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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에 대한 너의 사랑은 남달랐다. 학교에 축구공을 챙겨갔던 넌 요사이 다른 영역으로 관심을 넓혔다. 축구 중계방송을 보겠다고 밤늦도록 방에 불을 켜두었다. 주로 주말에 중계되는 유로팀 리그전이라 학교 생활엔 문제없다며 큰소리를 쳤다.

인터넷 축구 카페에 가입해 축구에 관한 글도 올렸다. 다른 글에 반대하는 댓글도 달고, 카페 방장이랑 치열한 '댓글전투'까지 벌였다. 급기야 감정 싸움을 하는지 분간 못할 이상한 상황으로 흘러가는 듯했다. 그런 불필요한 말싸움을 접었으면 좋겠다고 너에게 말할 때였다. 그 말 한 마디가 너의 무엇을 건드린 걸까. 

"엄마는 엄마가 하는 일만 의미 있고, 내가 하는 일은 모두 한심해 보여? 엄마도 어리다고 날 무시하는 거지.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후로 쏟아지는 갑작스러운 너의 눈물바람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이어지는 너의 얘기는 뜻밖이었다. 그 카페 방장은 어른이었고, 너의 글에 악성 댓글을 달았다. 네가 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장유유서의 근본을 들먹이며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은 모양이었다. 끝내 네가 보여주지 않아 어떤 비방이 오갔는지 확인하지 못했지만 영 개운치 않았다.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종이 봉지 공주>의 겉표지. 로버트 문치 글/ 마이클 마첸코 그림/ 김태희 옮김
 <종이 봉지 공주>의 겉표지. 로버트 문치 글/ 마이클 마첸코 그림/ 김태희 옮김
ⓒ 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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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너와 함께 읽었던 <종이 봉지 공주>의 옹골찬 외마디가 너의 눈물 속에서 쭈르륵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왕자를 구하기 위해 초라한 종이봉지 옷을 걸치고 용이 사는 성으로 달려갔던 신세대 공주였다.

종이 봉지 공주는 재치 있는 달변으로 단숨에 용을 기절시켰다. 사랑하는 왕자가 갇혀 있는 동굴 문을 열자마자, 공주를 향해 날아든 말은 예상 밖이었다.

"엘리자베스, 너 꼴이 엉망이구나! 진짜 공주처럼 챙겨 입고 다시 와!"

용의 불기둥에 성이 불타 변변한 옷이 없던 공주는 까만 잿더미에서 나뒹구는 종이봉지를 둘러 입었다. 공주의 품위 대신 왕자의 생사가 걱정이었다. 고마움의 눈물은커녕 매몰차게 공주의 가슴에 비난의 화살을 날리다니. 그런 왕자를 향해 종이 봉지 공주가 날려 보낸 돌직구는 시속 몇 킬로미터쯤 될까.

"넌 겉만 번지르르한 껍데기야!"

번지르르한 껍데기. 그 한 마디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너와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껍데기, 그건 뭘까. 어떤 껍데기에 사로잡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만 하는 부모'가 되어버린 것일까. 어떤 껍데기에 가리어 '너에게 의미 있는 일이 다른 모양새'로 비치는 것일까. 종이 봉지 속에 담겨있는 공주의 속마음을 보지 못한 왕자가 정녕 나일 수도 있음을 너의 싸늘한 눈물이 말해주는 듯했다.

허울 좋은 껍데기. 남 보기에도 흡족한 껍데기. 세상 어디를 가도 꽤 유용하게 쓰일 껍데기. 너에게 그럴듯한 무언가를 기대했던 나의 눈빛에서도 그 껍데기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반듯했으면, 누구랑 견주어도 뒤처지지 않았으면 하는 정체불명의 껍데기를 불러들여 진짜 네가 그렇게 되어주기를 바랐는지도 몰랐다.

축구 사이트를 서핑하고, 축구 중계방송을 보며 환호성을 지르는 네 표정은 사뭇 달랐다. 축구공처럼 통통 튀는 네 눈동자는 원시의 초원 지대를 달리고 있었다. 화면 속 축구공을 쫓아 열심히 뛰어다니는 '제 3의 선수'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축구 선수 이름을 공책에 적어 두고, 지난 시즌 팀의 성적을 줄줄 외는 네 모습은 탐탁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아주 상투적이었다. 저런 정성을 공부에 십분의 일만 쏟으면 반에서 몇 손가락 안에는 들겠다 싶은. 자식의 취미 생활까지 간섭하는 인색한 '꼰대의 근성'이 고개를 내밀 때마다, 꾹꾹 눌러대며 안 그런 척 그랬다. 하지만 티가 나지 않을 리 없었다. 베테랑 연기자도 아닌데. 싫은 내색은 상대가 먼저 알아보는 법이다.

