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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에 소재한 경기도 기념물 제13호인 남이장군묘
▲ 남이장군묘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에 소재한 경기도 기념물 제13호인 남이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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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일찍이 권남에게 딸이 있어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청혼했다. 권남이 점쟁이에게 남이의 운을 점치게 했더니 점쟁이는 "이 사람은 반드시 젊은 나이에 죽을 것이니 좋지 못하다"라고 답했다. 권남은 자신의 딸의 수명을 보게 했다. 점장이는 "이 여자도 명이 매우 짧고 또 자식도 없으니 그 복만 누리고 화는 보지 않을 것이므로 (남이를) 사위로 삼아도 무방하다"라고 대답했다. 권람은 그 말에 따라 두 사람을 결혼시켰다. 남이는 17세에 무과에 장원하여 임금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며 26세(일설에는 28세라고도 한다)에 병조 판서로 있다가 사형을 당했는데, 권남의 딸은 벌써 수년 전에 먼저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남이는 귀신도 두려워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무속에서는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은 그의 원혼이 크나큰 위력을 발휘한다고 생각하여 신령으로 받들기도 한다. 그것은 남이가 권남의 딸이 귀신의 조화로 인해 죽게 되었을 때 귀신을 몰아내고 권남의 딸을 살려 자신의 처로 삼았기 때문에 남이의 화분만 보아도 귀신들이 쫓겨 간다는 속설 때문이다.

묘소입구 안내석 옆에 폐비닐이 가득 쌓여있다
▲ 묘소입구 묘소입구 안내석 옆에 폐비닐이 가득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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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에 역모에 몰려 능지처참 당해

이렇게 귀신까지도 두려워하는 남이(1443~1468) 장군은 조선조 세조 때의 인물로 의령남씨 의산군 남휘의 손자이자 권람의 사위로 세조 3년인 1457년 무과에 급제했다. 그의 나이 17세였다. 남이는 세조의 총애를 받아 여러 무직을 역임하였다. 평소 강직하고 굽힐 줄 모르는 성품을 지녔던 남이는 함경도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난을 평정했다.

이어서 파저강 일대의 건주위 여진족 정벌에 참여하여 추장 이만주 부자를 사살함으로써 세조 12년에 26세의 젊은 나이로 병조판서에 올랐다. 그런 남이를 신진세력의 약진을 두려워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이 눈에 가시로 여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세조가 승하하고 예종이 등극하자마자 남이는 병조 판서에서 겸사복장으로 좌천되는 수난을 당한다.

그로부터 불과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남이는 유자광이 "남이가 역모를 도모한다"는 고변으로 26세에 능지처참 당해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한다. 너무나 뛰어났기에 억울하게 죽은 남이는 350여 년이 지난 순조 18년인 1818년에 남이의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청으로 관직과 작위가 복구되었다.

진입로 앙편은 펜스로 막혀있어 답답하다
▲ 진입로 진입로 앙편은 펜스로 막혀있어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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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맺힌 세상을 떠난 남이의 묘를 찾아가다

지난 23일 아침 서둘러 길을 나섰다. 경기도 화성시에 소재한 몇 곳의 문화재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주말이라 가는 길이 막혀 일부러 차량의 통행이 뜸한 지방도를 택했다. 나뭇잎들이 연두색에서 초록색으로 변해가는 주변 경계가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 산 145에 소재한 경기도 기념물 제13호인 남이장군의 묘로 들어가는 입구는 좁은 농로를 지나야 한다.

입구에 서 있는 안내판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동네 앞쪽에 남이장군 묘란 간판과 입구를 안내하는 석비가 서 있다. 그런데 그 석물 주변을 보는 순간 울화가 치민다. 문화재 진입로 앞에 검은 폐비닐이 가득 쌓여있다. 남이장군 묘로 들어가는 길 좌우편은 밭주인들이 세운 펜스로 막혀있고 좁은 통로만 겨우 남겨 놓았다.

정리가 안 된 주변도 언짢은데 안으로 들어가 봉분으로 올라가는 길을 보니 난감하다. 도대체 명색이 문화재인데 이런 꼴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맞이하다니. 젊은 나이에 무고하게 역적으로 몰려 비명에 세상을 떠난 것도 억울한데 죽어서까지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에 한숨부터 터져 나온다.

다 파여져 나간 오르막길
▲ 오르막길 다 파여져 나간 오르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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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술한 문화재 관리, 이대로 좋은가?


봉분을 행해 오르는 길은 더 엉망이다. 물길인지 계단인지 구별도 되지 않는 오르막길은 쓰러진 나뭇가지가 길을 막고 있다. 돌계단을 쌓은 것 같은 중간에 돌이 물에 쓸려 내려간 것인지 아니면 물길로 만들어 놓은 것인지 구별이 안 되는 오르막길은 문화재 주변을 조성한 경관으로서는 한 마디로 너무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남이장군과 부인의 묘가 나란히 서 있는 봉분은 뒤쪽을 둔덕(사성)으로 둘러쌓았으며 호석으로 잘 단장을 하였다. 석물은 월두형 묘비와 상석, 무덤을 수호하기 위해 세운 문인석 한 쌍과 망주석 한 쌍이 각각 서 있다. 조촐하게 마련되어 있는 남이장군 묘. 조선시대 9명의 충무공 중 한 명인 남이장군의 묘 앞에서 잠시 머리를 숙인다.

권남의 딸인 부인과 함께 나란히 조성한 남이장군묘
▲ 남이장군묘 권남의 딸인 부인과 함께 나란히 조성한 남이장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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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동행한 아우가 주변에 난 꽃 한 가지를 꺾더니 상석 위에 올려놓고 머리를 숙인다. 한 때 역사의 인물이었던 남이장군의 죽음을 슬퍼하는 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보다는 입구부터 엉망인 장군의 묘를 보고 있다는 것이 죄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제쯤이면 이 남이장군 묘에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을까? 사람들로 북적이는 남이섬을 떠올리며 더욱 죄스런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뉴스타워와 티스토리블로그 바람이 머무는 곳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남이장군묘, #화성시, #경기도기념물, #문화재관리, #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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