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어화>는 이제는 사라진 '일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영화 <해어화>는 이제는 사라진 '일패'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롯데엔터테인먼트


[기사 수정 : 20일 오후 5시 20분]

지난시절 존재했다가 사라져 지금은 볼 수 없는 것들은 일종의 판타지로 남는다. 그게 사물이건 사람이건. 기생(妓生) 역시 마찬가지다. 기생이란 권력자나 부자들의 술자리 시중을 들며 밥을 벌었던 여성이라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미시적으로 들어가면 현대의 유흥주점 여급들과 이제는 '사라진' 기생은 여러 부분이 달랐다.

고전소설 <춘향전>의 주인공 춘향이는 관기(官妓·관청에 소속된 기생)의 딸이다.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였으니 그녀 역시 기생으로 살아야 했다. 그런데 이 열여섯 기생의 총명함이 어떠했던가. 사서삼경을 읽은 양반 이몽룡이 종을 시켜 춘향에게 "길을 건너 이리 오라"고 청하자, 딱 아홉 글자로 잘난 척 하는 현감 아들의 기를 죽인다.

"너네 도련님은 雁隨海 蝶隨花 蟹隨穴(안수해 접수화 해수혈)도 모른다니?"

춘향의 말을 문학적으로 풀어 쓰면 이렇다.

"기러기는 바다를 따르고, 나비는 꽃을 따르며, 구멍을 찾는 것은 게인 법인데, 왜 남자가 여자보고 오라가라 그래. 글깨나 읽었다는 사또 자제가 그런 것도 모르고. 바보 같이..."

사실 기생이 한국역사에서 사라진 것은 그리 오래 전 일이 아니다. 불과 70여 년 전인 일제강점기 때도 일종의 기생 양성학교인 '권번(券番)'이 있었다는 것이 그 증거 중 하나. 그곳에 소속돼 노래와 춤, 서화를 배운 소녀들은 학업성취도(?)에 따라 일패(一牌) 혹은, 이패(二牌)와 삼패(三牌)로 나누어졌다.

통상 기생하면 연이어 떠오르는 단어 '매음(賣淫)'을 한 것은 하급 기생인 이패와 삼패였고, 일패기생은 빼어난 노래와 춤 실력에 고관대작과 고담준론을 나누는 지식까지 두루 갖췄기에 아무에게나 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소수의 일패들은 직업적 자긍심이 당당했다고 전해진다.

며칠 전 개봉한 박흥식 연출의 <해어화>는 바로 이 일패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제목으로 사용된 해어화(解語花) 역시 '말을 알아듣는 꽃', 즉 기생을 의미한다.

일패 이야기를 영상으로 옮기다

구구한 사연을 간직한 채 권번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소율(한효주 분)과 연희(천우희 분). 세월은 흘러 8·15 광복을 한 해 앞둔 1944년이 됐고, 둘은 나란히 '견습기생'에서 일패가 된다.

그러나, 이전 시대와는 많은 것이 바뀐다. 기생이 부르는 옛노래보다 일본식 가락에 얹힌 유행가가 더 큰 인기를 누리고, 일패의 품위를 지켜주던 '점잖은 사내들'은 드물어졌다. 게다가 소율과 연희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바람둥이 작곡가 윤우(유연석 분)의 등장으로 드라마는 파국으로 달려가는데...

<해어화>는 보기 드물고 비밀스런 소재를 직접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그렇기에 그 안에 매력적인 이야기와 에피소드를 담아냈다면 세칭 '대박영화'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의 바람과 기대를 영화는 외면한다.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기로 하고.

외견상으로 보이는 <해어화>는 화려하다. 소율과 연희가 입고 등장하는 1940년대 한복과 양장은 두 여배우의 아름다움을 극대화시키는 동시에 관객들을 매혹한다. 여기에 조연으로 등장한 탓에 출연 시간이 짧고 대사가 거의 없지만 박성웅(조선총독부 경무국장 역)과 장영남(권번 선생 산월 역)이 선사하는 존재감도 묵직하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뿐. <해어화>는 상영시간 내내 길을 잃고 헤맨다. "감독은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거야?"라는 물음표를 관객들의 머릿속에 그려내며.

청승과 신파로 끓인 잡탕

 <해어화>에 출연한 천우희(좌)와 유연석. 둘의 연기력은 하늘과 땅 차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해어화>에 출연한 천우희(좌)와 유연석. 둘의 연기력은 하늘과 땅 차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 영화 홈페이지


어찌 보면 좌절된 전통문화 계승의 꿈을 이야기하는 듯하다가, 달리 보면 변화하는 시대상의 고찰 같고, 또 다른 촉수로 더듬어보면 '기생들의 노래 배틀'처럼도 보이고... 막판엔 지독스런 치정극의 양상을 드러내기도 한다. 잘라 말하지만,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넣어 끓인 해괴한 잡탕밥에 입맛을 다실 영화 관객은 이제 한국에 없다.

이런 난잡한 이야기구조와 더불어 눈에 거슬리는 건 또 있다. 유연석의 연기와 과도한 신파와 청승의 삽입이다. <해어화>는 극의 전개상 천우희와 유연석, 한효주와 유연석이 같은 화면에 잡혀 연기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하는데, 유연석의 연기는 프로의 냄새가 전혀 나지 않는다. 천우희야 원래 '무시무시하게 연기 잘 하는 배우'로 정평이 나있으니 감안한다고 치자. 유연석의 연기는 끝끝내 예쁘게만 보이려 목소리 톤까지 조절하는 한효주에도 미치지 못한다.

슬픈 장면이 비춰질 때마다 갑작스레 쏟아붓는 굵은 빗방울과 그 빗속에서 주고받는 대사에 담긴 신파와 청승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영화를 보면 다 확인할 수 있을 테니까. <해어화>가 1944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한다고, 연출의 감각까지 1944년 수준으로 떨어져서야 어떻게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겠는가.

매력적인 소재로 1940년대라는 화폭에 멋진 그림을 그리고 싶어했을 영화 <해어화>. 천우희와 한효주의 한복 맵시가 궁금한 이들은 영화관을 찾아도 좋다. 그러나, 그 외에 것은 기대하지 마시라.

 영화 <해어화>의 포스터.

영화 <해어화>의 포스터. ⓒ 영화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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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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