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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가 수용소장 숙소에서 맡았던 여성 체취는 헛것이 아니었다. 관찰자 K 눈에 포착된 것은 일주일에 한 번 금요일 늦은 밤에 찾아오는 남자 1명, 여자 1명이다. 오후 10시 수감자들 취침 점호가 끝난 다음 10시 30분 언저리 시간이다. 은밀하게 SUV 승용차가 소장 숙소 주차장으로 미끄러져 들어온다.

그리고 노출이 제법 심한 옷차림 여성 1명이 운전해온 남자에 이끌려 숙소로 안내된다. 그런 다음 한 5분 뒤 남자는 숙소에서 나와 담배 한 개비 피운 뒤 차 안으로 들어가 대기한다. 한 시간 남짓 시간이 지나면, 여성은 숙소에서 빠져 나온다. 옷매무새를 다듬고는 차에 탄다. 그 승용차는 처음에 왔듯이 소리 없이 은밀하게 어둠속으로 뱀처럼 사라진다.

이처럼 실감나게 현장을 묘사할 수 있는 것은 소장 덕택이다. 소장 배려로 날마다 반복되는 노역에서 열외 됐다. 더욱이 가끔 책 수백 권 있는 수용소 도서관에서 하루 종일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당연히 무의미한 노동에서 오는 단잠은 더욱 사라졌다. 밤에 뜬눈으로 화제를 바꿔가며 엉뚱한 상상에 빠지기 일쑤다. 그러니 K 신경은 곧추섰고, 감각은 민감한 레이더가 됐다. 모두 잠든 밤, 온갖 사물의 움직임에 대해 반응했을 뿐 아니라 간여하고 싶어진 것이다.

토요일 밤은 삼엄한 중범죄자 수용소도 느슨하다. 분위기도 그렇지만 간수, 수감자 할 것 없이 사람들 자체도 반복이라는 학습에 의해 토요일 오후는 으레 긴장을 놓아버린다. 저녁을 먹은 다음 뚜렷하게 할 일이 없는 K는 2층 침상 위칸에서 뒹굴대고 있다. 그러나 이곳저곳 눈을 부라리는 CCTV를 통해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은 엄연하다. K가 머무는 수용소 B동 스피커를 통해 K가 호명된다.

"지금 수감자 '199'는 B동 앞으로 나와 대기하라! 즉시 실행!"

만사가 귀찮은 듯 K는 느릿느릿 몸을 움직여 B동 앞에서 차렷차세를 한다. 군대도 대충 다녀온 K가 놀랍게도 수용소에서 군인보다 더 '각이 잡혀' 간다. 그렇게 사람이라는 존재는 어떤 환경에서 일정 기간 그곳 방법으로 살아갈 때, 원래 자신과 다른 또 하나 자신으로 옮아간다. 순응이든, 순치든 그게 대부분 사람들 삶이다. 안타깝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현실이 싫다면, 바꾸면 된다. 하지만 이곳은 그 바꿈이라는 것은 바로 생명을 내려놓는다는 의미 밖에 없는 곳이다.

그래서 1973년 영화 <빠삐용(Papillon)>에서 살인죄를 뒤집어쓴 앙리 샤리엘(스티브 맥퀸)은 목숨을 걸고 끊임없이 탈출하려 했다. 가슴에 나비 문신이 새겨져, 앙리라는 이름보다 '빠삐용'이라는 이름으로 불린 샤리엘. 그는 독방에서 2년, 다시 잡혀서 또 독방에 5년 동안 갇혔다. 그러나 죽을지도 모르는 절벽에서 거친 바다로 또다시 뛰어내려 결국 자유인이 된다. 빠삐용은 지독한 감옥이라는, 자신이 죄도 없이 갇혀야 한다는 억울한 현실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자신 생명을 담보로 온몸을 던졌고, 그 대가로 자유를 얻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K는 심약하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 앙리 샤리엘은 탈출하려다 잡혀서 독방에서 무려 7여년을 고생한다. 하지만 자신의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로 결국 목숨을 건 탈출이 다시 이어지고 수십미터 절벽에서 바다를 향해 몸을 던져 자유를 얻는다.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 앙리 샤리엘은 탈출하려다 잡혀서 독방에서 무려 7여년을 고생한다. 하지만 자신의 현실을 바꾸려는 의지로 결국 목숨을 건 탈출이 다시 이어지고 수십미터 절벽에서 바다를 향해 몸을 던져 자유를 얻는다.
ⓒ 영화 <빠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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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K가 '199'로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K가 입소하는 날, 이미 이 번호로 등록된 다른 사람 '199'가 죽었다. 그것도 탈출하려 철조망에 손을 댔다가 고압 전선에 흐르는 전기에 온몸이 새카맣게 그을려 숨지고 말았다. 그렇게 불행했던 '199'라는 인식표가 새로 온 K 왼쪽 가슴에 붙여졌다.

