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제규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날마다 해야 하는 보충수업과 야자, 두 달 반 동안 고민한 제규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정규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하고 싶다고요.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식구들 저녁밥을 짓는 제규는 지금 2학년입니다. 이 글은 입시공부 바깥에서 삶을 찾아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 기자말

사람의 뒷모습에도 표정이 있다. 웃는지, 화내는지, 우는지, 멍 때리는지 보인다. 가까운 사람끼리는 금방 눈치챌 수밖에 없다. 3월 28일 월요일, 나는 밥 하는 제규의 뒷모습을 보고 있었다. 화를 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제규가 서 있는 곳은 자신의 수련장인 부엌. 감정을 꾹꾹 억누르고 있는 게 느껴졌다.

과일 샐러드. 제규는 탕수육이랑 같이 먹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과일 샐러드. 제규는 탕수육이랑 같이 먹기 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그날의 메뉴는 쇠고기 탕수육. 같이 차릴 음식은 과일 샐러드. 제규는 먼저 파인애플 과육을 파냈다. 딸기랑 바나나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랐다. 파인애플즙과 레몬즙을 섞어서 과일 샐러드에 곁들였다. 다 만든 샐러드는 식탁 위에 올려놨다. 이제 탕수육을 만들 차례. 밀가루가 부족한 것 같았다. 제규는 집 앞 마트로 달려갔다.

"이거, 파인애플 먹어도 돼?"

제규가 해준 간식을 수시로 먹는 꽃차남과 시후(꽃차남 친구, 우리 집 위층에 산다)가 내게 물었다. 그날의 메뉴를 모르는 나는 "먹어도 되지"라고 했다. '초딩' 1학년들은 음식을 눈으로 먼저 평가한다. 아이들에게 "맛없어 보여"라고 '찍힌' 음식은 내 차지가 된다. 그날은 아이들의 먹는 자세가 적극적이었다. 나는 재빨리 꽃차남과 시후 사진을 찍었다.

과일 샐러드를 먹는 꽃차남과 시후. 우리는 간식인 줄 알고 먹었다. 탕수육이랑 같이 먹으려고 만들어놓은 줄은 정말 몰랐다.ㅠㅠ
 과일 샐러드를 먹는 꽃차남과 시후. 우리는 간식인 줄 알고 먹었다. 탕수육이랑 같이 먹으려고 만들어놓은 줄은 정말 몰랐다.ㅠㅠ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마트에 다녀온 제규는 망연자실에 어이상실. 소리칠 기운마저 없는지 "누가 먹으라고 했냐고?" 읊조리듯 말했다. 꽃차남과 시후는 눈치를 보지 않았다. 저희들끼리 싸움놀이를 하면서 "어차피 형이 우리 먹으라고 요리한 거잖아"라며 불난 제규 마음에 부채질을 했다. 제규는 끓는 물에 식초, 간장, 굴 소스, 전분, 야채를 넣어서 탕수육 소스를 만들었다. 다 만든 쇠고기 탕수육도 밥상에 올렸다. 쾅!

밤바람은 차다. 제규는 점퍼도 입지 않고서 집을 나갔다. 현관문도 역시 세게 닫았다. 나는 휴대전화까지 두고 간 제규한테 온 신경이 쏠렸다. 탕수육이 식어서 맛없어지는 건 제규가 바라는 게 아닐 거다. 그래서 시후와 꽃차남한테 밥을 먹였다. 시후는 탕수육에 소스 찍어먹는 게 맛있다고 했고, 꽃차남은 탕수육 그대로 먹었다.       

"진짜 말이 안 나왔어요. 과일 샐러드는 탕수육이랑 같이 상에 올리려고 만든 거예요. 뭔가 중국풍이 나잖아요. 애들이 그걸 먼저 먹어버린 거야. 힘이 빠져서 밥 차려놓고 그냥 나왔어요. 걷다보니까 엄마랑 이모랑 같이 간 식당 앞이더라고요. 걸으면서 화가 풀렸는데 식당에서 밥 먹는 손님들 보니까 집에 오고 싶었어요."    

