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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봉화 회장 가운데
 채봉화 회장 가운데
ⓒ 채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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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중인 1950년 10월 9일부터 10월 31일 사이 153명 이상의 경기도 고양시 지역 주민들이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경찰서 경찰관에 의해 고양시 소재 금정굴에서 집단총살 당한 비극이 일어났다.

1950년 9월 28일 서울수복이후 고양시 경찰은 지역주민 중 인민군 점령시기에 부역혐의가 있는 자와 그 가족을 연행하였다. 경찰은 이들을 창고 등에 구금하였다가 3~7일간의 조사를 거쳐 금정굴로 끌고 가서 총살하고 암매장하였다.

지난 2007년 6월 진실화해위원회는 금정굴 학살 희생자들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던 지역주민들로서, 이 중에는 북한 점령기 인민위원회 활동에 참여했던 사람도 일부 있으나, "상당수는 도피한 부역혐의자 가족과 이와 무관한 지역주민이었다"고 진실규명 한 바 있다.

당시 진실화해위원회는 정부에게 금정굴 학살희생자들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 사과, 임시 보관 중인 유해 영구봉안, 평화공원 설립과 위령시설 설치 등을 권고하였다. 하지만 지난 2008년 이명박 정권 집권 후 현재까지 박근혜 정부는 이러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권고사항에 대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 

이에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고양유족회는 자비를 털고 그동안 모은 기금으로 지난 3월 29일 학살 장소인 금정굴 입구에 일부 희생자 유해를 안치하고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 앞면에는 "평화의 세상에서 편히 잠드소서"라는 추도문이, 뒷면에는 금정굴 등 고양지역에서 학살된 희생자 177명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국민의 인권과 생명을 경시하는 정부는 제거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채봉화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고양유족회장과 지난 2주 동안 국제전화와 이메일로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하여 싣는다.

-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고양유족회는 그동안 모은 기금으로 지난 3월 29일 고양시 금정굴 입구에 일부 민간인학살 유해를 안치하고 추모비를 세웠다. 지난 2010년과 2014년 당선된 최 성 고양시장은 금정굴 유해를 안치하고 평화공원을 조성한다고 공약한바 있다. 이번 유해안치와 추모비건립에 고양시에서는 어떤 지원이 있었나? 기금 지원 등은 해주지 않았나?
"고양시의 지원은 없었다. 올해는 조례가 없다는 이유로 위령제 예산도 세우지 않았다. 유해안치를 위한 부지매입 예산은 고양시의회에서 삭감 당했다. 현재 고양동 하늘문공원에 모셔져 있는 유해도 계약기간이 끝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정부는 유족들이 모두 늙어 죽기를 바라는 것 같다"

추모비 앞면
 추모비 앞면
ⓒ 채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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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995년 민간인학살 유해를 발굴한 이래 무려 20년이 넘도록 유해가 그냥 방치되었는데 그동안 중앙정부나 고양시는 그냥 유해를 방치만 한 것인가?
"1995년 발굴된 금정굴 유해와 유품은 서울의대 법의학과 시체해부실 창고에 보관 되었다가 유해는 고양시의 지원으로 2011년부터 납골당에 임시 보관 중이다. 유품은 같은 시기 중앙정부의 지원으로 충북대에 임시 보관 중이다. 유족들은 처음에 안치를 위한 중앙정부의 노력으로 보았지만 지금은 유족들이 모두 늙어 죽기를 바라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미 많은 유족 분들이 돌아가셨다."

- 중앙정부나 고양시의 민간인학살 유해 안치시설에 대한 지원을 반대하는 단체나 개인은 누구인가? 지난 2010년 정부기관인 진실화해위원회에서 민간인학살의 불법성을 진실규명하고 확인한 사건인데도 왜 여전히 이런 단체나 개인은 지금도 민간인학살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시설 건립에 반대하고 있나?
"주로 보훈안보단체에서 반대한다, 사실 반대 이유를 모르겠다. 이미 억울하게 돌아가신 민간인들이라는 것이 밝혀졌는데 왜 반대할까? 새마을부녀회에서 회장으로 일해 온 나도 의문을 풀지 못하고 있다. 보훈안보단체 분들이 나하고 앞에서 이야기 할 때는 모두 유해 안치를 해 드려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끝나고 뒤에서는 유해안치 반대 활동을 벌이고 있다."