인생은 번호다. 하지만 K는 번호나 숫자를 싫어한다. 태어나면서 결정되는 생년월일, 나이, 주민등록번호, 학년, 등급, 돈, 액수, 확률, 경우의 수, 퍼센트, 방 번호, 각종 비밀번호, 버스노선, 주소, 우편번호, 전화번호, 로또번호, 경제지수... 셀 수 없이 많은 번호와 숫자가 우리 생활을 지배한다. 편의나 가치를 줄 수도 있지만, 인간 자체를 도구나 수단, 액수나 단위로 정의한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K는 새로 번호를 두 개 받았다. 동북수용소 '1901', 이곳 '199'가 그것이다. 그의 이름이 사라진 지 석 달 째다. 이젠 단지 '199'가 K의 새 이름이다. 대기하고 있던 '199'는 예상대로 소장 숙소로 향한다.

"앉아."

벌써 낯빛이 붉다. 여전히 레미 마르땡이다. K에게도 잔을 권한다.

"당신, 꽤나 대단한 사람인가 봐?"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달콤하게 묵직한 브랜디 향을 음미하던 K가 되묻는다.

"나한테 크나큰 '딜(deal)'이 들어왔어."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K는 잠자코 있다. 소장 말만 이어진다.

"당신, 영화 <대부> 봤나? 말론 브란도가 돈 콜레오네로 나오는."
"네. 봤습니다."

다짜고짜 영화 얘기를 꺼내는 소장의 속내를 모르겠다.

"거기서 나오는 대사 중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게 있지. 돈 콜레오네가 하는 얘기지. 그게 무슨 뜻인 줄 아나?"

이 대목에서 소장은 야금야금 아껴 마시던 브랜디를 단번에 목에 들이 붓는다. 무언가 작심한 사람처럼.

"..."

말없이 듣고만 있던 K는 순간적으로 불안하다.

"빌어먹을!"

소장은 브랜디 잔을 바닥에 던진다.

"미안하네. 내가 좀 과했네."

소장 혼잣말은 이어진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 내게 들어왔어. 하지만 나는 아직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지 않고. 그렇다고 이 제안을 거부하면, 어떤 결과가 오는지 아나?"

영화 <대부>에서 돈 콜레오레(말론 브란도)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뜻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경고인 동시에 그만한 보상을 하겠다는 제의다.
 영화 <대부>에서 돈 콜레오레(말론 브란도)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명대사를 남긴다.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이라는 뜻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는 경고인 동시에 그만한 보상을 하겠다는 제의다.
ⓒ 영화 <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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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알아들었다. 제안을 거부할 경우에는 죽음 밖에 없다는 경고였다. 그러나 그것이 자신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어떤 내용의 제안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석 달 째 사회와 격리된 곳에서 이유 없이 갇혀 있는 K가 아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그렇다면 그 제안에 따르는 달달한 보상도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장은 K를 불렀다. 그리고 K가 도대체 어떤 인물이기에 상식적이지 않은 제안을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 떠보려는 속내였다. 그러나 소장이 기대하는 얘기가 나오지 않자 제풀에 화를 내고 술잔을 내던진 것이다.

"당신 덕분에 잘 하면 미국 구경하게 될지도 모르겠네. 마사코와 함께."

마사코라니. 순간적으로 매주 금요일 밤 찾아오는 여인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작가적인 육감이랄까, 섬광처럼 그 얘기 '콘티'가 그려진다.

"왜 고위층들이 당신을 감싸고도는 것일까? 당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고 잡아떼기만 하고. 하기는 이젠 관계없어. 나도 이 생활 지겨워졌어. 접을 때도 된 거지. 미련 없이. 속 시원하게."

소장은 소파에 몸을 던진다. 마지막 '원 샷'에 혀가 꼬이면서 크게 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 소장을 바라보는 K에게는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해 할 수밖에 없는 게 전부였다.


태그:#영화 빠삐용, #영화 대부, #스티브 맥퀸, #말론 브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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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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