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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하 시인.
 김이하 시인.
ⓒ 홍성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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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생 돼지띠이니 나랑 띠동갑이다. 20여 년 전. 아직 '시인'이란 명패도 달지 못한 상태로 드나들던 문단의 술자리. 손에는 카메라를 들고,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를 담은 채 조용히 주석(酒席)을 지키던 사내 하나를 만났다. 시인이고, 이름이 '김이하'라고 했다.

사적인 자리에서 시인을 두어 번이라도 만나본 독자들은 안다. 좋은 시인은 말수가 적다. 그럴 가능성이 높다. 이건 추정이 아닌 수백 차례의 경험에 근거한 것이니 믿어도 좋다. 말수 적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 김이하가 최근 새로운 시집을 상재했다. 3번째 시집 <춘정, 火>에 이어진 것이니 4번째 작품집이다.

슬픔의 미뢰를 건드리는 시편들

김이하 신작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
 김이하 신작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
ⓒ 도서출판 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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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푸른 파도 출렁이는 해변 바로 곁을 지나는 출퇴근 버스 속에서 김이하의 신작 시집 <눈물에 금이 갔다>(도서출판 도화)를 읽었다. 봄 햇살 눈부신 출근길에서도, 피곤에 찌들어 돌아오는 퇴근길에서도 책이 주는 느낌은 한결같았다. 이상스레 슬펐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내 몸에 사시나무가 들어선다
그 이파리 방금 지나간 소나기
살기처럼 으스스한 물방울
내 몸에 든다, 내 몸 제멋대로 흐른다
아니야, 나는 사시나무가 아니야
그러나, 나는 사시나무였다, 부르르 몸을 떨었다
- 위의 책 중 '몸살' 일부.

자신의 현재 상태를 긍정하는 것은 '시인의 태도'가 아니다. 그것이 개인에 대한 미시적인 것이건, 세계에 관한 거시적인 것이건 '부정'은 문학하는 자의 기본 중 기본. 김이하는 자신이 처한 현재를 '바람 앞에 부르르 떨고 있는 사시나무'로 규정하고 있다.

세상을 '느끼며' 살아가려 한다면 '처량함'은 2016년 오늘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겪는 감정일 것이다. 이렇게 고조된 처량한 시적 감정은 셋방에 함께 기거하며(?) 시인의 공간에 또 다른 집을 짓는 하찮은 미물 거미에게까지 옮겨간다. 아래는 책과 동명의 제목을 가진 시의 한 대목이다.

남의 집 한 칸을 빌어 사는
내 삶의 한켠에 번듯하게 제 집을 짓는 저 놈
흐릿한 거미줄 틈으로
멀리 사라지는 내 등이 보인다
더 이상 걷어낼 거미줄은 아닌 것이다

느끼는 자의 슬픔과 시인의 돈오각성

일생을 살면서 단 한 번의 '돈오각성(頓悟覺醒·불현듯 크게 깨달아 삶을 바꿀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경험하지 못하는 게 보통의 사람들이다. 그러나, 세상을 '그냥 사는 게' 아닌, '느끼며 사는' 시인이라면 경우가 다르다. 김이하에게 돈오각성의 시간은 새벽 3시에 왔다.

깨달음이란 뉘우침과도 같은가
밤새 풍경을 울려대는 종벌레들
그 곁에서 우짖는 귀뚜라미
또 많은 벌레들의 소리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이었던가
- 위의 책 '새벽 세 시, 문막에서' 일부.

큰 깨달음을 얻은 승려의 새벽 염불과도 같은 위의 시는 오래 고민하며 시와 삶을 살아낸 자만이 할 수 있는 "내가 아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자문에 다름 없다. 결국 인간과 벌레의 차이점은 무엇이었던가? 인간은 벌레와 크게 구별되는 존재였던가?

<국토>와 <가거도>의 시인 조태일(1941~1999)은 말했다. "시란 추락하는 것들의 그리움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노래하는 것"이라고. 김이하 역시 다를 바 없었다. <눈물에 금이 갔다>의 마지막 부분에 실린 시 '아직도 한 뼘이나 남은 꿈'의 마지막 구절은 회한의 오늘이 아닌 '끝끝내 살아남아 맞아야 할 내일'을 눈물겹게 노래한다. 이런 것이다.

이제는 더 훤히 잘 보이고
눈 감아도 무장 꿈이 그려지는 길이다
그래, 한 뼘이나 더 남은 햇살을 붙들고
씨감자를 심는 저녁이다

세상은 시인에게도 '행복'을 허락할까?

남들은 시작하는 나이 열아홉에 시를 작파하고도, 125년의 세월을 넘어 시를 읽고,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의 '아이돌(idol)'로 아직도 살아 있는 아르튀르 랭보(1854~1891). 조숙하게도 열세 살 랭보는 "상처받지 않은 영혼이 어디 있으랴"라고 했다. 김이하는 그 상처를 이렇게 말한다. 시집 말미 '작가의 말'을 통해서다.

"결국 살아온 게 아니라, 등을 떠밀려 온 한 생이었다. 이제는 외로움이라는 것조차 나를 흔들지 못한다. 여린 가지는 다 부러지고 뭉툭하고 무딘 감정의 다발만 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 다만 두렵다. 이 두려움이 희미해질 때, 그때 난 걸음을 멈출지도 모른다."

어렵잖게 '죽음의 향기'가 맡아지는 문장 속에서 시를 쓰는 것에 생의 한부분을 기대온 나까지 덩달아 슬퍼진다. 대체 이 세상은 언제가 돼야 시인도 웃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허락할까?

동료시인 박철은 김이하의 신작 출간 소식을 듣고 "그가 지구별의 어느 빛나는 존재였음을 증명하는 이 아픈 시들을 나는 오래도록 꼬깃꼬깃 움켜쥐고 있을 것"이라 했다. 이러한 축하의 말조차 슬프게 공명하는 봄날 오후다. 어쩔 수 없이 시인은 '슬픈 것들'이란 말인가? 꽃들은 이미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에 금이 갔다

김이하 지음, 도화(2016)


태그:#김이하, #눈물에 금이 갔다, #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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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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