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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4월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국 독립운동과 프랑스' 심포지엄.
 2016년 4월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한국 독립운동과 프랑스'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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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 기념 행사 중의 하나로, '한국 독립운동과 프랑스'라는 제목의 심포지엄이 지난 11일 파리 디드로 대학에서 하루 종일 열렸다.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일(국가보훈처에는 임시정부수립일이 1919년 4월 13일로 돼있지만, 4월 11일이라는 견해도 있다)이라, 이날 진행된 이 행사의 의미가 더욱 깊었다. 행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설립한 국민대학교와 독립기념관, 파리 디드로대학이 공동 주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프랑스는 깊은 관련이 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많은 강대국들이 모두 대한제국(조선)을 버렸는데 단 한 나라, 프랑스만이 조선을 버리지 않는다. 아마 프랑스가 자유, 평등, 박애라는 기치를 내걸고 압박받는 나라 편에 선다는 원칙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건 원칙적인 얘기이고, 더욱 구체적인 예가 있다.

조선 독립운동가들이 프랑스로 모여든 이유

 샤토당가 38번지의 파리의 첫 한국 대표단 사무실 건물에는 현판이 걸려져 있다.
 샤토당가 38번지의 파리의 첫 한국 대표단 사무실 건물에는 현판이 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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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살았던 장소를 표시한 파리 지도
 한국 독립운동가들이 살았던 장소를 표시한 파리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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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대한제국 때 프랑스 공사를 지낸 민영찬이 조선에 들어오려고 했으나 일본인들로 인해 조선 입국이 불가능해진다. 그는 상해 프랑스 총영사관에 신변 보호를 요청했고 프랑스 정부도 그를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많은 한인들이 상해 프랑스 조계(중국에서 외국인이 치외법권을 누리며 거주한 구역)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상해가 독립 운동의 주요 전개지가 됐다. 특히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 많은 인사들이 상해로 망명했고, 이들이 프랑스 조계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했다.

임시정부는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김규식을 비롯해 4명의 대표를 파리에 파견한다. 한인 대표단은 1919년 2월 1일 상해를 출발하여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한다.

이들은 1919년 4월 중순부터 1920년 5월까지 파리 9구에 위치한 샤토당가 38번지에 파리의 첫 대표단 사무실을 설치하고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 대한제국의 식민 현실을 알리기 시작한다. 이 사무실은 이후 8구 비비엔느가 13번지, 오스만대로 93번지로 이동하면서 <자유 대한>이라는 월간지 발간 등 여러 활동을 전개하는 거점이 된다.

이렇게 한인 대표단이 자리를 잡고 1년 후인 1920년 12월 14일, 조선 청년 21명이 상해를 거쳐 마르세이유 항에 도착한다. 대부분 3.1 운동에 참여한 이들로, 일본 군대의 체포를 피해 상해에 도착, 학업을 연장하기 위해 유럽 행을 한 자들이다.

당시 프랑스 정부는 1차 세계대전 후 일손이 부족할 때라 중국 청년들을 모으고 있었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일부 조선 청년들이 중국인들과 같이 프랑스에 오게 된 것이다.

상해에서 프랑스로 온 배에는 모두 200여 명의 중국인이 탔고 여기에 21명의 조선인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 조선인은 모두 중국 여권을 소지하고 있었고 이름도 중국식으로 변경되어 기재되어 있었다.

그중에는 이용제(관련기사: 1920년, 프랑스로 떠난 식민지 청년 21명 있었다), 한수룡, 정석해, 이정섭 등이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에 도착한 조선 청년 중 7, 8명은 즉시 독일로 떠나고, 남은 자들은 한인 대표단의 도움으로 그럭저럭 낯선 프랑스 생활을 열게 된다.

1921년 4월 21일 파리의 한인대표단을 통해 '한국 친우회'가 결성된다. 펠리시엥 샬레 (Félicien Challaye)와 중국계 프랑스인인 사회운동가 시동파(Scie Ton Sa)가 중심이 되어 결성됐다. 이 친우회의 창립 총회는 파리 7구 라스가즈가 5번지에 위치한 사회박물관에서 열렸다. 이 협회의 멤버들은 대부분 조선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프랑스 지식인들이었다.

프랑스 지식인들, 대한제국 독립을 돕다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사회박물관.
 지금도 건재하고 있는 사회박물관. 이 곳 강당에서 1921년 4월 21일 '한국친우회' 창립 총회가 결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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샬레는 고등학교 철학교사로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반식민주의자,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처음 일본 방문 시 일본 문화의 정교함에 심취했으나, 3.1 운동 당시인 1919년 3~4월에 조선을 방문해 조선 편에 서게 된다.