안 그런 척 무심코 던진 말이었지만, 그 속엔 마뜩잖은 어감이 한껏 실렸을 것이다. 쓸데없는 잡담은 집어치우고, 제발 네 앞길을 직시하라는 불만이 잔뜩 배어 있는 거북한 말투였을 것이다. 그런 반대의 근저에는 '그런 거 해봐야 떡이 나와 밥이 나와'라는 수상한 냄새가 났을 테고. 결국 어렸을 적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그 말을 똑같이 따라하는 중이었다. 최후의 종착지는 '밥'이었다.

네 미래에 놓일 '밥그릇'이 걱정인 엄마

삼시세끼, 누구나 먹는 밥이 왜 그리 중요할까. 대한민국이 식량주권 국가의 반열에 오른 지도 오래 전인데 말이다. '밥은 먹었니'라는 말이 하나의 인사말처럼 오가는 동방예의지국에서 '밥'은 절대적인 가치였다. 만나는 어른마다 마치 그러자고 짠 것처럼 아이들에게 하는 물음은 천편일률적이었다. '밥은 먹고 노는 거야.' 그 물음에 성의 없이 대답하고는 반대편으로 뛰어가기 바빴던 그 시절이 한참이나 지났지만.

역시 밥이었다. "학교 급식은 어땠어" "수학여행 가서 반찬은 괜찮았어" 그런 식상한 질문에 혀를 내두르는 너 역시 얼버무리고 제 방으로 도망치기 일쑤였다. 녹음기처럼 되묻는 세상 모든 엄마들의 걱정은 자식의 뱃고래였다.

요즘 들어선 고리타분한 밥의 정서가 집 안팎을 벗어나 너의 미래까지 뻗어나갔다. 너의 미래 앞에 놓일 '밥그릇'이 걱정이었다. 청년 실업률이 지금의 추세라면, 그 재앙의 늪에서 누구라도 담담할 순 없다. 과연 네가 꿰찰 밥그릇은 어떤 모양일까.

문질문명의 진화로 세상은 SF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변했지만, 어쩐지 그 변화에서 인간만이 소외받는 느낌이었다. 저 뿌리 깊은 '밥타령'이 한층 기세를 높여가는 것 같아서였다. 일자리가 점점 사라지는 요상한 문명의 기류에서 살아남으려면 전보다 강력한 무엇이 필요했다. 성적이 곧 너의 밥그릇을 결정할 거라는 명제가 학교 밖을 뛰쳐나가 온 거리를 점령한 지도 오래 전이었다.

우리는 어떤 껍데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일까. 학교와 집, 학원을 오가는 이 획일적인 삼각형의 모서리에 부딪히는 건 아이들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교육비에 허리가 휘청거리지만, 부모라면 능히 감내해야 할 절대적인 가치로 묵인되는 세상. 아이의 미래와 학교 성적을 일직선상으로 연결 짓는 이 잔인한 풍속은 언제쯤 사라질까.

아이 앞에서 먼 훗날의 밥그릇을 떠올리는 나의 과대망상은 분명 낡은 것이었다. 자식의 취미생활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마음 속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잔뜩 담겨 있었다. 미래 말고 현재는, 한번 지나면 돌이킬 수 없는 현재는, 그 막연한 걱정에 뭉개져도 괜찮은 걸까. 아이의 학창 시절이 책과 볼펜의 잉크로만 검게 물들기를 바라지도 않는데.

모두가 원치 않지만 그러지 않을 수 없는 이 모순 덩어리! 치열한 경쟁 앞에서 너덜너덜 해질 아이 마음이 염려스러우면서도, 상투적인 이 망할 놈의 껍데기는 갈수록 견고해졌다. 구시대적인 부모의 껍데기를 당장 벗어버리고 싶은데... 껍데기 너머의 신세계는 언제쯤 한반도의 남쪽으로 상륙할지 불투명했다.

껍데기에 현혹되는 낡은 이미지를 부숴버리고 싶다. 껍데기 말고 올올한 알맹이가 아이 품에 안길 그날이 어서 왔으면 좋겠다. 어떤 껍데기를 벗겨내야 아이는 아이대로 행복하고, 부모는 부모대로 만족스러운 삶의 틀거리를 만들 수 있을까.

사랑에 대한 상투적인 판타지에 일침을 가한 종이봉지 공주가 보여준 신세계, 그 속으로 첨벙 뛰어들고 싶다. 풋풋한 새내기 공주가 보여준 담대한 모험에 함께 동참하고 싶다.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캐릭터로 우리 앞에 나타난 종이 봉지 공주에게 읊어줄 시 한편이 떠오른다. 4월에 어울리는 신동엽의 시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덧붙이는 글 | <종이 봉지 공주> 로버트 문치 글/ 마이클 마첸코 그림/ 김태희 옮김/ 비룡소/ 7500원



종이 봉지 공주

로버트 먼치 지음, 김태희 옮김, 마이클 마첸코 그림, 비룡소(1998)


태그:#사춘기 , #그림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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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혼자를 핑계로 혼자만이 늘릴 수 있는 힘에 대해 모른척 합니다. -이병률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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