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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3 총선을 이틀 앞두고 11일 국회에서 제20대 국회의원들에게 지급할 배지가 공개되고 있다.
▲ 주인 기다리는 배지 4.13 총선을 이틀 앞두고 11일 국회에서 제20대 국회의원들에게 지급할 배지가 공개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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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자니까,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20~30대 청년층의 투표율이 예년과는 달리 높을 거라고들 한다. '금수저'와 '흙수저'의 논쟁이 뜨거운 데다, 대학 졸업이 곧 실업인 시대에서 각성한 청년들의 자구책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지만, 투표 결과를 쉬이 예단하기는 어렵다. 고령화 사회에서 어느덧 소수가 된 청년들의 힘이 얼마나 발휘될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다.

'알바'와 함께 대학생활을 보내고, 백수 혹은 비정규직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대다수 청년들에게 투표는 어쩌면 거추장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임시 공휴일인 선거일에 정식 근무를 하는 직장이 태반인 데다, 알바를 하는 처지에선 투표장에 가는 한 시간이 수당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솔직히 선거의 '효용'이 6030원짜리 최저 시급보다 못한 건 비단 청년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누가 당선되든 나와 무슨 상관이냐'며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에게 아파트 우편함마다 꽂혀있는 두툼한 선거공보 책자는 예산 낭비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개봉조차 안 된 선거공보 우편물들이 아파트 폐지함에 버려져 있고, 후보자들이 뿌려댄 명함은 요즘 길바닥을 더럽히는 가장 흔한 '쓰레기'가 됐다. 우리 사회의 정치 불신이 위험한 수준까지 왔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정치 냉소주의 꾸짖기 전에...

한 학생이 밤 늦은 시각까지 학교에 남아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모습.
 한 학생이 밤 늦은 시각까지 학교에 남아 야간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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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것만으로 우리 사회의 정치적 냉소주의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한 듯싶다. 일부에선 철학자 장자크 루소의 "투표하는 날 하루만 주인일 뿐, 투표가 끝나면 다시 노예로 돌아간다"는 일갈을 빌려 유권자들의 행태를 조롱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릴 적부터 그들의 정치의식을 키워주는 교육에 우리 사회가 소홀했다는 반성이 먼저 아닐까. 과연 우리 학교에 '정치 교육'이란 게 있기는 한가.

우리 사회의 불문율 하나. 연인이나 친구 사이에는 절대 꺼내서는 안 될 대화 소재가 있다. 하나는 종교고, 다른 하나는 정치다. 일단 시작되면 필연적으로 다투게 되고, 결국엔 관계에 치명적인 금이 가기 일쑤다. 하긴 정치적 입장이 비슷하거나 종교가 같지 않으면 애초 연인과 친구가 될 수조차 없다고 말한다. 미팅 가서 서로 통성명하기도 전에 맨 먼저 묻는 게 종교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학교에 근무한 지 얼추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고백하건대 종교는 말할 것도 없고, 동료 교사들과 정치적 성향에 대해서조차 터놓고 이야기 나눠본 기억이 거의 없다. 정당 가입이 불가능하고 정치적 중립이 왜곡되어 강조되다 보니, 교사들이 정치라는 말에 철저히 주눅이 들어있다고 보는 게 타당할 것 같다. 몇 해 전, 월 1만 원씩 민주노동당에 기부해온 교사들이 법적 분쟁에 휘말리는 걸 보고 나서는 아예 정치적 논쟁조차 금기시하는 분위기다.

사실 정치적 중립이란 정치권력이 교육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취지인데, 거꾸로 교사들은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식으로 곡해되고 있는 실정이다. 국민들 다수도 이러한 잘못된 편견에 길들여져 교육으로부터 정치를 철저히 분리하려 든다. 교사들더러 정치에는 무관심한 채 오로지 교육만 하라는 건데, 이런 상황에서 정치 교육은 영원히 실현 불가능한 영역이 된다. 정치는 기껏 수능 사회탐구영역의 교과목일 뿐이다.

교사들이 이럴진대, 그들에게 배우는 아이들이야 오죽할까. 요즘 아이들의 대화에는 아예 정치가 끼어들 자리가 없다. 혹 누군가 정치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곧장 또래들 사이에서 '진지충'으로 배척당한다. 정치에 관심을 보이는 아이는 그들의 부모나 교사들에게도 그다지 환영받지 못한다. 기성세대들의 한결같은 반응은 "쓸 데 없는 데 신경 쓰지 말고, 그 시간에 공부나 해라"다. 정치는 시나브로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것'으로 각인된다.

어른들의 '바람'대로, 아이들은 이번 국회의원 선거에 대해 철저히 무관심했다. 자기 동네에 누가 출마했는지조차 제대로 답하는 아이가 거의 없었다. 그나마 등굣길 길거리마다 어수선하게 내걸린 현수막의 글귀가 그들이 알고 있는 내용의 전부였다. 다들 주중에 하루 쉴 수 있다는 점에 고마워할 뿐, '누가 당선되든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인식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교실에서 '모의 선거' 해봤더니

제20대 총선 선거공보물들.
 제20대 총선 선거공보물들.
ⓒ 성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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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시간 자투리 시간을 할애해 교과서 없이 '정치 교육'을 해보기로 했다. 아이들에게 우리 동네 후보자들의 약력과 정당별 공약의 내용을 들려주며, 미래의 유권자로서 후보자와 정당을 선택하도록 했다. 사실 버려진 선거공보 책자를 한 부 가져와 적혀 있는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편집한 것일 뿐인데, 아이들은 제법 흥미로워했다. 선거에 매번 시큰둥하게 반응하는 부모님께 알려주어야겠다는 경우도 있었다.

