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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는 독일로 보낼 기사를 마무리하고 있다. 일본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부의 반인륜적 집단행동에 대한 고발이 그 내용이다. 한국인과 자이니치, 그리고 오키나와인들에 대해 집단 강제수용이 골자를 이룬다. 전에 뉴욕타임스 패트릭 가와구치 기사 내용에다가 새로운 사실을 추가했다. 특히 K에 대한 인터뷰 기사와 그가 어떻게 살인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재판도 없이 구금돼 있다는 르포도 K 사진과 함께 공개할 계획이다.

임신 3개월이 훌쩍 지나며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약간 땀이 많아진 것 같다. 아래에서는 분비물도 자주 묻어 나오는 듯하다. 엄마가 챙겨주는 밥을 잘 먹어서인지 몸무게가 조금 늘었다. 예전에 선배들이 태교를 한다면서 모차르트를 골라 듣는다는 얘기를 했을 때, 유난을 떤다며 면박을 줬던 미키다. 그러나 자신이 지금 모차르트 소품을 인터넷에서 내려 받아 한 개의 폴더에 가지런히 모으고 있다. 자신이나 K를 닮았다면 머리가 좋을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래도 아이를 가진 엄마는 아이에게 좋은 것이라면 혐오음식도 먹을 기세다. 미키도 별반 다른 임부와 다르지 않다.

미키에게 K가 너무나 간절하다. 유약하게 보이는 외모와는 달리 안으로 강한 미키다. 하지만 임신으로 겪는 다른 여성들처럼 우울 증상도 피할 수 없었다. K가 곁에서 미키를 돌봐줄 수 있었다면 덜 했을 것이다. 미키에게 지금 현실은 심리적 불안, 그 자체다. K의 부재와 함께 태아에 대한 애착과 걱정이 섞인 심리적 혼돈이다. 그 이유를 딱히 댈 수가 없어도 평소 긍정적이고 명랑한 미키가 어두워졌다는 것은 분명하다.

애틋한 서부영화 <셰인(Shane)>과 제임스 딘, 록 허드슨,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당대의 명배우들이 출연한 영화 <자이언트(Giant)>를 연출한 조지 스티븐스 감독의 흑백영화 1951년작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가 떠오른다.

멋지게 생겼지만 호텔 벨 보이 노릇을 하면서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청년 조지(몽고메리 클리프트). 그는 부유한 기업가인 당숙 찰스 이스트맨이 운영하는 공장에 취직했다. 따분하고 외로운 직장생활을 하던 중 그 공장의 여직원 앨리스(셸리 윈터스)와 사귀게 된다. 조지는 승진을 하고, 사장인 찰스 이스트맨의 소개로 그 지역 사교계에 데뷔를 한다.

영화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에서 임신한 앨리스(셸리 윈터스)는 조지(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안젤라(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빠져서 자신을 등한시하자 불안한 마음에 당장 공회당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하지만 공회당 문은 닫혀 있다.
 영화 <젊은이의 양지(A Place in the Sun)>에서 임신한 앨리스(셸리 윈터스)는 조지(몽고메리 클리프트)가 안젤라(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빠져서 자신을 등한시하자 불안한 마음에 당장 공회당으로 가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하지만 공회당 문은 닫혀 있다.
ⓒ 영화 <젊은이의 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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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서 아름답고 교양이 있는데다 부유하기까지 한 안젤라(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만나 한눈에 반해 버린 조지는 앨리스를 잊는다. 그러나 앨리스는 조지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다. 앨리스는 조지가 자신을 외면하려드는 게 모두 안젤라 탓이라면서 자기와 결혼하지 않으면, 임신 사실을 안젤라에게 알리겠다며 조지를 협박한다.

뾰족한 수가 없던 조지는 앨리스를 죽이기로 마음먹지만 양심의 가책으로 혼란스럽다. 조지는 유원지에서 거짓 이름으로 배를 빌려 앨리스를 태우고 호수 한 가운데로 나간다. 앨리스는 조지에게 결혼을 재촉하면서 "당신, 나를 죽이고 싶지? 나를 없애 버리고 그 여자에게로 가고 싶지? 내가 귀찮은 거지?"라고 악을 쓴다.

