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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과 개신교를 아우르는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부활주일을 앞둔 주간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이 주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십자가 수난을 당한 뒤 죽임 당했다가 부활한 것을 기억하는 주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주일이 있는 주간을 성주간, 혹은 고난주간이라고 합니다.

올해 부활절은 27일이고, 그래서 모든 교회가 이번 주간을 성주간으로 보냅니다. 공교롭게도 성주간 첫날인 21일, 전 민주주의가 수난당하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현 정부, 좀 더 멀게는 이명박 정권 들어 민주주의의 위기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부쩍 높아졌습니다. 박근혜 정부는 더합니다. 해가 갈수록 시간이 유신을 향해 거꾸로 흐르는 듯 보입니다. 이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아래 기장)는 21일 오후 서울 덕수궁 앞 대한문 광장에서 '고난당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긴급시국기도회'(아래 시국기도회)를 열었습니다.

"민주주의는 종교"

지난 21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주최로 열린 '고난당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국기도회'.
 지난 21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주최로 열린 '고난당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국기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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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주최로 열린 '고난당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국기도회'가 열린 가운데 총회장인 최부옥 목사(가운데)가 입장하고 있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주최로 열린 '고난당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국기도회'가 열린 가운데 총회장인 최부옥 목사(가운데)가 입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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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주최로 '고난당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국기도회'가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반민주정권 심판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지난 21일 오후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광장에서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주최로 '고난당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시국기도회'가 열린 가운데 참가자들이 '반민주정권 심판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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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기장 교단은 다른 보수 장로교단과 달리 진보성향이 강합니다. 사회참여도 활발해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1972년 유신, 1980년 5.18 광주 민주항쟁,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등 현대사의 격변기마다 십자가를 짊어지고 거리로 나섰습니다.

기장은 현 정권 들어서도 국가정보원(국정원) 정치개입, 세월호 참사, 통합진보당 해산, 역사 교과서 국정화, 한일 위안부 합의, 개성공단 중단 등 시국현안에 대해 예언자적 목소리를 냈습니다.

특히 이번 시국기도회는 민주주의가 갈수록 껍데기로 전락하고 있는 와중에, 그리고 오는 4월 총선을 앞둔 와중에 열렸습니다. 그래서인지 기도회 분위기는 절박했고, 간절했습니다. 기독교평화연구소장인 문대골 목사의 외침은 이런 분위기를 압축해 전해줍니다.

"여러분,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은 쉬지 말아야 합니다. 이 싸움은 이기기 위해 하는 싸움이 아닙니다. 민주주의는 종교입니다. 감옥에 가도, 싸우다 죽어도 해야 하는 것이 민주주의입니다. 박근혜는 죽었다 깨어나도 민주주의 못합니다."

문 목사의 발언 직후 시국기도회 상황을 주시하던 경찰이 바빠졌습니다. 정보담당 형사들의 숫자가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전담 채증요원 두 명이 합류했습니다. 그럼에도 기도회는 큰 불상사 없이 마무리됐습니다. 그러나 기도회 뒤 이어진 행진에서 끝내 충돌상황이 불거졌습니다.

시국기도회를 마친 기장 교단 지도부와 참가자들은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농성장이 마련된 옛 국가인권위원회(인권위) 건물을 향해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당초 계획은 농성장 방문을 하고,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성찬예식을 한 뒤 마무리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행진대열이 옛 인권위 건물을 지나 광화문 광장으로 향하는 순간 길을 막아섰습니다.

경찰의 집회방해, 낯설지가 않다

기장 목회자와 성도들은 시국기도회를 마친 후 광화문 세월호 광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가 경찰의 저지에 막혔다.
 기장 목회자와 성도들은 시국기도회를 마친 후 광화문 세월호 광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가 경찰의 저지에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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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기도회를 마친 기장 교단 목회자와 성도들은 옛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을 지나 광화문 세월호 광장으로 행진하다가 경찰의 저지에 막혔다. 참가자들은 행진을 계속하려 했으나 경찰은 스크럼을 짜고 버텼다.
 시국기도회를 마친 기장 교단 목회자와 성도들은 옛 국가인권위원회 건물을 지나 광화문 세월호 광장으로 행진하다가 경찰의 저지에 막혔다. 참가자들은 행진을 계속하려 했으나 경찰은 스크럼을 짜고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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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 있던 정보담당 형사는 "집시법(집회와시위에관한법률) 상 참여 인원 300명 이하인 경우 인도로만 행진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시국기도회 운영위원들은 "경찰이 평화로운 집회 및 행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해놓고 이를 어기려 한다"고 맞섰습니다.

