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경산 성암산에서 바라본 대구 시지 망월산
 경산 성암산에서 바라본 대구 시지 망월산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금강산 건봉사, 지리산 화엄사, 설악산 신흥사, 가야산 해인사, 오대산 월정사, 소백산 부석사, 팔공산 동화사....... 앞은 산 이름, 뒤는 절 이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모든 사찰들의 일주문에는 '금강산 건봉사' 식의 현판이 붙어 있다. 금강산 건봉사는 의미상으로는 금강산에 있는 건봉사라는 뜻이지만, 그 전체가 사찰의 이름이다.

경주 '천경림 흥륜사', 경남 김해 '초선대 금산사' 같은 예외도 드물게 있지만, 대체로 사찰명의 앞 부분은 산 이름이 차지한다. 사찰들이 산 속에 많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덕산 불광사'라는 이름은 일반적으로 불광사가 대덕산에 있다는 뜻을 담게 된다.

망월산 정상과 망월지가 한눈에 보이는 풍경
 망월산 정상과 망월지가 한눈에 보이는 풍경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대구미술관 뒤편 대덕산에는 불광사가 없다. 청계사와 백련사뿐이다. '대덕산 불광사'는 절이 대덕산에 있어서가 아니라, 대구미술관 뒤편의 여러 봉우리 중 가장 높은 주봉(主峰)의 이름을 사찰명에 사용했을 뿐이다. 이는, 1996년 불교대학을 개원한 불광사는 최근에 지어진 사찰이면서도 고색창연한 신라식 이름을 내세웠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대덕산 불광사'도 불광사가 대덕산에 있다는 뜻?

한창 불교가 왕성한 시대를 살았던 옛사람들은 산과 봉우리의 명칭을 불교식 발상의 새 이름으로 바꾸었다. 설악산 비로봉, 오대산 비로봉, 팔공산 비로봉 등에 석가모니를 뜻하는 '비로(毗盧)'를 써서 그 봉우리가 산의 최고봉을 가리킨다는 사실을 표시했고, 전국 곳곳의 산에 부처를 가리키는 대덕(大德)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 결과 대구 남구의 앞산도 대덕산이 되었고, 수성구 불광사도 '대덕산 불광사'로 불려지게 되었다.    

성암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에서 내려다 본,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길 46 불광사 앞 망월지(망월못)의 풍경. 호수 오른쪽의 적벽돌 건물은 덕원고등학교이다.
 성암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에서 내려다 본, 대구광역시 수성구 욱수길 46 불광사 앞 망월지(망월못)의 풍경. 호수 오른쪽의 적벽돌 건물은 덕원고등학교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불광사 앞에는 그리 크지 않은 호수가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이 호수는 이름이 무엇일까? 규모가 큰 호수의 못둑에는 한국수자원공사가 세운 큰 간판들이 있어 그 이름을 알기가 쉽지만, 이곳은 작은 연못이라 그런 것도 없다. 하지만 못둑을 거닐다 보면 '망월지의 두꺼비를 보호합시다'라는 팻말을 여기저기서 만나게 된다. 망월지는 이 연못의 이름이다.

망월지(望月池)라면 달을 바라보는 못이라는 뜻이다. 이 연못에 이토록 아름다운 이름이 붙은 것은 뒤쪽의 산이 망월산이기 때문이다. 해가 동쪽, 달이 서쪽의 상징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달을 바라보는 산이라는 이름은 정상에 오르면 서쪽 전망이 확 트여 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실제로 망월산에 오르면 서쪽, 그러니까 대구미술관, 범물동, 연호동, 만촌동 방향의 풍경이 그대로 눈에 들어온다. 아무 것도 거리끼는 것이 없다. 비록 대덕산이 이곳 봉우리보다 50m 가량 높지만 정상이 남쪽으로 치우져 있어 시야를 가로막지 않는다. 두리봉과 담티고개까지는 온통 들판인 까닭에 범물동, 연호동, 만촌동에서 이쪽으로 오는 것들은 차량만이 아니라 '개미새끼 한 마리'도 모두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망월산 정상부에서 바라본 대구 범물동 방향의 풍경
 망월산 정상부에서 바라본 대구 범물동 방향의 풍경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임진왜란 때 의병들은 이곳에 진을 치고 대구 쪽에서 쳐들어오는 왜군을 감시했다. 박응성 의병장을 위시한 의병들이 이곳 망월산에서 전투를 준비한 까닭은 이미 앞에서 설명했다. 망월산은 적들이 쳐들어 오는 기세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반면 망월산은 적들이 경산 쪽에서 진격해오는 경우에는 그 움직임을 포착할 수 없는 곳이다. 성암산에 차단되어 시야가 완전히 가로막혀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대구 방향인 서쪽은 '개미새끼 한 마리'가 이동하는 것까지 빠짐없이 관찰할 수 있지만, 경산 방향인 동쪽은 대군이 이동한다 해도 그 낌새를 사전에 알 수가 없다.