조선인들이 일본 경찰과 군인에게 야만적으로 탄압받는 것을 본 이후였다. 그는 프랑스의 각종 인권 단체에서 일본에 의해 탄압을 받는 조선인을 옹호하는 발표를 했다.

독립 운동가 최린이 1927년 브뤼셀에서 열린 피압박민족 대회 참가 차 파리에 들렀을 때 찾아간 자가 샬레였고, 당시 파리에 체류하고 있던 나혜석을 동반했다. 샬레는 나혜석이 프랑스 집에 머물고 싶어 하는 의사를 밝히자 서슴없이 자기 집에 머물게 했다.

나혜석은 르 베지네에 있는 샬레 집에서 3개월(혹은 6개월, 자료에 따라 다름)간 머물렀다. 이 방문을 계기로 후에 최린과 나혜석은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다.(관련기사: 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

1921년 7월, 파리위원부(임시정부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할 목적으로 프랑스 파리에 설치한 외교부서)의 외교활동이 중단된 이후 1929년 서영해가 '고려통신사'를 설립하면서 중단된 대유럽 외교에 활기를 찾게 된다. 서영해는 유럽 최초의 한국인 유학생으로,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수재였다. 그는 탁월한 언어감각으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그는 1929년에 <어느 한국인의 삶과 주변>(Autour d'une vie corénne)이라는 일종의 역사 소설을 불어로 집필, 편찬했다. 1934년에는 민담 번역집인 <거울, 불행의 근원>(Miroir, cause de malheur! Et autres contes coréens)을 편찬하여 한국의 민담을 프랑스에 알리는 역할도 했다.

서영해는 이승만과 가까운 사이였으나 정치적으로는 김구를 더 추종했다. 1949년 김구의 암살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그는 프랑스 행을 결정하고 10월 서울을 떠나 프랑스로 가기 위해 상해에 도착했다. 하지만 부인의 여권을 기다리는 사이, 장개석 정권이 무너지면서 상해가 공산화되자 이곳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은 모두 억류 상태가 된다.

이들은 결국 1949년 11월 정부 차원의 막후 협상 끝에 한국 행을 하게 되지만, 당시 중국 여권을 갖고 있었던 서영해는 중국인으로 간주돼 귀국 배에 타지 못하는 처지가 된다. 혼자 고국으로 돌아온 부인은 40년 동안 남편을 기다리다가, 1989년 세상을 하직할 때 남편의 책과 저서 등을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했다. (2005.4.19일자 <경향신문> "기자, 외교관으로 유럽서 독립호소 서영해 파리 대사의 외교투쟁' 참조)

서영해의 이후 행적은 확실치 않다. 중국 병사설도 있고 프랑스행 소문도 있고 월북 설도 있다. 연세대 교수였던 정석해의 자서전에 의하면 "한 프랑스인이 평양에 갔다가 프랑스인보다 불어를 잘하는 이가 있더라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가 서영해가 아닐까 한다"라고 적었다. 하지만 그의 월북설도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1995년 대한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 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

서영해는 프랑스 체류 시 오스트리아 여학생과 결혼했지만 아내가 임신한 사실도 모른 채 혼자서 1939년 12월 한국에 귀국했다. 혼자 남은 아내는 아들을 낳았고 중국남자와 재혼했다. 그 아들은 다시 두 딸을 두었다.

그 중에 막내딸인 스테파니 왕이 이번 파리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한국 말을 못하는 그녀는 서영해가 자기 할머니와 신혼살림을 차린 파리 5구 말브랑슈거리 7번지에 위치한 현 상리스 호텔을 방문하면서 말로만 들었던 할아버지의 파리 행적에 많은 감동을 받은 듯했다.

 파리에 초대된 독립운동가의 손녀들.
 서영해가 장기 체류했던 상리스 호텔 앞에 모인 독립운동가의 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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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외에 파리위원부 위원장 김규식의 손녀, 조소앙의 손녀 등 5명의 독립운동가 손녀들이 초청되었다. 다음 날인 12일 오전에는 독립운동가들이 살던 장소를 찾아가는 답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번 행사를 주관한 독립기념관 측은 파리에 한국 독립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어서 조만간 유럽을 무대로 했던 한국 독립운동가의 발자취를 한 곳에 볼 수 있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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