약 100여 명 남짓했던 참가자들은 경찰의 저지에도 아랑곳없이 행진을 계속하려 했고, 이러자 경찰은 스크럼을 짜고 버텼습니다. 결국 참가자들은 평화로운 행진 보장을 요구하며 그 자리에서 연좌농성에 들어갔습니다.

이 광경을 본 한 정보담당 형사는 "시위대(?)가 말을 안 듣는다"고 볼멘소리를 냈습니다. 그러나 시국기도회 주최 측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한 목회자는 "참여 인원은 경찰이 행진을 막기 위해 내세운 핑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집시법 조항을 찾아보았습니다. 해당 법령엔 시위참여 인원에 대한 제한규정은 없었습니다. 단 12조 1항에 "관할경찰관서장은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주요 도시의 주요 도로에서의 집회 또는 시위에 대하여 교통 소통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인정하면 이를 금지하거나 교통질서 유지를 위한 조건을 붙여 제한할 수 있다"고만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동 조항 2조는 "집회 또는 시위의 주최자가 질서유지인을 두고 도로를 행진하는 경우에는 제1항에 따른 금지를 할 수 없다"고 밝혀 놓았습니다.

현장에서 목격한 상황을 요약해 보겠습니다. 현장엔 운영위원들이 배치돼 시국기도회 참가자들의 동선을 세심하게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회 참가자들이 폭력 시위를 계획하고 쇠파이프 같은 연장을 소지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더구나 경찰이 막아선 지점은 시청 뒤편에서 청계천으로 향하는 이면도로여서 교통에 지장을 준다고 보기에도 애매합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 같은 전후 사정은 싹둑 잘라낸 채 참여인원이 적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행진을 막았으니, 그저 의아할 뿐입니다.

경찰이 행진을 불허하자 시국기도회 참가자들은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간이의자를 놓으려 하자 경찰은 이를 빼앗으려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불거졌다.
 경찰이 행진을 불허하자 시국기도회 참가자들은 연좌농성에 들어갔다. 이때 간이의자를 놓으려 하자 경찰은 이를 빼앗으려 시도했고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불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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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국기도회 참가자들은 연좌농성을 위해 간이의자를 마련했으나 경찰은 이를 빼앗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불거졌다.
 시국기도회 참가자들은 연좌농성을 위해 간이의자를 마련했으나 경찰은 이를 빼앗으려 했고,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불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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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농성 역시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참가자들은 찬송가를 부르고 연대발언으로 분위기를 띄웠습니다. 이러자 경찰은 불법집회라며 해산을 '명령'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갑자기 경찰과 참가자들 사이에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발단은 의자였습니다. 운영위원들은 연좌농성이 길어질 것에 대비해 간이의자를 준비해 왔습니다. 바로 이때 경찰이 일사불란하게 의자를 탈취하려 했습니다.

이날 시국기도회엔 고령의 목회자, 장로들이 상당수 참석했습니다. 간이의자는 이들을 위한 배려였습니다. 그런데 경찰은 이마저 빼앗으려 했던 것입니다. 경찰의 이런 모습은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경찰은 지난해 4월 세월호 1주년 당시 세월호 유가족들을 광화문에 몰아넣고 차벽으로 이들을 포위했습니다.

