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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규는 일반 고등학교에 다닙니다. 날마다 해야 하는 보충수업과 야자, 두 달 반 동안 고민한 제규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갔습니다. 정규수업 끝나면 집에 가서 밥을 하고 싶다고요. 고등학교 1학년 봄부터 식구들 저녁밥을 짓는 제규는 지금 2학년입니다. 이 글은 입시공부 바깥에서 삶을 찾아가는 고등학생의 이야기입니다.  -기자 말 

제규가 만든 샐러드.
 제규가 만든 샐러드.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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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밥 한 번 먹자."

나는 이 말을 안 한다. 구체적으로 약속을 잡는다. 내가 못할 것 같은 일은 거절도 잘한다. 그러니 친구가 별로 없다. 동생 지현은 나를 "직장생활이랑 시집살이를 안 해서 사회성이 떨어진다"고 평가한다. 인정! 나는 인간관계를 넓히려고 애쓰지 않는다. 새로운 사람들과 밥 먹는 일도 1년에 두세 번뿐이었다. 2016년 2월까지만.

제규는 벨기에 감자튀김을 했다. 동생들은 맛있게 먹었는데 자기는 실패한 거라고 자평했다.
▲ 형아가 해준 간식을 먹는 시후와 꽃차남 제규는 벨기에 감자튀김을 했다. 동생들은 맛있게 먹었는데 자기는 실패한 거라고 자평했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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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제규는 여전히 정규수업 마치고 바로 집에 왔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동생 꽃차남의 간식을 만들었다. 제규는 구워먹는 치즈를 써서 카프레제 샐러드를 변형시켰다. 발사믹 크림을 샐러드 위에 올리면서 "이건 신의 한 수야, 모든 음식에 잘 어울려"라며 좋아했다. 그러나 꽃차남은 "이게 뭐야?"라면서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제규는 꽃차남과 시후(우리 집 위층에 사는 꽃차남 친구)의 간식으로 벨기에 감자튀김을 만들었다. 돼지기름, 소기름, 심지어 말기름을 쓰는 벨기에 감자튀김은 약한 불에서 한 번 튀기고, 센 불에서 다시 튀겨야 한단다. 우리 집에 없는 동물성 기름, 제규는 식물성 기름을 썼다. 꽃차남과 시후는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러나 제규는 아쉬워 보였다.

"애들이 맛있게 먹었어도 실패예요. 벨기에에서는 작고 통통하게 감자를 썰거든요. 나는 패스트푸드점에서 파는 크기로 칼질 했어요. 아, 벨기에 가서 감자튀김 먹어보고 싶어요."

일식 돈가스 모방 1년... 제규의 진보

일식 돈가스를 따라한 지 약 1년. 제규는 이제 조금 근접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모양도 일정하지 않고, 치즈가 옆구리로 새어나온다면서 아직 멀었다고 했다.
▲ 제규가 만드는 돈가스 일식 돈가스를 따라한 지 약 1년. 제규는 이제 조금 근접한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모양도 일정하지 않고, 치즈가 옆구리로 새어나온다면서 아직 멀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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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 들어서 보는 첫 모의고사. 제규는 시험 보는 날을 좋아한다. 학교에서 일찍 끝나니까. 그날은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 성헌이를 만나기로 했다. 두 사람의 게임 취향은 다르다. 피(시)방에 간다 해도 동시에 아드레날린이 분출되지 않는다. 재미가 없다는 뜻. 제규는 성헌에게 "그냥 우리 집에 가서 돈가스나 해 먹자"고 했다.

"일식 돈가스를 흉내 낸 지 1년쯤 되잖아요. 이제 좀 근접하는 느낌이 들어요. 돈가스를 대각선으로 잘랐을 때 흐르는 치즈, 둥근 원기둥 모양으로 튀긴 고기, 바삭한 빵가루, 정말 잘 어울리게 할 수 있어요. 그래도 끄트머리 막는 거를 잘 못 해요. 치즈가 새어나오잖아요. 고기를 말아서 튀기면 돈가스 크기가 일정해야 하는데 조금씩 차이도 나고요." 

