, 남의 젊은이들이 3포 세대로 전락했겠는가.

지금 자네가 맡고 있는 직책이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이라는데, 이는 당내 통합 역할뿐 아니라, 나아가 국내 지역 간 계층 간 통합을 이루고, 궁극적으로는 남과 북 겨레의 통합을 이루고, 마침내 분단을 극복하는 그런 큰일을 부탁드리네.

물론 여기에는 숱한 장애물도 있는, 매우 힘든 일임을 알고 있네. 현시점에서는 자네가 이 일을 할 적임자라고 보네.

모든 일에는 과정이 있으니 우선 작은 일부터 소매 걷고 나서시게. 이 일에 자네가 구심점이 되어 남북 긴장을 완화시키고, 조국의 평화정착에 이바지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자네는 큰일을 하는 거네. 이 편지에 내가 쓴 분단극복 장편소설 <약속>을 동봉하네. 책장 넘겨주시면 고맙겠네.

마지막 말로 백범 선생 말씀 참고로 전하네. 부디 이런 큰 야망을 품고, 정계에서 활동하시게.

"38선 때문에 우리에게는 통일과 독립이 없고, 자주와 민주도 없다. 어찌 그뿐이랴, 대중의 기아(飢餓)가 있고, 가정의 이산(離散)이 있고, 동족의 상잔(相殘)까지 있게 되는 것이다. 마음속에 38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선도 철폐될 수 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데 협력하지 않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 <백범어록>(돌베개) 중에서

김홍걸 위원장! 뒤늦게나마 자네의 정계 입문을 축하하면서 부디 자네의 야망이 이뤄지길 비네.

2016년 5월 2일 원주 치악산 아래 '박도글방'에서 옛 훈장 박도 씀

덧붙이는 말 : 일전에 자네 모교 전 교장 선생님이 내게 하신 자네의 촌평 말씀 전하네.

"사람이 마흔을 넘으면 그 사람의 삶이 얼굴에 나타나기 마련인데 이즈음 TV에 비친 김홍걸씨의 얼굴을 보니까 어쩌면 그렇게 순수해 보이는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인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인 김홍걸 더불어민주당 국민통합위원장.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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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김홍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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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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