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하고인> 포스터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관계도 그렇다. 영화 <산하고인>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애써 부정하려는 것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 <산하고인> 포스터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관계도 그렇다. 영화 <산하고인>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애써 부정하려는 것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 에스와이코마드


세상 모든 건 변한다. 가장 완벽하다 믿었던 관계까지도.

거인 골리앗을 돌팔매 일격으로 물리친 것으로 유명한 다윗왕이 어느 날 세공사를 불러 말했다. "아름다운 반지 하나를 만들어 오너라. 그리고 반지엔 내가 승리를 거둬 기쁠 때 교만하지 않게 하고 절망 가운데 실의에 빠져있을 땐 용기를 줄 수 있는 문구를 새기거라" 세공사는 명을 받들어 멋진 반지를 만들었지만, 도대체 무슨 글귀를 새겨야 왕이 만족할지 알 수 없었다. 며칠을 고민하던 그는 다윗왕의 아들이자 지혜롭기로 유명한 솔로몬을 찾아 고민을 말했다.

"왕께서 이르시길 기쁠 땐 교만하지 않게 하고 실의에 빠졌을 땐 용기를 줄 수 있는 문구를 새기라 하십니다. 무엇이라 적으면 좋을까요?"

솔로몬이 내린 답은 이것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 짧은 이야기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진실 하나를 일깨운다. 세상 모든 건 변한다는 것, 가장 분명하고 확고하다고 믿어지는 것들조차 영원할 수는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는 우리에게 행운인 동시에 불행이다. 어떤 절망도 영속하지 않지만 모든 기쁨도 영원할 수 없다.

그깟 통조림의 유통기한도 만 년이어야 한다고

산하고인 타오(자오 타오 분)와 두 친구의 즐거운 한 때. 영원할 줄만 알았던 그들의 관계도 두 친구가 타오를 연모하게 되며 금이 가기 시작한다.

▲ 산하고인 타오(자오 타오 분)와 두 친구의 즐거운 한 때. 영원할 줄만 알았던 그들의 관계도 두 친구가 타오를 연모하게 되며 금이 가기 시작한다. ⓒ 에스와이코마드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상우는 더는 그를 찾지 않는 은수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물었더랬다. 이 장면이 슬프게 다가오는 건 영화를 지켜보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을 영화 속 상우만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가장 고귀한 사랑조차 처음 그 모습 그대로 지속하진 않는다는 것. 사랑뿐 아니라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쾌락과 우울, 세상에 존재하는 모두가 그렇다.

만약 오늘의 무언가가 영원할 수 있다면 섶나무 장작 위에 자리를 펴는 이도, 매일 같이 쓸개를 핥는 사람도, 고급승용차를 몰고 가정법원 앞을 누비는 이혼전문 변호사들도 없을 것이다. 태양조차도 수명이 있다.

세상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은 무언가의 영속을 더욱 갈구하게 한다. 대체 세상의 수많은 아까운 것들은 어째서 그리도 빨리 져버리고 마는 건지.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에서 주인공인 붉은 돼지가 "좋은 놈은 모두 죽는군"하고 읊조린 건 이러한 이유에서다. 세상 모두가 죽는다지만 좋은 놈이 죽는 건 더욱 안타까운 법이다.

샐린저도 스러져가는 많은 것들을 아쉬워했다. 그는 대표작 <호밀밭의 파수꾼>에서 주인공 홀든 콜필드의 입을 빌려 "어떤 사물들은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어야 한다, 저 유리집에다 넣어 그냥 그대로 간직해야 한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 불가능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홍콩영화계가 낳은 불후의 명작 <서유기-선리기연>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나온다. 주성치가 분한 손오공은 금강권을 앞에 두고 오래도록 회자할 명대사를 남겼다.

"난 과거에 사랑을 앞에 두고 아끼지 못하고 잃은 후에 큰 후회를 했소. 인간사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후회하는 것이오. 하늘에서 다시 기회를 준다면 그 여자에게 이 말을 할 거요. '사랑해.' 만약 기한을 정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하겠소."

이 대사는 왕가위의 <중경삼림>에서 다시금 반복된다. 사랑을 하고 사랑을 잃은 뒤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으는 버릇을 갖게 된 금성무가 그깟 통조림의 유통기한도 만 년이어야 한다며 갈 곳 없는 울음을 터트렸던 것이다.

영원한 무언가를 찾아 나설수록 분명해지는 것

산하고인 화려한 폭죽 뒤에 남는 건 허무 뿐. 영화는 불꽃과 굉음을 내며 터져나가는 폭죽과도 같이 이 세상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 산하고인 화려한 폭죽 뒤에 남는 건 허무 뿐. 영화는 불꽃과 굉음을 내며 터져나가는 폭죽과도 같이 이 세상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 에스와이코마드


어디 이뿐이랴. 영원할 수 없는 것의 영원을 꿈꾼 것이. 최근 개봉한 지아 장 커 감독의 <산하고인>도 그와 같은 영화다. 제목인 '산하고인'부터 '산이 사라지고 강이 말라도 너에 대한 내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는 뜻이란다. 모두 세 개의 시점으로 구분된 영화는 어린 시절부터 친구로 지냈던 세 젊은이가 성인이 돼 삼각관계에 빠지고 두 남자로부터 구애를 받게 된 타오가 억지로 이를 외면하는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애써 두 남자의 마음을 외면하던 타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관계는 깨어져 나간다. 타오는 둘 중 하나를 선택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관계가 시작된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첫 에피소드의 결말이 새드엔딩이었음을 알린다. 타오는 남편을 잃고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조차 마음껏 볼 수 없다. 그토록 그녀를 원했던 남자는 이제 다른 여자와 살고 그녀가 낳은 아이는 그녀보다 새엄마에게 더 친근함을 느낀다. 타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자 타오 곁에 남은 건 아무도 없다.

영화는 끊임없이 변하는 관계에 주목한다. 가장 완벽하다고 믿었던 관계조차도 영원할 수 없음을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타자와 공유할 수 있는 건 삶의 일부뿐이다. 아쉬움, 공허함, 외로움 따위의 감정이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감독은 수차례에 걸쳐 청룡도를 든 남자를 등장시킨다. 의도는 명백하다. 천 리를 달려 주군에게 돌아온 관운장과 같이 변하지 않는 무언가가 있지 않느냐는 물음, 바로 그것이다. 최종적으로 영화가 도달한 지점 역시 이와 궤를 같이한다. 중국에서 춤을 추는 어머니와 그녀를 찾아 나서는 타국의 아들, 어쩌면 이는 피는 물보다 진하고 모성은 관우의 의리와도 같이 영원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영원한 것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추구는 역설적으로 '그 무엇도 영원하지 않다'는 명제를 강화한다고. 천 리를 달려 주군에게 돌아온 관우도, 무엇도 바라지 않고 전해지는 모성애도 결코 영원하거나 당연한 게 아니라고. 그래서 더욱 대단한 것이라고.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빅이슈>와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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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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