대구쪽은 잘 보여도 경산쪽은 전혀 안 보이는 곳에 산성을

그런데도 박응성 의병군은 적을 막기 위해 이곳에 성을 쌓고 진지를 구축했다. 어째서 한쪽만 잘 보이는 산을 의병들은 선택했던 것일까? 대구의병군의 첫 총대장을 맡았던 서사원의 <낙재일기> 1592년 4월 22일자는 그 까닭을 짐작하게 해준다.

'아침에 (팔공산) 응봉에 올라 관찰하니 파잠(수성구 파동)과 상동에서부터 불꽃이 이어지기 시작하여 가끔 치솟아 퍼지더니 적의 무리가 (대구부) 경내에 들어온 것을 알았다. 이윽고 수성현 안에 불꽃이 매우 치열하다가 얼마 후에 읍내에서도 일어났다.'

서사원의 일기는 왜군들이 청도에서 팔조령을 넘어 대구 수성구 파동과 상동으로 침입한 것을 증언한다. (1597년 정유재란 때에도 일본군은 팔조령을 넘어 대구로 쳐들어 왔다.) 4월 13일 부산에 상륙한 왜적들은 며칠도 지나지 않은 4월 22일에 이미 대구 전역을 모두 점령했던 것이다. 대구읍성은 21일에 함락되었고, 23일에는 팔공산 기슭 파계사까지 쳐들어왔다.

망월산에서 바라본 경산 쪽 풍경. 욱수골 계곡 약 100미터 정도의 폭을 사이에 두고 힘차게 솟아있는 성암산 줄기에 가로막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망월산에서 바라본 경산 쪽 풍경. 욱수골 계곡 약 100미터 정도의 폭을 사이에 두고 힘차게 솟아있는 성암산 줄기에 가로막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경산에도 읍성이 있었다. <경산 시지>는 <여지도서>를 인용, '경산읍성이 석축 둘레 320미터, 높이 3미터로 성 위에 따로 여첩(女堞, 담장)은 없고, 사방에 문과 문루(門樓, 문 위에 세워진 누각)가 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는 전국의 읍지(邑誌)를 모아 영조 때 간행된 책이다.

경산읍성 있었지만 거기서 왜적과 싸우는 것은 불가능

하지만 경산읍성만 믿고 왜적과 대적할 수는 없었다. 성곽 둘레 2700미터, 높이 5미터로 경산읍성과는 견줄 수 없을 만큼 규모가 컸던 대구읍성도 공격을 받아 바로 무너졌으니 이는 당연한 판단이었다. 박응성, 정변함, 정변호, 정변문, 진섬, 진엽 등 경산 의병들은 가파른 오르막을 사방에 거느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적의 동태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망월산에 성을 쌓고 적들을 막기로 했다.

망월산성의 흔적
 망월산성의 흔적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대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두 달 가량 지난 7월 6일에 이르러서야 선비들이 팔공산 부인사에서 창의를 결의한다. 하지만 경산 지역에서는 이미 5월 7일 최문병, 김홍, 유인춘, 박춘, 김응광, 안천민, 김응광 등이 창의를 결의하고, 5월 11일 오목천에서 왜군과 일전을 겨룬다. 박응성 의병군이 망월산성에서 왜군과 싸운 때도 6월 중순이었다. 최응담 의병장이 대구와 청도의 경계인 남성현에서 왜적 30여 명을 죽이고 말 10여 마리를 빼앗은 때도 6월 11일이었다.

<내 고장 전통>(경산시)에는 정경세가 '경산여두소읍(慶山如斗小邑) 수선창의(首先倡義)'라고 하여 경산 사람들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일찍 창의했다고 말한 기록이 게재되어 있다. 어째서 경산 지역은 창의가 일찍, 활발하게 일어났을까?