- 그동안 어려움을 무릅쓰고 지난 3월 29일 학살 희생자 유해안치와 추모비를 세우시면서 여러 감화가 있으실 것 같은데?
"다른 유족들께서도 마찬가지겠지만 내 아버님의 경우도 정말 억울하게 돌아가셨다. 아버님은 타고나시길 풍채가 좋으시고 힘이 장사이시다보니 마을에서 질투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어떤 사상이나 그런 걸로 활동하신 분도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는 분이 마을에 한 분도 없다. 그런 아버님을 1950년 서울수복 후 누가 치안대에 고자질해서 금정굴에서 아버님을 학살한 것이다. 아버님과 함께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한 분들을 유해라도 모시도록 해 달라는데 국가나 지자체가 그걸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너무 답답한 심정이다."

"학살희생자 유해안치시설 설치, 새누리당 시의원들이 모두 반대를 했다"

위령제에 예를 드리는 채봉화 회장
 위령제에 예를 드리는 채봉화 회장
ⓒ 채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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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시 시의원들 중에 그동안 최 성 고양시장이 추진하려고 한 고양시 민간인학살 희생자를 위한 조례제정과 최소한의 부지매입 예산을 삭감한 시의원들은 누구인가? 또 그들이 예산 삭감을 주장하는 논리는 무엇인지?
"내가 오랫동안 경기도 파주에서 새마을부녀회 활동을 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면 오해 받을 수 있을 것인데, 한국전쟁 희생자들에 대해서 여당과 야당이 없다고 생각한다.
고양시에서는 새누리당 시의원들이 모두 반대를 했다. 딱 한 시의원이 금정굴 위령제에 와 주긴 했는데 결과가 그렇다. 민간인학살 희생자 조례제정과 부지매입 예산 삭감이유로는 가장 그럴 듯한 논리지만 비겁한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일을 왜 지자체가 하느냐는 것이었다, 가장 잔인한 주장은 학살희생자들이 인민군에게 부역하다 죽었으니 유해라도 색출해 가족들에게 돌려주자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시의원들이 몇 사람 있는 것 같다. 그 중 한 시의원은 1년이 넘도록 그 소리를 해서 금정굴 유족들이 명예훼손으로 소송까지 걸었다."

- 지난 1995년 고양시 금정굴 민간인 학살 희생자 유해는 누가 어떻게 발굴하게 된 것인가?
"1993년부터 유족회 활동이 있었다. 국회, 청와대, 지자체, 경찰청에 진정을 냈는데도 아무런 답변이 없었다. 그러다가 진정서를 하도 많이 내니까 하루는 정부에서 우리 유족들에게 통보가 오기를 "가족이 억울하게 학살당했다면 그 증거로 유해라도 찾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정부에서 억울하게 학살희생자들에 대한 진실규명을 해 주기는커녕 우리 유족들보고 직접 학살사실을 증명하라니 어이가 없었고 화가 났다.

그래서 그로부터 2년이 흐른 지난 1995년 세 번째 위령제를 마치고 유족들이 자비를 털어 학살 희생자 유해발굴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학살지에서 희생자 유골이 쏟아져 나왔을 때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하지만 이제 정부에서 인정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더 눈물이 나왔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우리 유족들이 사비를 들여 발굴한 학살 희생자 유골을 관청에 가져가니 담당자는 우습게도 이제는 '그게 누구 유골인지 어떻게 알아요'라며 비아냥거렸다. 어이가 없고 기가 막혔다."

"정부에서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 그 후 153구가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들이 그동안 대학 시체해부실이나 공원 등으로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여기저기 옮겨진 것으로 안다. 지난 1995년 이래 올해 3월 29일까지 유해안치 시설에 유해를 제대로 모시기까지 '유해수난사'를 듣고 싶다.
"우리 유족들은 유해가 발굴되자 이제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한데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었다. 정말 답답했다. 이 유골들을 어디다 모실지, 화장을 해야 하는 것인지조차 정부에서는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오죽하면 국회 앞에서 유골시위까지 했지만 뉴스거리로 그쳤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서울의대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께서 우리를 도와주셨다.

유족들은 명절 때마다 서울의대를 찾았다. 지난 2005년 진실화해위원회가 생기면서 희망을 갖기도 했지만 2011년이나 되어서 고양시 청아공원으로 유골이 옮겨졌으니 무려 16년 동안 걸린 셈이다. 그런데 이 조차도 끝이 아니었으니 유족들의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지금도 우리 유족들은 하늘문공원에서 제사를 지낸 뒤 금정굴 현장에서 또 제사를 지내고 있다. 하루 빨리 떠돌이 처지를 멈추고 제대로 된 영구위령시설로 억울하게 국가폭력에 의해 학살당한 분들의 유골과 유품을 모셔왔으면 한다."

