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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7일 오후 5시 25분]

지난 2015년 12월말, 3년간 교사로 몸 담았던 실상사 작은학교를 떠났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저는 덴마크 작은 도시에 있는 인터내셔널 피플스 칼리지(International People's College, 아래 IPC)로 왔습니다. 

제가 지리산 자락에 있는 중고등부 대안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를 떠난 이유는, 더 큰 세상이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제가 대안학교 교사로서 아이들 앞에 설 자격이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때로 작은학교 아이들이 부럽기도 했는데, 그건 제가 한번도 받아보지 못한 교육을 그 친구들이 받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안교육을 받아보지 못한 저는 어떤 것이 대안교육인지 몰랐습니다. 작은학교 교사로 있을 때 동료 선생님들과 함께 전 거창고 교장선생님인 전성은 선생님을 찾아뵌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선생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학교가 어려웠던 시절, 뜻을 가지고 거창고로 왔던 사람들 중에, 3년 만에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어. 그들은 3년 만에 자기한계를 발견하고 떠나. 옆에서 아무리 설득을 해도 소용이 없어. 꼭 3년이야. 이후로도 그들은 한번씩 학교를 찾아와. 그리고 그 3년이 자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노라고 말하곤 해."

누군가 저에게 작은학교에서 보낸 지난 3년이 어떤 의미였냐고 묻는다면, 저 역시 그렇게 대답할 것 같습니다. 생애 가장 소중한 시간 중에 하나였노라고. 가장 많은 걸 배운 시간 중에 하나였노라고. 저는 저의 가능성과 한계 둘 다를 보았고,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치열한 과정이었노라고.

"너 사우스 코리아에서 왔지?" 어딜 가도 티나는 한국인

실상사 작은학교 겨울풍경
▲ 작은학교 실상사 작은학교 겨울풍경
ⓒ 한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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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덴마크 IPC를 알게 된 것은, 재작년 하자센터 창의서밋에 초대된 소렌 교장 선생님의 학교 소개를 듣고서였습니다. IPC는 1921년 피터 매니케(Peter Manninche)라는 사람이 창립한, 전 세계 시민들을 위한 자유학교 같은 곳입니다.

덴마크에는 19세기 중반 니콜라이 그룬트비에 의해 시작된, 호이스콜레(영어로는 포크 하이 스쿨, folk high school)라고 불리는, 성인을 위한 자유학교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초창기의 호이스콜레는 깨어있는 농민들이 죽은 언어가 아닌 살아있는 말로 이야기 나누며, 함께 일하고 공부하는 기숙형 학교였다고 합니다.

95년 전, 1차 세계대전의 여파가 채 가시기 전 덴마크에 살던 피터 매니케는 이런 깜찍한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서로 전쟁을 했던 나라의 사람들이 얼마간 함께 모여 살면서 일하고 공부하면 어떨까. 세계 여러나라에서 온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살면서 평화를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일이 아닐까.'

IPC는 덴마크에서 유일한 인터내셔널 호이스콜레이고 모든 수업은 영어로 진행됩니다. 이번 봄 학기에는 30여 개국이 넘는 나라에서 온 100명에 가까운 학생들이 한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가까이 학교에 머뭅니다. 학생들은 원하는 과목을 선택해서 공부할 수 있고, 교사들은 원하는 과목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시험과 평가는 없습니다.

식당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 IPC 매너 하우스
▲ IPC 식당 유리창을 통해 바라본 IPC 매너 하우스
ⓒ 정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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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첫 일주일은 하루도 해가 나지 않고 흐린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어린 친구들이 많을 거라는 걸 이미 듣고 왔지만, 대부분이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온 친구들은 파티를 자주했습니다. 그들의 파티는 맥주를 마시고, 노래를 하고, 음악을 틀어놓고 춤을 추는게 다였는데, 저는 그 친구들과 어울려 파티를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곳에서 무언가 대단한 지혜를 배워가야 한다는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 학생들은 그저 즐기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매일매일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던 저는, 평생 경험해 보지 못한 안정감과 평화로움 속에서 이상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학교에 개설된 수업 중에서 제일 어렵다는 과목을 포함해서 빡빡한 시간표를 짰습니다. 유엔에서 25년간 일하다 2년 전부터 이곳의 교사로 재직하고 있는 저의 담임 선생님 앙헬은, 제 시간표를 보더니 진지하게 수업을 줄일 것을 권하셨습니다.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 사우스 코리아(한국)에서 왔지? 사우스 코리아에서 온 사람들은 정말 헌신적이다. 그들은 정말 잘하려고 하고, 잘 못해냈을 때 스트레스도 많이 받는다. 시간표를 너무 빡빡하게 짜지 말고 너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편안하게 이곳에서의 생활을 즐겨라."