제규가 없는 밤. 나는 제규 친구 수민이와 주형이한테 전화를 걸었다. 평일이니까 당연히 안 만났다고 했다. 초조한 나는 남편한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남편은 "앞으로는 무조건 물어보고 먹어"라고 했다. 제규는 1시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동생들이 먼저 샐러드 먹은 것 때문에 그렇게 화가 난 건 아니라고 했다.

우리 집은 요즘 '모자 가족'. 남편이 없다. 출퇴근이 따로 없는 일을 하는 그는 바쁘다. 요새는 무척 바쁘다. 새벽에 들어와서 아침에 나간다. 제규가 요리를 하기 전에는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반찬하고 국을 끓였다. 이제는 몇 시간이라도 자고 나간다. 남편이 걸려하는 건 하나, 청소. 일요일마다 남편이 하던 대청소를 제규가 알아서 했다. 지난 일요일에.

"밥은 내가 좋아서 하는 거지만 청소는 아빠 바쁘니까 내가 대신한 거예요. 아빠처럼 식탁 의자도 다 올리고 쓸고 닦았어요. 근데 엄마는 동생 울렸다고 성질만 냈잖아요. 나는 뭐 하지도 않았는데 걔가 그냥 짜증내고 운 거라고요. 나는 그게 너무 서러웠어요. 엄마가 나한테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잖아요. 이런 아들이 어디 있어요?"

제규는 끓는 물에 식초, 간장, 굴 소스, 전분, 야채를 넣어서 탕수육 소스를 만들었단다.
▲ 탕수육 소스 제규는 끓는 물에 식초, 간장, 굴 소스, 전분, 야채를 넣어서 탕수육 소스를 만들었단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나는 미안하다고 싹싹 빌었다. 마음이 풀린 제규는 남은 탕수육을 먹었다. 처음 하는 거라서 튀김옷을 잘 못 입혔다는 평가를 했다. 그래도 맛은 괜찮다면서 나보고도 어땠느냐고 물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튀김옷이 제대로 안 입혀진 탕수육은 쇠고기 육질이 그대로 보였다. 안 먹었다. 더구나 아들이 집 나갔는데 술술 넘어갈 리도 없고.    

다음날 저녁에도 탕수육. 튀김옷이 바삭거려도 나는 탕수육에 손이 잘 안 갔다. 근사한 '육식인' 아들을 낳았지만 나는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 제규 눈치를 보면서 소스 속에 들어있는 채소만 건져 먹었다. 탕수육을 계속 해보고 싶은 제규는 방법을 바꿨다. 이튿날에는 고기 탕수육에 버섯 탕수육을 추가했다.   

"제규야, 고마워. 엄마가 버섯 탕수육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다 알지. 우리가 자주 가던 식당에서 엄마가 항상 맛있게 먹었잖아요."
"고마워. 근데 엄마는 '찍먹'(소스를 찍어서 먹는)이야. 유느님(유재석)도 '찍먹'이고. 그러니까 소스 미리 붓지마. 부탁~."

제규는 고기로 만든 탕수육을 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잘 먹지 않았다. 그래서 버섯 탕수육을 했다. 맛있다. 그러나 나는 '찍먹'. 제규야, 다음에는 소스는 그대로 둬.
▲ 엄마는 유느님처럼 '찍먹'이란다. 제규는 고기로 만든 탕수육을 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나는 잘 먹지 않았다. 그래서 버섯 탕수육을 했다. 맛있다. 그러나 나는 '찍먹'. 제규야, 다음에는 소스는 그대로 둬.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일주일에 탕수육 네 번을 먹고 토요일 밤이 됐다. 벚꽃을 보러 하동 쌍계사에 갔다 온 나는 피곤했다. 얼마 전까지 나는 제규에게 "들어가 자"라고 애원했다. 제규는 버티고, 내 목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러나 반에서 가장 작던 제규는 고1 겨울방학 때 170cm가 됐다. 남편과 나는 '하이파이브'를 하며 기뻐했다. 그 뒤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라는 토요일 밤 잔소리는 끊은 줄 알았는데….

