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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대박>.
 드라마 <대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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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1대 주상인 영조 임금은 오늘날 우리에게 비교적 좋은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탕평책의 주인공이라는 점 때문에도 그렇고, 정조의 할아버지라는 점 때문에도 그렇다.

영조가 좋은 이미지를 갖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그의 노력 덕분이겠지만, 어떻게 보면 자신의 정적인 이인좌 덕분인 측면도 있었다. 이인좌(전광렬 분)는 SBS 월·화 드라마 <대박>에서 영조(여진구 분)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인물이다. 이인좌는 영조를 몰아내겠다며 반란까지 일으켰다. 이런 이인좌가 영조의 이미지를 좋게 만드는 데 상당 부분 기여했던 것이다.  

집권 초기만 해도 영조의 입지는 불안했다. 그는 앞날이 불투명했다. 그에 대한 반대는 정계에서뿐 아니라 백성들 사이에서도 나왔다. 그가 반대에 직면한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은, 전임자이자 이복형인 제20대 경종 임금을 독살했을 거라는 의혹이었다.

아버지인 제19대 숙종이 죽기 전부터, 조선 정계는 경종(당시엔 세자)을 지지하는 세력과 영조(당시엔 왕자)를 지지하는 세력으로 나뉘어 있었다. 경종 쪽은 소수 세력이었고 영조 쪽은 다수 세력이었다. 경종은 생모 장희빈(희빈 장씨)처럼 소수 세력의 지지를 받았다.

이런 상태에서 1720년 숙종이 죽고 경종이 뒤를 이었다. 노론당은 이 결과에 승복하지 않았다. 이들은 서른 초반인 경종한테 아들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이복동생인 영조를 후계자로 앉힐 것을 요구하였다. 그리고 집요한 압박 끝에 영조를 왕세제(동생 겸 후계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노론당은 한걸음 더 나아가 대리청정(권한대행)까지 요구했다. 경종더러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고 영조에게 국정을 맡길 것을 요구한 것이다. 압박에 눌린 경종은 일단은 수용했다가, 이후 반격을 가해 대리청정을 취소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 인해 영조가 불리해진 구도 속에서 벌어진 사건이 경종의 갑작스러운 사망이다. 1724년 경종이 서른일곱 나이로 급사한 데는 영조의 의학적 처치가 적지 않게 기여했다. 영조는 의사가 아니었다. 하지만 경종이 병석에 누운 지 20일이 다 되도록 내의원 의원들이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약간의 의학 상식을 가진 영조가 왕세제 지위를 앞세워 치료를 주관했던 것이다.

경종의 죽음, 정말 영조 탓일까?

<대박>의 영조(여진구 분).
 <대박>의 영조(여진구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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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는 경종이 설사를 하는데도 설사를 유발하는 처방을 내렸다. <경종실록> 개정판인 <경종수정실록>의 경종 4년 8월 20일(양력 1724년 10월 6일) 기사에 따르면, 영조는 의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종에게 게장과 생감을 먹였다. 16세기에 명나라 사람 이시진이 쓴 <본초강목>에서는 "게를 감과 함께 먹으면 복통이 나고 설사를 한다"고 했다. 이 지식은 18세기 조선 의료계의 상식이었다.

영조의 '돌팔이 처방'은 4일 후에도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어의의 반대를 무시하고 인삼탕을 처방했다. "인삼은 제가 조금 전에 올린 탕약과 상극입니다"라며 어의가 반대하는데도, 영조는 '인삼은 양기 회복에 좋은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식으로 그 말을 묵살했다.

영조는 연약한 듯이 보이면서도 고집과 뚝심이 있었다. 이런 성격은 이 사안에서도 나타났다. 영조는 전문가들을 상대로 자신의 의학적 상식을 계속 밀어붙였다. 결국 영조의 처방대로 환자의 목구멍으로 인삼탕이 넘어갔고, 다음 날 새벽에 경종은 세상을 떠났다. 그러고 나서 영조가 왕이 됐다. 

<경종실록>이나 <경종수정실록>에 묘사된 정황을 보면, 영조가 이복형의 죽음에 대해 의학적 책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복형을 죽일 목적으로 의료행위에 개입했다기보다는, 살려보겠다는 열정이 너무 지나치다 보니 그렇게 된 것 같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어의들과 힘겨운 논쟁을 하는 영조의 모습은 살인을 계획한 사람의 모습과는 분명히 거리가 있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상은 영조가 이복형을 독살했을 것이라고들 수군댔다. 그래서 새로 등극한 영조의 입지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영조는 세상의 눈치를 의식하면서 옥좌에 앉아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는 탕평책을 표방하고 나섰다. 그는 당쟁의 패배자가 사약을 마시는 일이 비일비재하던 시대에 살았다. 또 그 자신이 당쟁에 휘말려 있었다. 적당한 당쟁은 당파 간의 균형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왕권을 강화시키지만, 지나친 당쟁은 그 균형을 깨고 왕권까지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당파 간의 균형을 유지하고 왕권을 강화할 목적으로 탕평책을 표방하고 나섰다. 이때가 1724년이다. 