돈가스 다음에는 가지 요리. 제규는 가지 속을 다 파낸 다음에 토마토소스와 치즈를 넣었다. 전에는 파낸 가지 속을 다져서 소스와 함께 넣었다. 잘 안 익었다. 그래서 아예 뺐더니 더 맛있게 됐다. 기분 좋아진 제규는 밥상을 차리고는 성헌과 식탁에 앉았다. 제규는 "어른 올 때까지 기다려야지"라면서 엄마 일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돈가스는 식어버렸다.

토요일 저녁상은 거실에서... <무도> 때문이다

제규는 친구 주형이를 데리고 와서 밥상을 차렸다. 돈가스를 엄청 많이 해서 거실에 밥상을 차렸다. <무한도전>을 봐야 하니까.^^
▲ 주형이 데려와서 차린 토요일 저녁 밥상 제규는 친구 주형이를 데리고 와서 밥상을 차렸다. 돈가스를 엄청 많이 해서 거실에 밥상을 차렸다. <무한도전>을 봐야 하니까.^^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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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규에게 토요일은 오로지 노는 날. 아침 일찍 일어나서 샤워 하고 옷을 차려입고 나간다. <무한도전> 하기 전인 오후 6시 즈음에 돌아온다. 근데 어느 주말부터인가 친구 주형이와 같이 왔다. 두 손에는 장 봐온 먹을거리들을 잔뜩 들고서. 제규는 부엌으로 갔다. 주형은 식탁의자에 앉아서 스마트폰을 하거나 제규 옆에 서서 잔심부름을 했다.  

제규는 시금치로 샐러드와 나물을 만들었다. 장식용 견과류를 처음 사본 거라서 샐러드도 했다. 새싹 채소를 깔고서 그 위에 오븐에 구운 치즈를 올렸다. 이제는 '초딩 입맛'을 가진 주형이가 좋아할 만한 메뉴를 할 차례. 제규는 미리 생각해 놨다. 소년이라면 돈가스! 정육점에서 돈가스용 돼지고기 등심을 많이 사왔다.

"엄마, 오늘은 거실에 밥상 차릴게요. <무한도전> 본방 봐야 하잖아요."

우리 집의 '권력 서열 1위'는 수시로 변한다. 당연히 밥 하는 기술을 가진 남편과 제규는 1인자다. 생떼를 쓰며 울고 부는 꽃차남도 시도 때도 없이 1인자로 등극한다. 식구들은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아니꼽지만 비위를 맞춰준다. 나라고 왜 권력욕이 없겠나. 매주 토요일 오후 6시 20분, 소파에 앉아서 텔레비전 리모컨을 잡는 순간에는 내가 1인자가 된다. 

주형과 제규는 1인자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7~8년간 우리 집을 드나든 주형의 별명은 '멀대', 무척 큰 키로 텔레비전 화면을 가렸다. 돈가스가 잘 돼서 기분이 좋은 제규는 "맛있어?" "부족하지 않겠어?" 라는 말을 자꾸 했다. 나는 '제규 엄마'와 '무한도전 광팬' 사이에서 갈등했다. 숟가락을 탁자에 쾅! 내려치면서 "조용히 좀 해라" 호통치는 것만 상상했다.