"제규야, 내일 일찍 일어날 수 있겠어? 아빠가 오랜만에 우리랑 같이 아침밥 먹을 수 있대. 8시 반쯤에는 상 차려야 해."
"(약 3분간 침묵) 일어나 볼게요. 탕수육 해야겠다. 아빠는 아직 안 먹어봤으니까요." 

제규는 4월 3일 일요일 오전 2시에 잤다고 한다. 나는 오전 7시에 일어나서 쌀을 씻고는 제규를 깨웠다. 제규는 식재료를 확인하기 위해 냉장고를 열어보고는 당황했다. 있을 줄 알았던 튀김가루가 없었다. 마트 문도 안 열었을 시간, 탕수육은 다음에 하기로 했다. 치즈를 구워서 샐러드를 하고, 밑간을 해둔 닭가슴살구이를 했다.

제규가 치즈를 구워서 만든 샐러드. 오랜만에 아빠랑 밥을 같이 먹을 수 있어서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났다. 제규에게는 거의 천지개벽할 수준의 일이었다.
 제규가 치즈를 구워서 만든 샐러드. 오랜만에 아빠랑 밥을 같이 먹을 수 있어서 일요일 아침 일찍 일어났다. 제규에게는 거의 천지개벽할 수준의 일이었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남편은 일주일 만에 밥다운 밥을 먹는다면서도 내가 밥상 사진을 찍을 때까지 기다렸다. 제규와 꽃차남의 효심은 폭발했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드는 그 몇 초 사이에도 2회 정도는 티격태격 하던 '의좋은 형제'는 평화로웠다. 일요일마다 '아점'을 먹던 우리 식구는 시댁에 명절 쇠러 간 것처럼 아침밥을 먹었다.          

제규는 밥상을 치우고는 자러 들어갔다. 우리 부부는 성당에 갔다. 미사 끝나고 남편은 일하러 가고, 나는 꽃차남을 차에 태웠다.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고는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오후 3시 넘어서야 일어난 제규는 아빠가 일요일마다 하는 일을 했다. 책꽂이와 책상의 먼지를 닦고, 소파를 밀어내고, 구석구석 바닥을 쓸고 닦았다.

'밥걱정의 노예'인 남편이 없는 일요일 밤. 남은 세 식구는 일탈을 저질렀다. 밥을 안 먹었다. 딸기 두 상자에 맘모스 빵, 땅콩을 먹고는 끝.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혼자 밥 먹고 학교 가는 제규는 오후 10시 반이면 잠자리에 든다. 나는 제규 침대로 갔다. 젖 먹여 키운 애가 자라서 밥도 차리고, 청소도 하는 게 대견해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엄마, 오늘 일찍 일어나서 주말 패턴이 엉망이야. 그래도 아빠가 좋다고 하면, 다음 주 일요일에도 아침밥 할 거예요."
"그래? 아빠가 이 말은 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해야겠다야. 사실 아빠는 국물 있는 음식이 좀 먹고 싶었대." 

일요일에는 '아점'을 먹는 우리 식구는 오랜만에 아침 일찍 밥을 먹었다. 일일이 바빠서 같이 밥을 못 먹는 아빠를 위해서 제규가 밥을 했다. 남편은 몹시 맛있게 먹었지만... 국물 요리가 좀 생각났다고 한다.
▲ 거의 '백만 년' 만의 아침밥 일요일에는 '아점'을 먹는 우리 식구는 오랜만에 아침 일찍 밥을 먹었다. 일일이 바빠서 같이 밥을 못 먹는 아빠를 위해서 제규가 밥을 했다. 남편은 몹시 맛있게 먹었지만... 국물 요리가 좀 생각났다고 한다.
ⓒ 배지영

관련사진보기




태그:#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탕수육, #찍먹 , #유느님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