선거철 자칫 오해를 사게 될까봐, 후보자와 정당의 이름은 지우고 제시한 대표 공약들을 정당 기호와 상관없이 뒤섞어 놓았다. 이번 선거에 참여한 21개 정당 중에 원내 정당 6곳과 꾸준히 활동을 하고 있는 원외 정당 몇 곳의 공약을 그러모았는데, 한 문장으로 된 제목만 뽑아도 A4 용지로 넉 장을 훌쩍 넘었다. 일찌감치 아이들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법'이라며 키득거렸다.

"선생님, 더도 말고 이 공약들 중 1/3만 실현된다고 해도 대한민국은 남부럽지 않은 선진국이 될 것 같아요. 이렇듯 잘 아는 정치인들이 즐비한데, 우리는 왜 아직 이 모양일까요?"

'공약(公約)'이 대개 '공약(空約)'으로 끝난다는 건 아이들도 모르지 않는다. '선거용 멘트'에 너무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며 '어른스럽게' 말하는 아이도 있었다. 우선, '공정사회를 구현하겠다'거나 '가계 부담을 낮추겠다'는 등의 공약은 하나마나한 이야기라며 조롱했고, '어르신 빈곤 제로 시대를 열겠다'거나 '한국형 복지국가를 만들겠다'는 등의 추상적이고 모호한 공약은 유권자들을 현혹하는 짓이라고 못박았다.

공약에 대한 총체적인 불신은 지금껏 해오던 대로 투표하는 '관행'을 공고히 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럴 바에야 "공약 같은 건 읽어볼 필요가 없지 않냐"며, 학교생활기록부나 논문 표절을 감식하는 프로그램을 선거철 공약집에도 적용해야 한다는 독창적인 의견도 냈다. 언론 등이 각 정당별 공약을 알기 쉽도록 요점 정리해주고, 선거 후에는 공약의 이행 정도를 정기적으로 모니터링 해주어야 한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전혀 내색하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은 어떤 게 몸집 큰 다수당의 공약이고 어떤 게 소수당의 것인지 귀신같이 알아냈다. '부자 몸조심'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며, 특히 집권당일수록 두루뭉술한 공약으로 논쟁과 분란을 피하고자 할 것이라는 나름 설득력 있는 분석까지 덧붙였다. 여야가 뒤바뀌는 경우는 있었어도, 다수당과 소수당의 공약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었다.

아이들 마음 사로잡은 건 소수정당

아이들은 대체로 소수당이 제시한 공약들을 선호했다. 추상적이지 않은 '깨알 공약'에 후한 점수를 준 셈인데, 학습노동에 찌들어 있는 현실을 반영한 게 우선이었지만 '농민 수당'이나 '탈핵', '동물권 보장'처럼 다소 의외의 것들도 눈에 띄었다. 물론, 소수당의 공약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아이들의 선택에는 '불가능하겠지만'이라는 전제 조건이 줄곧 따라 붙었다.

압도적인 지지를 받은 건, 예상대로, '사교육 전면 금지'였다. 여야 모두 대표 공약으로 내놓은 '사교육비 대폭 경감'은 부모님들의 지지는 얻을지 몰라도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최소 12년간의 학창 시절 동안 1년 365일 학교와 학원, 독서실을 전전해야 하는 아이들에게는 체념 섞인 바람일지라도 절박한 문제다. '사교육 전면 금지'에다 '야간자율학습 금지'만 더해진다면, 적어도 지금 고등학생 아이들에게 몰표는 떼어 놓은 당상이 될 것이다.

'최저 시급 1만 원'과 '매월 기본소득 지급' 공약도 주목을 받았다. 주말이나 방학 중 '알바'가 이미 익숙한 일상이 된 아이들에게 임금과 소득의 문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모든 국민에 매월 30만 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지금은 비록 허황된 것일지라도, 충분히 고민해볼 만한 사안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로 동의했다. 많은 아이들이 '등록금 백만 원 상한제' 공약에도 큰 관심을 보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가 하면 '청년 국회의원 할당제'와 '선거권 18세 인하'를 최고의 공약으로 꼽은 아이도 있었다. 다른 공약들은 적어도 자신들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을 뿐만 아니라, 사뭇 시혜적인 내용이라 효과도 의심스럽다고 말했다. 그는 일부 교육청에서 시행 중인 '학생인권조례'를 예로 들면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요구하고 주체적으로 참여해 만든 규정이 아니면 학교 현장에서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강조했다.

아이들 말마따나 제목만 A4 용지 넉 장에 가득한 공약들 중 10대 아이들과 관련된 건 사실상 전무하다. 이번 한 시간짜리 '정치 교육' 나름의 수확이라면 이것이다. 한 아이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선거권이 없는 이들에겐 국물도 없다"는 걸 아이들에게 확실히 인식시켜주었다는 점이다. 한 아이는 수업을 총평하듯 심드렁하게 말을 이었다. 선거와 공약에 대한 아이들의 냉소는 여전히 굳건했다.

"학생으로서 우리들의 삶을 사실상 좌지우지하는 교육감조차 제 손으로 뽑지 못하는 판에, 국회의원 선거는 무슨 얼어 죽을…"


태그:#제20대 국회의원 선거, #선거공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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