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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읽고 쓰는 열여덟살 문학소년 아들 지우와 함께 같은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아이와는 4년여 문학의숲이라는 북클럽을 함께 하며 같은 책을 읽어오고 있는데, 그 덕분에 아이와 문학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문학을 통하여, 엄마와 아들이 함께 배우고 성장해가는 과정을 이 지면을 통해 독자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 기자말 

옷에 묻은 기억을 털어내고
입에 삼켜두었던 말들을 토해내 봐요.
이제는 어른이 될 시간.

성장통이 문文 밖에서 기다려요
(지우의 시 '놀이' 일부)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늦은 밤 집에 온 아이는, 시를 쓰곤 한다. 작년에 장석주 시인의 시 강의를 들을 때 시인은 말했다. '시는 앞으로 사라지게 될 예술 장르이고, 우리나라처럼 그나마 시집이 잘 팔리는 나라가 외국에는 거의 없다'고. 아이와 나는 공감했다. "그럼 미래엔 시인이란 직업도 없어지겠네. 영상이 대세니까". 우리는 그런 대화도 나누었다.

시를 쓰는 사람도, 읽는 사람도 없어진다는데, 아이는 지난해 고등학생이 되더니 맹렬하게 시를 읽고 시를 쓴다. 고2 새 학기가 시작되어 학부모 총회에 가서 아이의 담임 선생님을 만났더니, 선생님은 아이가 시를 쓰는 사람이 되겠다고 했다고 전한다. 시상이 떠오르면 멀미가 나듯 어지럽다고 했다는 말도.

아이가 시를 읽는 방식은 이런 식이다. 어떤 한 시인을 읽기 시작하면, 웬만하면 그 시인의 모든 시집들을 두루 찾아서 읽어 본다. 그래서 요즘엔 이민하와 김혜순 시인의 시집들이 아이의 책꽂이에 가득하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쉼보르스카 유고 시집 '충분하다'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쉼보르스카 유고 시집 '충분하다'
ⓒ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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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와바 쉼보르스카의 유고시집 <충분하다>를 접한 아이는, 허기진 것처럼 책을 맛있게 읽는다. 와... 첫 시부터 감탄사를 내뱉더니 나에게 첫 시를 읽어보라며 페이지를 펼쳐준다.

이 땅 위에서의 삶은 꽤나 저렴해.
예를 들어 넌 꿈을 꾸는 데 한 푼도 지불하지 않지.
환상의 경우는 잃고 난 뒤에야 비로소 대가를 치르고.
육신을 소유하는 건 육신의 노화로 갚아나가고 있어.
(쉼보르스카 '여기' 일부)

인생의 앞날이 창창한 십대 청소년인 아이가, 이미 삶을 다 살아버린 노시인의 유고 시집을 접하면서 터트린 감탄사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어쨌든 나는 돌아가아만 한다
내 시의 유일한 자양분은 그리움
그리워 하려면 멀리 있어야 하므로(
미완성 육필 원고 부분)

시집에서 아이가 나에게 권한 다른 시는 '십대 소녀'이다.

십대 소녀인 나?
그 애가 갑자기, 여기 지금, 내 앞에 나타난다면,
친한 벗을 대하듯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까?
나에게는 분명 낯설고, 먼 존재일 텐데.
(심보르스카 '십대 소녀' 일부)

"십대 소녀인 '나'와 현재의 '나'는 모든 것이 달라요. 몸도 생각도 시간도… 친숙하기보다는 상당히 이질적으로 느껴지죠. 그런 둘을 이어주는 것은 흥미롭게도 목도리예요. 자신의 기억, 의식 등이 아닌 엄마가 짜주었던 '사랑'의 흔적. 십대 소녀인 '나'는 목도리를 두고 가지만, 현재의 '나'는 그것을 소중히 가지고 있다는 것 또한 인상 깊어요."

아이의 말을 들으며, 그렇다면 십대 소년인 아이와 미래 노인이 될 아이에게 엄마인 내 사랑도 그의 삶을 관통하는 기억의 매개가 되어 줄 수 있을지 자문해 본다.

"쉼보르스카 시인은 기억에 대한 시를 많이 써요. 그녀에게 기억은 무엇인가 불완전하고 ('기억의 초상') 고통스러운 것. 그러니까 그녀의 삶은 기억과 공존하기엔 힘겨운 삶으로 묘사되지요."

"전체적으로 일상, 혹은 사소한 것들에 대한 색안경 없는, 순수하면서도 독특한 시선들도 돋보여요. '마이크로코스모스', '암살자들', '이혼', '유공충' 같은 시들이 특히 그래요. '마이크로코스모스'를 보면 아주 작은, 어쩌면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대한 시선이 돋보여요. 인간이 중심이 아니고 뭐랄까 생태적인 관점 같기도 하고요."

아이는 자신의 시에서 성장통에 대해 말했다. 아이에겐 다가올 삶에 대한 불안과 설렘이 공존할 것이다. 그런 아이가 이미 삶을 살아내며 노시인이 겪었던 기억과 사유들을 나눠주는 시를 읽으며, 일상도 찬찬히 바라보고 삶에 대한 철학적 사유도 느끼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 소년에겐 불안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느리게 사유하며, 느끼며 살고 싶지만 세상은 그런 걸 호락호락 허락하지 않으니까. 아이가 마지막으로 인용한 시구는 '책을 읽지 않음'이란 시의 문장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시인 비스와바 쉼보르스카는 누구?]

1923년 폴란드에서 태어난 비스와바 쉼보르스카(Wislawa Szymborska)는 199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이다. 2012년 폐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12권의 시집을 내고 <요구하지 않은 낭독>이란 산문집도 냈다. 초기의 정치적 시에서 점차 자전적인 시들로 옮겨갔다. 그의 시는 간결하면서도 정제된 표현으로, 개인의 일상적인 삶에서도 역사와 문명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는 평가다.

아이가 쉼보르스카 시에서 특히 좋아하는 부분은 시들이 무척 철학적이라는 것이다. 국내에 번역 출간된 책은 많지 않지만 시선집 <끝과 시작>이 출간되어 있고 <모래 알갱이가 있는 풍경>이 있다. 이번에 신간 <충분하다>를 다 읽고 난 아이는 벌써 <끝과 시작>을 제 아빠에게 주문을 부탁하여 읽고 있다.


충분하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지음, 최성은 옮김, 문학과지성사(2016)


태그:#쉼보르스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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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쓰고, 산책하는 삶을 삽니다. 2011년부터 북클럽 문학의 숲을 운영하고 있으며, 강과 사람, 자연과 문화를 연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한강의 공동대표이자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강'에서 환대의 공동체를 만들어나가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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