그러자 조지는 결혼을 다시 약속한다. 그 순간 믿어지지 않게 기쁜 앨리스는 배에서 일어나 조지에게 다가가고 우연인지 계획적인지 배는 크게 흔들리다가 뒤집어진다. 앨리스는 물에 빠져 숨진다. 조지는 수영을 해서 살아남는다. 아무 일이 없다는 듯 현장을 떠난  조지는, 그러나 앨리스를 살해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사형을 선고받게 된다.

이 영화에서 임신한 앨리스가 조지에게 느끼는 불안, 조지가 떠날 것 같은, 그리고 아이에 대한 애착이 겹치는 심리가 바로 미키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직 기사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그러나 심란한 마음과 잠시 씨름을 한 뒤라 그런지 잠이 쏟아진다. 거실로 나가서 소파에 잠시 기댄다. 스르르 잠이 막 드는 순간이다.

"미키, 점심 먹어야지?"

엄마가 소파에 누운 미키 귀에 대고는 자상한 목소리로 묻는다.

"어휴, 엄마. 막 잠들려 하잖아요."

미키는 손으로 엄마를 내친다. 신경질이 묻어 있는 목소리다.

"그래, 그래. 나중에 먹자."

오래 전 미키를 배에서 키웠던 엄마가 미키 심기를 알아챈다. 그리고 돌아선다. 다시 눈을 감은 미키는 엄마에게 괜히 짜증을 냈다는 생각이다. 소파에서 일어난 미키는 싱크대에서 설거지하는 엄마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뒤에서 엄마를 꼭 껴안는다.

"엄마, 미안해요. 요즘 이상하게 예민해지네요."

엄마는 돌아서서 물 묻은 손을 수건에 닦고는 미키 머리를 쓰다듬는다.

"미키, 엄마도 널 가졌을 때 그랬단다. 너무 걱정하지 마."
"그래도, 미안해. 엄마."

모녀는 껴안는다. 서로 엄마와 딸, 그리고 여성이라는 것을 다시 확인한다. 미키 방에 있는 휴대폰 벨이 울린다. 미키는 전화를 받기 위해 방으로 들어선다.

"여보세요."
"이토 기자님, 안녕하세요. 저 오하랍니다."

뜻밖에도 오하라 검사, 아니 지금은 법복을 벗은 오하라 변호사다.

"오하라 검사님, 건강은 어떠세요? 퇴원하셨어요?"

미키는 자신을 도와줄 친구를 본능적으로 느끼며, 반가워한다.

"네. 지난주에 퇴원했습니다. 몸은 괜찮고요."
"다행이네요. 걱정이 좀 되더라고요."

"걱정은요. 저 같은 놈에게 동정을 베풀지 마세요."
"동정이라뇨. 그냥 저는 늘 친절한 오하라 검사님이 건강했으면 하는 바람일 뿐이에요."

"고맙습니다. 그리고…."
"네?"

"K와 관련된 얘긴데요."

멀리 바다위로 해가 수평선으로 시나브로 떨어지고 있다. 도쿄에서 조금 떨어진 지바현에 있는 포트타워다. 미키는 싱숭생숭하게 125m 높이 포트타워 120m쯤에 위치한 전망대 3층 티룸에서 망고 주스를 마시고 있다. 오하라가 선택한 곳이다. 약속 시간은 오후 5시 30분이다. 집에서 오후 3시쯤 출발했지만, 중간 외곽도로가 밀려서 약속시간이 거의 다 돼서 도착했다. 오하라는 아직 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오하라를 태운 전동 휠체어가 들어온다. 휠체어 뒤를 따르는 사람은 전에 오하라 클라우드 자료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알려줬던 후배 고바야시 에이지다. 오하라는 짙은 갈색 선글라스를 쓰고 있다. 미키는 아직 오하라 시력이 돌아오지 않은 줄로만 여긴다. 아직까지도 그의 완전 실명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미키가 자리에서 일어나 오하라 손을 잡고 인사한다.

"잘 지내셨죠?"
"이토 기자님 덕분에요. 건강은 어떠세요? 임산부가 건강해야 태아도 튼튼하니까요."

오하라는 여느 때처럼 반가운 목소리로 말을 건넨다. 그러나 미키는 의아해 한다. 자신이 아이를 가졌다는 얘기를 오하라에게 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검사님이 어떻게…?"
"아니, 실례가 됐다면 미안해요. 이토 기자님 일했던 곳에 정치부 차장으로 있는 친구가 얘기해 주더군요. 그래서 퇴사하셨다고…."