경산 지역에 의병이 일찍 일어나 활동한 까닭

<경산 시지>는 '대구, 경주 등지가 적에 의해 장악되어 의병 활동이 여의치 않았던 것과는 달리 경산 지역은 적이 약탈을 자행하기는 했으나 주둔하지 않아 의병 모집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때문'이라고 자평한다. <경산 시지>의 기록은 '일본군은 (경산에는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았지만) 부산 8천, 동래·(경남) 양산·밀양 1500, 청도·대구 1500, 창원 5천, 금산(김천) 4천, (김천) 개령 1만, (경북) 선산 1500, 상주 4천, 함창 1천, 문경 2천, 도합 4만여 병력을 머물러 두었다'라는 이형석 <임진전란사>의 기록이 뒷받침을 하고 있다.

망월산 정상부에서 바라본 대구 만촌동 방향의 풍경
 망월산 정상부에서 바라본 대구 만촌동 방향의 풍경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망월산 일대에는 박응성 의병군의 피땀이 서린 산성 흔적이 곳곳에 흐릿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임진왜란을 당해 왜군들이 출몰하는 상황에서 부랴부랴 쌓은 만큼 튼튼하고 웅장하게 축성되지 못했으므로 지금 남아 있는 자취는 당연히 미약하다. 본래 삼국 시대 옛성인 고포성(古浦城) 성터에 덧붙여 쌓아올린 것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게 고증된 상태는 아니다.

망월산성에 올라 왜적들이 쳐들어온 경로를 살펴본다. 정상과, 정상에서 대구스타디움으로 약간 하산했을 때 나타나는 큰 바위 위가 조망을 하기에 가장 적당한 지점이다. 대구미술관과 대구스타디움 앞으로 펼쳐져 있는 고산 들판이 한눈에 다 들어온다. 두사충의 무덤이 있는 형제봉과 그 왼쪽의 두리봉, 그리고 대덕산으로 이어지는 희미한 능선 탓에 대구 시내까지 또록또록하게 눈에 담을 수는 없지만, 그 능선과 망월산 사이 넓은 들판의 것들은 무엇이든 육안으로 확인된다. 임진왜란 때 이곳에 서서 왜적의 동태를 살펴보았던 의병들과 같은 기분을 잠시 느껴본다.

박응성 의병장의 묘소
 박응성 의병장의 묘소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이곳에는 꼭 답사해 보아야 할 유적이 한 곳 더 있다. 박응성(朴應成) 의병장 묘소가 바로 그곳이다. 망월산에서 남쪽으로 능선을 타고 계속 걸어 만보정이라는 정자에 가고,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성암산 정상을 향해 오르면 박씨재실이 나타난다. 대략 두 시간 가량 걸은 사람만이 닿을 수 있는 곳이다.

박응성 의병장 묘소, 꼭 찾아 보아야

길이 멀지만 그래도 가파른 험로가 없어 누구든 마음만 먹으면 박씨재실에 닿을 수 있다. 어떻게 이리도 높은 산지에 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싶지만 어쨌든 재실에서 동북쪽으로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박응성 의병장의 묘소가 있다. 능선 꼭대기를 타고 이어지는 임도이자 등산로를 가운데에 두고 재실과 묘소는 각각 반대편에 있다.

묘소 앞에는 '선무원종공신 증병조참의 밀양박공지묘'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다. 성씨만 있고 이름이 밝혀져 있지 않지만 이곳은 '밀양박공응성지묘'이다. 박응성 의병장의 묘라는 말이다. 무덤 앞에 참배를 한 후 그의 생애를 잠깐 돌이켜 본다.

박응성 의병장의 산소. 뒤로 의병장의 아버지 박인(朴麟)의 묘가 보인다.
 박응성 의병장의 산소. 뒤로 의병장의 아버지 박인(朴麟)의 묘가 보인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박응성은 밀양박씨 대사헌 박해(朴咳)의 5대손으로, 아버지는 주부 박인(朴麟)이다. 그는 1592년에 타계했다. 의병장이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가 전사했다는 사실을 대뜸 짐작이 된다.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 박응성은 세 아들 박근, 박장, 박헌, 그리고 집안동생 박응량, 경산 선비 정변한, 정변호, 정변문 삼 형제와 진섬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켰다. 경북 고령에 본부를 둔 경상우도 의병도대장 김면 휘하로 활동을 펼친 박응성은 망월산에 성을 쌓고 일본군에 대적했다. 1592년 6월 중순, 금산(경북 김천)에서 대구로 왜군 부대가 이동 중이라는 김면 의병도대장의 연락이 왔다. 박응성 의병군은 망월산성에서 적들을 물리쳐 왜군의 경산 집입을 막았다.