저는 그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그가 맞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배워가야 할 대단한 지혜는 삶을 즐기는 법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학교에서 제일 어렵다는 수업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디벨럽먼트 매니지먼트(Development Management)라고 불리는, 사회 문제를 발견하고 그를 풀어나가기 위한 프로젝트를 만드는 연습을 하는 수업이었습니다. 그 수업에서 저는 게트루드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사실 이 글은 제가 다시 학생이 되어 게트루드라는 덴마크 선생님을 만난 이야기입니다.

느린 학생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다

선생님은 젊은 시절 유엔 산하 기관에서 일하셨습니다. 케냐와 스리랑카 등지에서 빈곤지역 주거환경개선을 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셨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일한 경험을 듣는 것은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 살면서 저는 한번도 유엔에서 일한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거든요.

첫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학생들 서너 명끼리 조를 이루어 지속가능한 발전에 관해 토론을 하게 했습니다. 그 수업을 듣는 유일한 아시아 학생이었던 저는, 18세 유럽 소년소녀들 사이에 섞여서 아무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쳤지만, 외국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처음이었던 제가 유럽 학생들과 사회 문제에 관해 토론을 한다는 것은 힘에 부치는 일이었습니다.

지난 3개월간의 수업이 마무리되고, 어느 정도 듣고 말하는 것이 편안해진 지금 돌이켜보면, 스스로가 말 못하는 바보나 다름 없었던 그 순간을 어찌 견뎌냈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최고로 좋은 교육을 받아보고 싶어서 덴마크로 왔는데, 실제로 마주해야 했던 현실은 상대적으로 말을 잘 알아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느린 학생이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주저없이 그것이 (교사로서든, 학생으로서든) 제가 겪은 최고의 교육적 경험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처음으로 제가 만났던 느린 학생들의 마음을 절실하게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업을 하다가 어려운 단어나 내용이 나오면, 게트루드 선생님은 언제나 저를 보고 제가 이해했는지 확인을 하셨습니다. 제가 이해를 못하면 이해할 때까지 다시 설명해 주셨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창피하고 미안해서 모르는데 아는 척한 적도 당연히 있습니다. 한번은 수업시간에 '데스몬드 투투' 이야기가 나왔고, 선생님은 데스몬드 투투에 대해서 다들 아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이번에 저는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했습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해 싸웠던 성공회 주교였다고 알려주시며 제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서는 알고 있는지 점검을 하셨습니다. 저는 "그건 알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덴마크 인터내셔널 포크 하이 스쿨이라고 쓰여있는 현관 바닥 매트
▲ IPC 현관 덴마크 인터내셔널 포크 하이 스쿨이라고 쓰여있는 현관 바닥 매트
ⓒ 정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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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벨럽먼트 매니지먼트 수업에서 제가 연습한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청년들을 위한 인생학교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팀은, 브라질에서 온 여학생 한 명과 가나에서 온 남학생 한 명, 그리고 저로 구성되었습니다. 우리는 한국 청년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는 것으로부터 작업을 시작했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한국의 자살률이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의 사정을 잘 모르는 그들에게 이 모든 문제를 영어로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고통스러운 우리 사회의 민낯을 보여야 했다는 것 역시 감정적으로 힘든 일이었습니다.

수업은, 각 조별로 토론을 하고 그 내용을 가지고 커다란 종이 위에 문제 지도를 그려나가면, 게트루드 선생님이 와서 그것을 확인하고 코멘트를 해주는 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언제나 제게 물었습니다. "이 문제의 원인이 이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100% 확신하니? 100% 확신할 때 다음 단계로 넘어가라."

놀랍게도 선생님은 한국의 교육현실에 대해서 잘 알고 계셨는데, 그건 지난 학기에 이 수업을 들었던 다른 한국 학생도 저와 비슷한 성격의 프로젝트를 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 우연히 저는 그를 만나게 되었는데, 그는 제가 분석한 문제들을 보더니, 자신이 한 것과 상당히 비슷하다고 말해주었습니다.

