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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31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꼭 이 사람이다 싶었다. 같이 살고 싶었다. 결혼을 해야 했다. 통장을 보니 2500만 원이 아닌 2500원이 있었다. 빛이 보이지 않는데, 빚까지 1500만 원이 있었다. 불법 도박을 한 것도 아니고, 사업을 하다가 망한 것도 아니고, 대학교 4년을 열심히 다닌 결과로 꼬박꼬박 모은(?) 1500만 원의 빚이었다.

31살. 비정규직. 월급 70만 원. 통장잔고 2500원. 학자금대출 빚 1500만 원. 이렇게 보면 참 낙오자다. 하지만 한번 '저렇게' 봐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30세 미만 가구주의 부채는 2014년 기준으로 1,558만으로 2010년에 비해 1.8배 증가하였다.
▲ 30세 미만 가구주 부채 현황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30세 미만 가구주의 부채는 2014년 기준으로 1,558만으로 2010년에 비해 1.8배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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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우리 가정 형편은 그럴싸했다. 우리집에는 매일 나 홀로 있지 않아도 되고, 아버지는 택시 드라이버도 아니여서 전화를 걸었을 때에 양화대교였던 적은 한번도 없었다. 먹고 사는 문제로 조숙하게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그야말로 살 만했다. 그러다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아버지는 위암으로 아프기 시작했다. 그리고 초등학교 6학년 가을 낙엽들이 여름옷을 가을옷으로 바꾸어 입을 때쯤 아버지는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셨다. 그건 슬픔이었고 나와 하나 있는 남동생은 많이 울었다. 어머니와 할머니(친할머니, 어머니에게는 시어머니)도 많이 우셨지만 그 눈물의 속사정은 서로 좀 달랐다.

가을 낙엽들이 갈아입을 옷이 떨어져서 무대 뒤로 우수수 떨어지며 퇴장할 무렵에 우리집 가정 형편도 그렇게 우수수 떨어졌다. 하지만 어머니가 이를 악 물으셨기에 그 체감 온도는 치명적이진 않았다. 다만 거세 당한 망아지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을 누구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감각적으로 배우게 되었고 그렇게 사는 것이 어머니를 돕는 거라 생각했다. 중학교, 고등학교까지 그런 거세 당한 망아지 같은 삶은 나름 괜찮았다. 하지만 대학교라는 문 앞에 서서 내야 하는 통행요금은 그런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어머니 혼자 두 아들과 시어머니까지 모시면서 모질게 살아오셨다. 평생 일도 해보신 적이 없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주일도 안 되어서 새벽 6시부터 오후 8시까지 하는 일을 하시면서 말이다. 모아놓은 돈이 있을 리가 없다. 다행히 집은 남의 집이 아닌 우리집이기에 소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하듯, 집을 담보 잡고 돈을 마련해 통행요금을 내고 대학이라는 곳에 간신히 들어갔다.

하지만 어머니가 해주실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였다. 방학 때마다 틈틈히 아르바이트를 했으나 태산과 같은 등록금 앞에서 그 돈은 티끌과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은 한국장학재단에서 학자금대출을 받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다. 생각보다 쉽고 편했다. 몇 번 클릭만 하면 학비가 해결되었다. 그렇게 매 학기마다 멋모르고 그렇게 마우스질 몇 번으로 학비를 해결했다.

그리고 학교를 졸업할 무렵이 되니, 자주 한국장학재단에서 전화가 왔다. 밀린 원금과 이자를 정리하라는 얘기를 했다. 확인을 해보니 어마어마했다. 엄두가 나지 않는 액수였다. 그 후로 한국장학재단에서 오는 전화는 받지 않았다. 전화의 체감온도는 사채업자가 찾아온 것처럼 차가웠다. 막막했다. 보통은 취업 후에 어떻게든 갚으리라는 의지라도 먹지만, 내게 있어서 취업은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는 건데 그 사례비로는 빚을 빛으로 바꾸는 것만큼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빛 나는 삶을 살고 싶어서 대학교를 다니고 졸업해서 이제 빛을 내볼까 했더니, 빚 내는 삶을 살게 되었다. 자존감이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독촉 전화가 오는 날이면 그 병은 더 심해졌다. 이 빚을 처리해야지 앞이 보일 텐데, 이걸 가지고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도저히 앞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을 대할 때에도 떳떳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 중심에서 나 혼자만 이런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이 들어서였다.