세 아들, 집안동생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박응성

6월 하순 김면 의병군의 성주성 공격에 동참하기 위해 낙동강 물가로 이동했다. 이 무렵 적들은 성주, 현풍 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올 때면 낙동강 수로를 이용하여 배를 타고 다녔다. 배에는 항상 많은 군사 장비들과 군량미 등이 실려 있었다.

7월 17일, 적 300여 명이 배를 타고 또 나타났다. 잠복한 채 기다리고 있던 의병들은 일제히 적선을 공격했다. 하지만 무기와 병사 수에서 불리했던 아군은 오히려 궁지에 몰렸다. 이 전투에서 박응성 의병장, 그의 세 아들 박근, 박장, 박헌이 모두 죽었다. 그 외에도 장사길(張士佶), 민척(閔惕) 등의 용사들이 전사했다.

박응성과 세 아들은 임진왜란 의병이 되어 1592년 7월 17일 낙동강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같은 날 함께 전사했다. 박응성의 막내아들은 겨우 열 살이라 싸움터에 나아가지 않고 어머니 안씨부인과 함께 망월산 주변 깊은 산속 동굴에 숨어 지냈다. 무덤은 그 막내아들 박선의 묘소이다.
 박응성과 세 아들은 임진왜란 의병이 되어 1592년 7월 17일 낙동강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같은 날 함께 전사했다. 박응성의 막내아들은 겨우 열 살이라 싸움터에 나아가지 않고 어머니 안씨부인과 함께 망월산 주변 깊은 산속 동굴에 숨어 지냈다. 무덤은 그 막내아들 박선의 묘소이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박응성 의병장의 막내아들 박무(朴珷)는 당시 겨우 열 살밖에 안 된 아이였다. 그래서 아버지와 형들을 따라 전쟁터로 가지 못한 채 집에 남았다. 박무는 어머니 안씨부인과 함께 망월산 뒤쪽 깊은 동굴에 숨어 지내면서 풀뿌리를 캐먹고 연명했다. 특히 왜군들이 의병 가족을 찾아 보복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박응성 의병장 가족에 대한 일을 보고받은 선조는 "종사(宗社, 나라)의 중신이요, 나에게 구슬(璇)과 같도다"라고 찬탄했다. 1605년(선조 38) 조정은 박응성 의병장을 병조참의에 추증하고, 선무원종공신으로 책록했다. 물론 세 아들도 포상을 하였다.

열 살 먹은 막내아들만 살아 남은 박응성 집안

박무는 그 후 이름으로 박선(朴璇)으로 바꾸었다. 1610년(광해 2) 박선은 무과에 급제하여 비인, 해남 현감 등을 지냈다. 박선의 묘소는 아버지 박응성 의병장 산소 인근 동북쪽 지점에 있다. 1592년 7월 17일 이래 박응성 의병장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막내아들 박선, 지금도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한쪽 어깨에 살폿 몸을 기댄 채 누워 있다.

망월산 정상에서 바라본 대구 수성구 시지 아파트 단지의 풍경. 멀리 팔공산이 보인다. 사진 중간 일대에 가로로 길게 이어져 보이는 낮은 능선이 고산토성 자리이다. 왜군들은 망월산성과 고산토성 사이의 들판을 통로로 지나다녔다.
 망월산 정상에서 바라본 대구 수성구 시지 아파트 단지의 풍경. 멀리 팔공산이 보인다. 사진 중간 일대에 가로로 길게 이어져 보이는 낮은 능선이 고산토성 자리이다. 왜군들은 망월산성과 고산토성 사이의 들판을 통로로 지나다녔다.
ⓒ 정만진

관련사진보기


박응성 의병장 유적지를 둘러 보았으니 소감이 없을 리 없다. 망월산 정상, 그리고 그의 묘소와 박씨재실 사이의 능선 지점에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펼쳐졌던 의병의 활약상과 박응성 의병장을 기리는 안내판이 세워져야겠다. 직접 묘소를 찾는다 해도 한자에 익숙하지 않으면 그곳이 박응성 의병장 유적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도 많을 터, 안내판은 응당 한글 전용이 좋을 것이다. 박무가 박선으로 개명을 하였듯, '대덕산 불광사'도 '망월산 불광사'로 이름을 바꾸어 역사적, 지리적 의미를 안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이리라.


태그:#박응성, #망월산성, #임진왜란, #의병장, #불광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