저는 갓 스무살이 넘어 보이는 그에게 과감하게 물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요?" 그가 대답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교육을 바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저는 소름이 돋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하나 둘 모인다면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게트루드 선생님은, 더듬 거리는 영어로 한국의 문제를 설명해내려 애쓰는 저에게서, 제가 가진 경험과 지혜를 끄집어 내기위해 노력하셨습니다. 저는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한번은, 한국 청년들이 정말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인지를 선생님께 이야기하다가, 덴마크 사람들이 다양한 직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듣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자기 옆집에 가비지 콜렉터(Garbage collector, 쓰레기를 수거하는 사람)가 사는데, 그 사람이 교사인 당신보다 월급을 많이 받으며, 대단한 전문직으로 사회에서 인정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지금 저는 덴마크 생활에 조금 익숙해져서 그런 말을 들어도 덤덤합니다. 하지만, 이 곳에 온 지 얼마되지 않았던 1월에 그 말을 들었을 때는, 그 자리에서 감정이 북받쳐 눈이 벌게지고 말았습니다. 제가 온 사회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덴마크 인터내셔널 피플스 칼리지의 창립자
▲ 피터 매니케 덴마크 인터내셔널 피플스 칼리지의 창립자
ⓒ 정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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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벨럽먼트 매니지먼트 수업은, 활동하는 세계 시민(active global citizen)을 키워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는 IPC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업입니다. 이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은 3개월 동안의 수업을 마칠 때쯤 전교생 앞에서 자신의 프로젝트를 발표해야 합니다.

발표를 하기 전, 게트루드 선생님은 수업에 참여한 네 팀 모두에게 리허설을 하게 했습니다. 실제 발표에 주어진 시간은 15분이었지만, 선생님은 각 팀당 한 시간씩을 할애해서 리허설을 봐주셨습니다. 우리 팀은 제일 마지막에 리허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전 8시 30분부터 시작해서 우리 바로 앞팀이 리허설을 끝낸 11시 30분쯤 되었을 때, 앞의 세팀의 발표를 지켜보던 저는 저도 모르게 압박감을 못 이겨 소리없는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습니다.

영어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팀이 한 것만큼 유창한 영어로 말하는 것이 제겐 불가능했습니다. 마침내 우리팀의 차례가 되었을 때, 저는 선생님과 학생들 앞에서 솔직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이 했던 것처럼 아름다운 영어 문장으로 말하지는 못할 거예요. 제가 버벅거리거나 말이 엉키더라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러자 선생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앞에 발표한 팀은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들이다. 이것은 너에게 공정하지 않다. 우리 모두가 그것을 안다. 영어 말고 내용에 집중해라. 여기 네가 하는 말을 이해 못하는 사람은 없다."

선생님이 있다는 게 참 좋다

발표는 무사히 끝났습니다. 소렌 교장 선생님도 보러 오셨는데, 한국에 두 번이나 다녀온 그는 한국의 사정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 프로젝트를 실제로 현실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어느 정도냐고 물었는데, 저는 솔직히 "아직은 자신없어요. 한 10년만 더 살아보구요"라고 하려고 했으나, 같은 팀원이었던 브라질 친구가 자신감있게 "예스"라고 말해버렸습니다.

한국 청년들을 위한 기숙형 인생학교를 만드는 일은 실제로 제가 해내기엔 버거운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수업이 끝난 후 저는 큰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저는 세계와 연결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마지막 수업시간에 게트루드 선생님은, 아프리카 학생들이 실제로 자기 나라에 돌아가 이곳에서 연습했던 프로젝트를 실천에 옮긴 경우를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언젠가 가나에서 온 한 학생은 수업시간에 도통 쓰는 걸 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읽고 쓸 줄을 모르는 채로 학교에 왔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무척 똑똑한 사람이어서 수업시간에 선생님과 학생들이 하는 말을 다 듣고 기억해서 프로젝트를 해냈고, 수업이 끝날 때쯤엔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생님도 처음에는 그가 문맹이었다는 것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아프리카로 여행을 간 어느 연륜 있는 덴마크 사람이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덴마크에서 장학금을 받고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 전 IPC에서 가나로 스터디 여행을 갔던 팀이 그가 실제로 활동하는 현장을 보고 왔다고도 했습니다.

마지막 수업시간에 선생님은 우리 팀을 바라보며 "너희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안다"고 하셨습니다.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너희들 스스로의 힘으로 그 문제를 풀어 나갔다. 참 잘해냈다"고도 하셨습니다. 저는 선생님께 "이 수업은 저에게 정말 의미있는 수업이었어요"라고만 말씀드렸습니다. 한국말로 할 수 있었으면 엄청나게 많은 말을 쏟아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 많은 말을 다 영어로 만들어내고 싶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만 말씀드렸습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제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다시 교사를 하게 될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선생님이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오직 그것만을 알 것 같습니다.


태그:#덴마크, #대안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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