그러나 탕평책의 앞날은 불안했다. 입지가 불안한 군주가 그것을 성사시키리라고는 예측하기 힘들었다. 이런 상태에서 벌어진 게 1728년 이인좌의 난이다. 반란이 벌어진 날은 음력으로 하면 영조 4년 3월 15일, 양력으로 하면 1728년 4월 23일이다. 이 반란은 소수당인 소론당 및 남인당의 강경파들이 영조를 몰아내고자 일으킨 정변이다.

정변 초기에는 이인좌가 압도적 우세를 유지했다. 그는 정부군의 충청도 사령관이 지키는 청주성을 함락한 뒤 경기도 공략에 나섰다. 충청도뿐 아니라 경상도에서도 상당한 호응이 있었다. 경상도에서는 합천을 포함한 4개 지역이 반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전라도에서는 거병 초기에 반란군이 와해되기는 했지만, 반란에 대한 지역 사회의 호응이 있었다.

이인좌의 난, 탕평책의 밑거름

<대박>의 이인좌(전광렬 분).
 <대박>의 이인좌(전광렬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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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업생산이 많은 충청·전라·경상도에서 이인좌에 대한 지지 혹은 호응이 나타난 것은, 삼남 지방의 경제권을 쥔 선비나 지역 유지들뿐만 아니라 중간층까지 나서서 영조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삼남의 호응을 얻는 것은 임진강 이북 전체를 얻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이곳의 경제적 가치가 조선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선거에 비유하면, 기호가 몇 번인지 알 수 없는 '이인좌 당'이 전국 규모의 4·23 선거에서 중산층과 상류층의 지지를 발판으로 충청·경상도에서 많은 의석을 얻고 전라도에서 선전했다고 할 수 있다. 영조의 독살 의혹을 선거 쟁점으로 부각한 이인좌 당이 삼남 지방의 민심을 흔드는 데 성공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인좌 당은 북상에 실패했다. 경기도 안성과 죽산 방면으로 북상한 이인좌 부대는 병조판서 오명항이 이끄는 토벌군에 패배했다. 이로써 이인좌 당은 경기도 장악에 실패했고, 이것이 반란의 실패로 연결되었다. 영조 입장에서는, 삼남 지방에서 패배 혹은 고전했지만 수도권을 지킨 덕분에 정권을 사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패로 끝나기는 했지만, 이인좌의 반란은 영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부자 승계가 당연시되던 왕조국가에서 영조는 형의 지위, 그것도 이복형의 지위를 승계했다. 그 승계의 정당성마저 의심을 받았다. 이복형을 독살했을지 모른다는 의심을 받았다. 이인좌의 난은 이 같은 영조의 약점을 부각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 사건은 영조한테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영조에게 병만 준 게 아니라 약도 주었다. 소수당 강경파뿐 아니라 많은 일반 백성들이 이인좌에게 동조했지만, 어쨌거나 영조는 반란을 진압했다. 덕분에 영조는 반대파의 상당 부분을 정계에서 숙청하고 국정 장악력을 높이는 소득을 거두었다. 

이것은 영조가 자신의 국정운영 철학인 탕평책을 자신 있게 추진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인좌 같은 경쟁자가 나타났다가 소멸되지 않았다면, 영조는 훨씬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 탕평을 추진해야 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인좌가 영조의 탕평정치를 위한 희생양이 되어준 셈이다. 

영조는 뚝심과 소신을 가진 인물이었다. '4·23 선거'에서 그는 소수당 강경파들이 자신을 위협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또 백성들의 상당수가 거기에 동조하는 모습도 목격했다. 심지가 약한 인물 같았으면, 당장에 탕평을 접고 친위세력 위주로 정부를 구성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영조는 흔들리지 않았다. 정치적 상처에도 불구하고 탕평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고 끝까지 밀어붙였다. 이 같은 개인적 자질에 더해 정적 이인좌가 만들어준 외부적 환경까지 작용한 덕분에 영조가 탕평을 향해 보다 더 강력하게 뛰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태그:#대박, #탕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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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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