"학교서 보는 제규랑 달라요... 멋있어요"

그날은 밥그릇 다섯 개. 제규 친구 윤환, 꽃차남 친구 시후까지 모여서 먹었다. 닭 가슴살 요리가 금방 떨어져서 제규는 밥 먹다가 일어나서 또 돈가스를 만들었다.
▲ 친구 윤환이 데려와서 차린 밥상 그날은 밥그릇 다섯 개. 제규 친구 윤환, 꽃차남 친구 시후까지 모여서 먹었다. 닭 가슴살 요리가 금방 떨어져서 제규는 밥 먹다가 일어나서 또 돈가스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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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 월요일에는 제규의 새 친구 윤환이가 왔다. 제규는 친구에게 샐러드를 만들어줬다. 윤환이는 풀만 가득한 음식에 당황한 듯했다. 그날 일찍 일이 끝난 나는 초면인 윤환에게 "여자친구 생기면 자주 먹을 걸? 지금 안 먹어도 돼"라고 말해줬다. 꽃차남과 시후, 제규와 윤환은 모두 남성. 고기반찬은 일찌감치 떨어졌다. 제규는 밥 먹다가 일어나 돈가스를 했다.     
   
"1학년 '꿈 발표대회' 때 제규를 봤어요. 또래 중에 그런 애가 없는데 요리를 한다니까 신기했죠. 근데 2학년 때 같은 반이 됐잖아요. 제가 먼저 제규한테 '너 요리하는 거 먹어봐도 되냐'고 물어봐서 따라온 거예요. 직접 먹어보니까 훨씬 맛있어요. 집에 와서 보니까 학교에서 보는 제규랑은 달라요. 진짜 사람이 멋있어요."

나는 윤환의 찬사를 녹음했다. 그날 제규네 반 '단톡방'에는 윤환이가 먹은 밥상 사진이 올라갔다. 야자를 하는 친구들 몇이 '나도 갈래'라고 했다. 제규는 "걔네들 다 오면 코스요리 해야지"라면서도 느긋했다. 어차피 야자 하니까 못 올 거라고. 그러면서도 "엄마, 내 친구 산하 알지요? 걔랑 닮은 애가 대관이에요, 그래서 친해요, 데려오고 싶어요"라고 했다.

10대들의 말은 때로 번역기를 써야 할 필요가 있다. "대관이 데려오고 싶어요"라는 말은 "나랑 친한 대관이를 연속으로 데려와서 고기로 음식 해먹을 거예요"라는 뜻이었다. 대관이는 요리 하는 제규 옆에 서서 동영상을 찍었다. "다 맛있어요" 하면서 먹었다. 감기몸살과 비염으로 빌빌거리던 제규는 다음 날도 대관이를 데려와서 고기 요리를 해 먹었다. 

제굴이가 만든 고기 요리. 제규가 한 요리를 성실하게 기록하기 위해서 나는 카메라 렌즈를 새로 샀다.
▲ 소년이라면 육식! 제굴이가 만든 고기 요리. 제규가 한 요리를 성실하게 기록하기 위해서 나는 카메라 렌즈를 새로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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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규야, 친구들은 학원 가야 하니까 밥 먹자마자 가잖아. 혼자 치우는 거 안 힘들어?"
"엄마, 나중에 식당할 거니까 연습하는 거예요. 손님한테 설거지시키는 식당은 없잖아요."

"그래도 걱정된다야. 우리 아들 자체로 보는 게 아니라 밥 해주는 애로 볼까 봐. 호의가 계속되면 자기 권리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있거든."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친구들 데려와서 음식해주는 거, 재밌다고요."

사흘 전, 올해 여든일곱 살인 시고모님은 제사 지내고 쌓인 그릇을 보고는 "먹는 것이 이러키(이렇게) 무서운 일이란다, 고상이여"라고 하셨다. 나는 고모 말을 알아듣는다. 그러나 제규는 알 듯 말 듯해서 눈만 껌뻑일 거다. 열여덟 살 청소년은 부엌일이 재미있다. 나는 엄마, 우리 아들이 마흔 넘고 여든이 돼도, 지금처럼 즐겁게 먹고 살기를 바란다. 제 식구들과 친구들이랑.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도 보낼 예정입니다.



태그:#야자 대신 저녁밥 하는 고딩 아들, #소년이라면 육식, #돈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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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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