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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통행금지제도, 그러니까 '통금'은 전근대사회에 수많은 나라에서 시행했던 제도다. 우리나라에서도 유서가 깊은 제도임은 말할 것도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401년(태종 1) 5월에 통금이 처음 언급된다.

이때는 "초경3점(初更三點, 오후 8시경) 이후 5경3점(五更三點, 오전 4시 30분경) 이전에 행순을 범하는 자는 모두 체포할 것"을 명하고 있다. 조선의 야간통행금지제도는 1895년 폐지되었으나, 1945년 광복 직후 부활해 1982년 폐지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이 시기 통금을 시행하던 주된 이유는 치안 문제에 있었다. 전등이 발명되기 전에는 새벽 시간대 활동 자체가 힘들었고, 한국전쟁 직후에는 준전시 상태라는 특수한 상황이 통금을 정당화했다.

과학기술이 발전하고 시민들의 야간활동이 당연히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기본권 중 하나로 인식되면서, 대개의 근현대국가에서 통금은 폐지되었다. 물론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82년 통금이 폐지됐으니, 지금의 젊은 세대는 통금을 책에서나 접해봤을 법하다. 그런데 아직도 통금이 존치되고 있는 공간이 남아있으니, 바로 '학문의 전당'이라 일컬어지는 대학이다.

상당수 대학이 통금 제도 실시하고 있지만... 

대학 기숙사별 통금 시간 존재 여부
 대학 기숙사별 통금 시간 존재 여부
ⓒ 유종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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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48개 대학 재학생을 상대로 자체적인 설문조사를 벌였다. 조사 대학 중 87.5%(40개 대학)가 점호 규정을 적용하고 있었다(지난해 12월 <한겨레21>은 전국 4년제 종합대학 180개 중 131개교가 점호 또는 폐관 규정을 따르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다). 통금 시간이 짧은 대학은 오전 2시부터 5시까지, 긴 대학은 오후 11시 30시부터 오전 6시까지 그 시간대도 다양하다. 해당 시간 동안 학생들은 기숙사에 들어가지도,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다.

통금을 유지 중인 대학에서는 보통 통금 시간을 지키지 않는 학생에게 벌점을 부과한다. 이 벌점이 일정 수준을 넘으면 다음 학기 기숙사 재입사가 불가능하거나, 아예 퇴사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게다가 통금과 더불어 사생들이 외박을 하지 않았는지 직접 확인하는 '점호'를 실시하는 경우도 있다. 담당자(장학금을 지급받는 학생이나 사생단 등)가 각 방을 돌며 인원점검을 하는 것은 마치 군대를 연상케 한다.

대부분 대학은 통금 유지의 주된 이유로 안전 문제를 꼽는다. 기숙사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야간 시간대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기숙사 체류 인원을 정확히 파악해야만 학생들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논지 자체로는 타당해 보인다.

문제는 야간 경비인원이 없는 기숙사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기자가 재학 중인 고려대학교의 경우에는 자정에서 오전 5시 사이엔 경비원이 상주해있지 않다. 이는 사생들의 안전을 고려한다는 대학의 주장과 모순된다. 대학이 정말 사생들의 안전에 신경 쓴다면, 24시간 경비원을 상주시켜 외부침입자로부터 사생들을 보호해야 함이 마땅하다.

통금이 유지되는 대학의 기숙사는 매일 새벽마다 진풍경이 펼쳐진다. 통금 시간보다 늦게 돌아온 학생들이 기숙사 앞에서 밤을 새우는 것이다. 통금에 늦은 학생들은 주변 술집이나 카페 등에서 통금 해제 시간을 기다리기도 한다. 기숙사비를 내고 입사한 학생들이 자신의 방에 들어가지 못해 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하는 현실은 이상할 뿐만 아니라 위험하다. 기숙사 밖으로 떠밀린 학생들의 안전을 책임지는 이는 아무도 없다.

대학생은 성인이다. 대학은 성인들을 위한 교육기관이고, 이들이 하나의 인격적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대학이 운영하는 학사제도는 학생들을 성인으로 인정하는 선에서 시행되어야 한다. 교육과정의 일환으로 운영되는 기숙사도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학생들이 정당한 비용을 내고 입사한 기숙사에 입실 시간 제한을 정해둔 것은 확실히 불합리하다. 

설사 통금을 시행한다 하더라도, 이는 학생들의 필요와 합의에 따라 운영해야 한다. 학교가 일방적으로 학생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일부 미국 대학의 경우, 기숙사생들의 자율적 조직인 사생회가 통금 존치 여부 및 운영방침을 결정한다. 사생들은 스스로 삶을 통치할 기회를 부여받음으로써,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재고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학교가 일방적으로 정한 규칙에 따라 통금을 실시하고 있다. 대학생으로 살아가며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기숙사에서조차 학교에 의해 통제받는 학생들이 기숙사에서 어떤 가치를 습득할 수 있을까.

잇따른 '통금 해제', 변화의 바람 이어지길

고려대학교는 다음 학기부터 통금을 시범해제하기로 결정했다.
 고려대학교는 다음 학기부터 통금을 시범해제하기로 결정했다.
ⓒ 고려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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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고려대학교 총학생회는 다음 학기부터 여자 기숙사 통금을 해제하는 안에 대해 학교와 합의를 마쳤다. 고려대학교의 경우, 2013년 남자 기숙사 통금은 해제되었으나 '여자 기숙사는 안전에 더욱 신경 써야 한다'며 여자 기숙사 통금을 유예했다.

하지만 총학생회와 사생회가 진행한 설문조사에서 80%가 넘는 기숙사 사생들이 통금 해제를 찬성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학생들은 설문조사 결과와 더불어 자정에서 오전 5시까지 경비인력이 아예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학교를 압박했고, 학교는 새벽 시간대 경비인력 확충과 여자 기숙사 통금 해제를 약속했다.

이윤지 고려대 총학생회 주거생활국장은 "다른 안전책에 대한 대안 없이 단지 새벽 시간대 통금만 고집하는 일선 대학들의 행태는 위선적"이라며 "새벽 시간대에 기숙사 안에서 안전문제가 발생해도 문이 잠겨있어 학생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상황이 훨씬 더 위험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미 기숙사 통금을 해제한 대학도 있다. 서울대학교에는 통금이 없지만, 특별한 안전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서울대학교에 재학 중인 김지윤(25)씨는 "통금이 없어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기숙사에 출입하고 있다"며 "거주 학생들이 모두 성인이기 때문에 점호 제도나 통행금지제도를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한편 경희대와 한국사학진흥재단이 함께 출연해 건립한 경희대 행복기숙사의 경우에는 사생들의 통행을 24시간 허용하고 있다.

군부독재 시절 시행됐던 야간통행금지제도는 사회 공공질서 유지 및 질서 확립의 책임을 담당하기 위해 도입됐으나, 일반 시민들의 일상적 자유를 박탈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상당수 대학들이 시행하고 있는 기숙사 통금도 거주하는 학생들의 불만이 매우 높은 것이 현실이다. 그나마 서울 주요 대학들이 잇따라 통금 해제 및 축소를 도입하고 있다. 대학가 전반에 변화의 바람이 이어지길 기대한다.


태그:#기숙사, #대학, #대학가, #통금, #통행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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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을 공부하는 대학생. 사회의 어두운 곳을 비추는 기자가 되길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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