경찰은 유가족들이 화장실 가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았고, 이에 여성 유가족들은 임시로 가리개를 만들어 용변을 해결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한일 위안부 합의 직후 대학생들이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칼바람을 마다않고 노숙했을 당시, 경찰은 '도로법'을 이유로 천막 반입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세월호 2주기 집회의 전주곡인가

기장은 시국기도회를 마친 후 성찬예식을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경찰에 의해 행진이 막히자 길거리에서 성찬예식을 진행했다. 가운데는 최부옥 총회장.
 기장은 시국기도회를 마친 후 성찬예식을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진행하려 했다. 그러나 경찰에 의해 행진이 막히자 길거리에서 성찬예식을 진행했다. 가운데는 최부옥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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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과의 대치가 길어지자 결국 광화문 세월호 광장에서 하려던 성찬예식을 거리에서 하게 됐습니다. 성찬예식 진행을 위해 제대를 설치하려고 했으나 경찰이 또 나서서 설치를 막으려 했습니다. 결국 기도회 참가자 가운데 젊은이들이 나서서 스크럼을 짜고 혹시 있을지 모를 경찰의 진압에 대비했습니다.

성찬예식을 집례한 기장 최부옥 총회장은 안타까운 어조로 "지금 이 광경이 박근혜 정권의 민낯"이라며 탄식했습니다.

전 아무래도 21일 벌어진 일이 오는 4월 있을 세월호 2주기 집회의 전주곡으로 보입니다. 세월호 1주기 집회 당시 경찰은 차벽을 설치해 시청광장에서 광화문으로 추모하러 오는 시민들의 행렬을 차단했습니다. 전 당시 차벽 뒤편에 있었는데, 우연히 경찰들이 무전을 주고받는 광경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오고가던 무전 내용은 아직도 잊히지 않습니다.

"이거(경찰차벽) 잘 만들어놓았어, 저 사람들 절대 못넘어와."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백남기 농민은 130일 넘게 의식을 찾지 못하는 지경입니다. 그런데 지금 경찰의 행태를 보니 앞으로 치러질 세월호 2주기 집회에서또 다른 백남기를 만들지는 않을지 벌써부터 걱정스럽습니다.

삼청교육대 최장기수 출신인 민통선평화교회 이적 목사는 경찰의 행진저지에 대해 "이제는 공권력이 목회자들의 평화로운 행진과 종교의식을 방해하는 지경까지 왔다"고 심경을 전해왔습니다. 현장에 있던 성야고보교회 이윤상 목사 역시 비슷한 심경을 남겼습니다. 이 목사의 말입니다.

"이전에 경찰이 집회 참여인원을 문제 삼은 적은 없었다. 그리고 기장 교단 목사와 성도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본분을 지키려 애썼다. 그러나 공권력은 행진대열을 움직이지도 못하게 했다.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기는커녕 짓누르려 하니, 아무래도 현 정부가 자신감이 없어 보인다. 시국기도회에서 십자가를 앞세웠는데, 이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거기에 매달려야 하는 때가 오고 있는 것 같다는 판단이다."

여러 목사들의 지적대로 이제 공권력은 집회의 자유를 원천 봉쇄하고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국제사회는 일찌감치 경고음을 보냈습니다. 올해 1월 마이나 키아이 UN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은 "한국에서 집회에 전반적으로 부당한 제약이 가해진다"고 지적하고 나섰습니다.

이명박, 박근혜로 이어지는 보수 정권 8년 동안 민주주의는 수난에 수난을 거듭했습니다. 그런데 올해 민주주의는 더 큰 수난을 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당장 다음 달에 총선이 치러집니다. 현 정권은 총선에 올인하는 모양새입니다. 소위 '진박'을 국회에 진출시켜 박근혜 대통령의 임기후반 레임덕을 막겠다는 계산으로 풀이됩니다.

이런 계산하에 박 대통령은 텃밭인 대구와 부산을 찾아 '사실상의' 선거운동을 벌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이런 행보를 보이면서 선거개입 논란은 안중에도 없어 보입니다.

더구나 이달 2일 국회 본회의에서는 테러방지법이 우여곡절 끝에 통과되는가 하면, 이어 사이버 테러방지법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 가운데 민주주의는 곳곳에서 찢기고 찔리는 수난을 당하는 중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성주간의 첫날, 21일에 거리에서 벌어진 일은 수난 당하는 민주주의의 한 단면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요? 진정, 이 땅의 공의와 평화를 염원하는 모든 이들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십자가를 짊어지고 고난의 언덕을 올라갈 각오를 다져야만 하는 시기로 여겨집니다.


태그:#한국기독교장로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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