빚쟁이. 찌질이. 낙오자. 수많은 낙인들이 자존감을 짓이겼다. 스스로 주홍글씨를 찍고 살아가던 나날 중에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과 결혼을 결심했을 때 내 나이 31살. 통장에 돈은 2500원. 학자금대출 빚 1500만 원. '이렇게'가 아니라 '저렇게' 보니까 어떠한가? 너희 중에 빚 없는 자만이 나에게 돌을 던져라.

2015년 청년(15~29살) 실업률 9.2%, ‘2015년 고용 동향’
 2015년 청년(15~29살) 실업률 9.2%, ‘2015년 고용 동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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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가 감히 결혼을 했다. 헬조선의 n포세대에서는 반란군과 같은 일을 저질러버린 것이다. 무척 행복하나, 때때로 학자금대출 빚을 생각하면 목이 조여왔다. 결혼 후에 지독한 가난을 겪으면서 기댈 곳도 나눌 곳도 없을 때는 더 심해졌다.

병세가 깊어졌다. 죽음을 생각하는 나날들도 꽤나 있었다. 나만 그러한 병을 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청춘운동희년본부'에서 '청년부채탕감' 프로젝트라는 것을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1차 지원자를 모집하는데 모든 조건을 쉽게 '클리어'했다. 지원해서 재무상담을 받았다. 신기한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게 '나만이 앓고 있는 병'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질병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만으로 병세는 급격히 호전되었다.

2차 상담까지를 받고, 마침내 부채탕감자로 선정되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 병은 댈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나랑은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힘쓰는 사람들을 만났다. 병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아무에게도 이 사실을 나눌 수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 이면에는 아무도 이 사실에 관심이 없을 거라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자리에 '사람'이 있었다.

빚만 내던 내 청춘에 한줄기 빛이 찾아들어왔다. 그곳에서 아무런 조건과 대가 없이 200만 원을 지원받아서 학자금대출 원금 상환을 했을 때에 기분은, 맨날 돈 받으러 문을 쾅쾅 두드리던 사채업자의 뺨에 돈다발로 세차게 귀싸대기를 날리며 '먹고 꺼져'라고 하는 기분같았다. 벅차고 기분이 좋아졌다. 학자금대출이라는 깡패를 마주치면 눈만 깔던 내가 이제는 꼬나볼수 있을 정도로 '자존감 깡패'가 되었다는 것이 기뻤다.

▲ 청년부채탕감운동의 다음 주인공을 응원해주세요 청년부채탕감운동 참가자 후기 동영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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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만원. 크게 생각하면 큰 돈이고, 작게 생각하면 작은 돈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아무런 대가 없이 그 도움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게 빚내는 내 청춘을, 빛나는 내 청춘으로 터닝포인트를 하게 하는 데 큰 힘이었다.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청춘들의 절규와 몸부림이나, 이러한 병을 고쳐주시기 위해서 발버둥 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는 속담이 생각난다. 그만큼 우리 앞에 놓여진 청년부채 문제가 너무 심각하고 터무니없이 크고 강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이러한 움직임에 '우리'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손에 손을 잡을 수만 있다면 계란으로 바위를 쳐서 박살내지는 못한다 해도, 계란으로 바위를 덮어 버리기는 가능하지 않을까? 그리고 마침내 어느날 쨍하고 해뜰날 그 바위 위에 덮은 날계란이 '계란후라이' 라는 희망으로 변모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

쨍하고 해뜰날. 계란이 바위를 질식시켜 버리는 그 날을 기대하며 빚내는 청춘들에게 손을 내밀어 주셔서 빛나게 해주시길 바라며...

지난 2015년 4월 6일 청춘희년운동본부(아래 청춘희년)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출범식을 열고 학자금 대출 장기 연체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지난 2015년 4월 6일 청춘희년운동본부(아래 청춘희년)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출범식을 열고 학자금 대출 장기 연체자를 지원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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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부채탕감, #청년, #청춘, #희년, #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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