- 채봉화 회장님은 어떻게, 어떤 인연과 계기로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고양유족회와 관여하게 되셨는지?
"지난 1993년 첫 위령제를 하면서부터 알게 되었다. 내가 태어난 경기도 고양시 야당리에서 지금도 살고 있는데, 사실 내 아버지를 학살한 가해자들과 사이가 안 좋았다. 그래 많이 다투고 했는데 그 때마다 "네 아버지가 금정굴에서 죽었다"고 했다. 잘 아시겠지만 그 말은 자식들에게 가장 나쁜 욕이었다.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던 지난 1993년 중 첫 위령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그때부터 매년 위령제에 참여하면서 다른 유족들과 함께해 왔다."

- 국가폭력에 의해 금정굴에서 희생된 민간인 학살 희생자 분들 중 가장 가슴 아픈 몇 분 사연을 소개하면?
"나는 사실 다른 유족 분들이 가족이 국가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당한 후 그동안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잘 모른다. 내 자신의 아픔도 못 이긴다. 유족들 사이에 서로 잘 물어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알게 되면 그것도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 국민소득 2만 불 시대인 요즈음 우리국민의 소득수준은 과거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풍족하다. 하지만 우리국민 다수는 과거사정리나 민간인학살 문제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이런 분들에게 왜 과거사정리나 민간인 학살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말씀 드리고 싶은지?
"아무리 역사에 관심이 없더라고 최소한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기는커녕 이렇게 죄 없는 국민을 학살했다는 사실을 온 국민이 알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여야의 문제, 보수와 진보의 문제도 아니다. 사람의 생명에 대한 문제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것도 인정하지 못하는 나라를 무슨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우리 아버님은 세상을 살면서 경우 밝고 씩씩한 분이셨는데 나라를 잘못 만나고 잘못된 시대에 태어나신 것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어머님과 강제로 헤어져서 징용으로 끌려가셨고 저 만주 벌판에서 강제노역을 하시다 만 5년 만에야 간신히 집에 돌아오셔서 어머님과 재회하셨다

아버님이 징용으로 끌려가신 5년 동안 어머님 혼자 오빠와 가족들의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다. 그래서 어머님은 쌀을 머리에 이고 일본놈들한테 걸릴까봐서 위에는 나물이나 시래기 같은 걸로 덮고 경기도 파주에서 몇 시간을 걸어서 서울까지 가셨다. 서울에서 쌀을 팔고 또 몇 시간을 걸어서 파주집에 돌아오셨는데 너무 길이 멀어 발톱이 두 번이나 빠지기도 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하루 종일 굶고 집에까지 오시면 늦은 밤이 되는데 오시는 중에 또 길에서 배고픈 늑대들이 마구 덤벼서 늑대들과 지팡이를 들고 싸우시면서 또 여기저기 늑대들에게 물리기도 하시고... 이런 세월을 사셨다고 하셨다.

그 뒤 6·25가 났다. 그리고 아버님은 1950년 9·28 서울수복 후 경찰과 치안대에 부역혐의로 잡혀가셔서 소식이 없었고 나중에야 금정굴에서 학살당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부가 국민을 버리고 이승만 대통령은 한강다리를 끊고 몰래 도망간 상황에서 '서울을 사수 하겠다'는 대통령의 말만 철석같이 믿고 피난도 안가며 남은 국민들은 어찌해야 하나? 그 후 인민군이 들어와서 총을 들이대며 '밥을 해라, 일을 해라' 하는데 누가 거역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들도 이 상황이었다면 어찌했을까? 그런데 도망갔다 돌아온 이승만 정권은 적반하장으로 아버지가 부역했다고 학살 한 것이다. 한마디로 역사의 희생양이 되신 불쌍한 우리 아버지! 그렇게 고생만 하시다 가신 가여운 우리 어머니!

돌아가실 때 어머니는 '나는 먼저 가지만 너희 아버지를 그렇게 모함했던 사람들, 너는 이곳을 떠나지 말고 그 사람들이 어떤 벌을 받는지 네가 너의 두 눈으로 꼭 봐라'는 유언을 남기시고 가셨다.

나라가 버린 국민,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누가 답변을 좀 해 주세요!"

* 채봉화 선생은 1947년 파주시 교하면 야당3리 출생
1976년 야당3리 새마을부녀회 총무
1981년 야당3리 새마을부녀회장
1998년 교하면 새마을부녀회장
2004년 파주시 새마을부녀회장
2010년 신사임당 숭모회 회장
현재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고양유족회장



태그:#채봉화, #금정굴, #김성수, #학살,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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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영국통신원, <반헌법열전 편찬위원회> 조사위원, [폭력의 역사], [김성수의 영국 이야기], [조작된 간첩들], [함석헌평전], [함석헌: 자유만큼 사랑한 평화] 저자. 퀘이커교도. <씨알의 소리> 편집위원. 한국투명성기구 사무총장, 진실화해위원회, 대통령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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