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달수 주연의 영화 <대배우> 포스터.

오달수 주연의 영화 <대배우> 포스터. ⓒ 대명문화공장


세상에는 '돈 버는' 것과는 거리가 먼 직업들이 있다. 연극배우가 그렇고, 무명가수가 그렇고, 시인이 그렇다. 주위에 연극배우는 없지만 노래하는 것이나 시를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아 '지독하도록 가난하게' 사는 이들이 몇 명 있다.

그중 하나가 선술집 싸구려 독주에 만취해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어이, 사내란 말이야. 아내가 생기면 세상에 머리를 숙이고, 자식이 생기면 제 윗사람에게 무릎을 꿇게 돼. 근데, 고개 숙이거나 무릎 꿇는 게 죽기보다 싫으니 어쩌지. 내 가난은 운명인 거야?"

이상스레 숙연했던 그날의 술자리. 돌아보니 적지 않은 이들의 삶이 그랬다. 자존심을 지키는 일은 '세상 속에 안정적으로 정착하기'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젊은 시절엔 그걸 모른다. 그러나, 흘러가는 세월은 이 불합리하지만 엄연한 '삶의 진실'을 회초리 휘두르며 맵게 가르친다.

여기 20년째 서울 대학로 연극판에서 '정통 연극'을 해온 한 사내가 있다. 장성필(오달수 분). 장모에게조차 무시당하는 가난한 연극쟁이의 삶을 접고, 화려한 조명 아래서 으스대는 인기 영화배우가 되고 싶다. 온갖 비굴한 방식으로 이런저런 과거 인연까지 끌어들여 20년째 충무로에서 '정통 영화 연출'을 해온 감독 깐느 박(이경영 분) 앞에서 오디션을 보게 되는 장성필.

한때 장성필과 다름없던 가난한 연극배우에서 악랄한 방법(?)을 동원해 스포트라이트 쏟아지는 영화판으로 화려하게 옮겨간 설강식(윤제문 분)은 자신의 지난날이 생각났는지 연극판 후배였던 장성필을 돕는다. 가진 건 자존심뿐, 돈 한 푼 없는 '연극배우'에서 돈푼깨나 만지는 '세속적인 영화배우'가 되려는 자의 꿈은 과연 이뤄질 수 있을까?

매너리즘

 영화 <대배우>의 한 장면.

영화 <대배우>의 한 장면. ⓒ 대명문화공장


'만년 조연'으로 연기 인생을 끝낼 것 같았던 배우 오달수가 주연을 맡은 이 작품은 한국영화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잘 생기고, 관객동원력이 검증된 배우가 아닌, 연기력 하나만으로 한약방 감초 역할을 해온 배우에게 '영화의 흥행'이라는 자본주의적 과제를 온전히 맡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도는 성공보다는 실패에 가깝다. 역할이 주는 무게가 생경해서일까. 오달수는 그간 출연한 영화에서 조연을 맡았을 때 이상의 에너지를 <대배우>에서 보여주지 못했고, 하모니를 이뤄야 하는 윤제문의 연기도 맥이 빠지고 싱겁다.

다양한 표정 변화와 능청스러움으로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던 윤제문은 자신의 연기가 지루한 패턴으로 답습되고 있다는 걸 스스로도 모르는 듯하다. 여기에 "개봉되는 한국 영화 절반에 출연한다"는 우스개를 듣는 이경영의 연기는 또 어떤가. 식상함을 넘어 캐릭터 설정 자체가 덜 익어 버석거리는 고구마 같다. '오래된 배우=좋은 배우'라는 등식이 항상 옳지는 않다. 매너리즘은 무서운 것이다.

이 영화, 저 영화에서 매번 보아오던 허술한 캐릭터 설정과 작품의 주요 축을 떠멘 배우들의 고만고만한 연기만으로 관객을 감동시킬 수는 없다. 영화 <대배우>의 실패 요인이 시나리오의 허술함에서 오는 것인지, 혹은 석민우 감독의 미숙한 연출력에서 오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분명하다. <대배우>는 너무나 빤한 연기에, 한없이 평이하고 지루한 이야기구조가 사람들의 하품을 부른다는 것.

아내 역의 진경, 아들 역의 고우림은 발군의 연기력

 <대배우>에서 장성필의 아내 역할을 맡아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 진경(좌)과 아들 역을 훌륭히 소화한 고우림(우).

<대배우>에서 장성필의 아내 역할을 맡아 빼어난 연기를 보여준 진경(좌)과 아들 역을 훌륭히 소화한 고우림(우). ⓒ 대명문화공장


사실 <대배우>는 50~60분짜리 TV 단막드라마로 만들어졌다면 오히려 좋았을 것이다. 영화의 주제의식이 주는 무게와 연출의 집중력, 배우들의 연기가 100분이 넘는 작품으로는 실격을 넘어 조소를 부르는 수준이기에.

그럼에도 <대배우>에 미덕이 하나도 없는 건 아니다. 좌초 직전의 군함 같은 이 영화를 구하는 건 지휘관이라 할 오달수, 윤제문, 이경영이 아니다. 영화라는 거대한 배에 올라 자신의 몫을 다한 장성필의 아내 진경과 아들 역의 고우림. 이 둘은 무능한 지휘관을 넘어서는 열정적 사병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가난을 운명처럼 제 등에 지고 사는 연극배우 남편을 향한 진경의 눈빛과 따스한 배려의 말들, 아들 역 고우림 역시 아이답지 않은 진중함과 때 묻지 않은 연기력을 보여준다. 이들의 열연은 영화의 제목 '대배우'에 부끄럽지 않다.

대배우 오달수 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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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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