미키는 어이가 없다. 정부의 압력이 들어오기도 전에 알아서 기었던 방송사였다. 언론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해 사직한 것이 어떻게 임신 때문에 회사를 떠난 것으로 변했나 싶어서다.

"사실이 아니에요. 검사님도 아시다시피 회사 분위기가 요즘 영 아니잖습니까. 그래서 데스크하고 기사에 대해 충돌이 있었고요. 그 이유로 사표를 던진 겁니다. 절대 임신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전해들은 오하라 잘못은 아니다. 하지만 방송사 특성상 결혼도 안 한 여기자가 동거하면서 임신을 했고, 그것으로 물의를 일으키지 않으려 퇴사했다는 얘기가 만들어진 그 분위기 자체가 싫었다. 이젠 떠났으니 자신의 결정이 옳았다는 생각으로 약간 불쾌해진 마음을 다스린다.

"그렇지 않아도 어제 병원에 다녀왔어요. 뱃속에서 아이가 잘 자라고 있다더군요. 컨디션도 좋은 것 같고, 엄마가 해 주는 밥 잘 먹고 삽니다."
"아기가 이토 기자 닮았으면 아들이든 딸이든 예쁠 거예요."

오하라가 뒤늦게 주워 담는다.

"오하라 검사님은 언제나 맞는 말만 하시네요."

미키도 오하라의 배려에 마음이 풀린다. 잠시 어색한 적막이 이어진다. 하지만 이내 오하라가 다시 얘기한다.

"저, 알려드릴 게 있습니다. K가 옮겨졌다고 합니다."
"네? 어디로요?"

K 얘기에 미키는 극도로 예민해진다.

"혼슈 북단 쪽입니다.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드리도록 하고요."

오하라가 고바야시에게 손짓한다. 고바야시가 작은 상자를 하나 전한다.

"이게 뭐죠?"
"휴대폰입니다. 감청이나 도청이 불가능한."

"갑자기 왜 저에게 이걸 주는 거죠?"
"혹시나 해서요. 다케우치 실장이 아직 이토 기자를 예의 주시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그분 편집증적인 것 아시죠? 그래서 저희가 역으로 다케우치 실장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래서 이 먼 곳까지 오시게 했고요. 이 건물은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유선은 물론 무선 도청이나 감청이 불가능한 곳입니다. 게다가 사진 촬영도 어렵고요."

미키는 섬뜩했다. 그리고 아직까지 다케우치가 자신의 모든 것을 엿듣고 있다든지, 그의 눈초리가 자기 몸을 더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힐러리 스웽크가 출연한 영화라고는 믿지 못할 정도로 비평가들의 악평을 받았지만, 그녀의 히스테리와 '전투력'이 잘 묻어난 2011년 영화 <레지던트(The Resident)>에서 줄리엣이 느꼈던 것과 흡사하다.

의사인 줄리엣은 남자 친구와 헤어진 뒤 이사한다. 싼값에 꽤나 괜찮은 집을 구한 그녀가 기뻐하는 것도 잠시다. 누군가가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친절하고 지적인 데다 부자인 겉보기와는 달리 관음증 환자인 집주인 맥스(제프리 딘 모건)가 범인이다. 줄리엣이 느꼈던 불쾌감과 당혹감, 그리고 자신을 지켜보는 관음증 환자에 대한 분노가 섞여 있는 느낌이 바로 미키가 느끼는 그것이다.

영화 <레지던트(The Resident)>에서 줄리엣(힐러리 스웽크)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을 받는다. 그 당사자는 관음증 환자인 집주인 맥스(제프리 딘 모건)로 밝혀진다.
 영화 <레지던트(The Resident)>에서 줄리엣(힐러리 스웽크)는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불쾌한 느낌을 받는다. 그 당사자는 관음증 환자인 집주인 맥스(제프리 딘 모건)로 밝혀진다.
ⓒ 영화 <레지던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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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다케우치, 그 사람은 내게 왜 이러는 것일까요?"
"세상의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고, 그래서 누구라도 지배해야 한다는 망상 때문이죠."

어디를 바라보는지 알 수 없는 오하라가 간단하고 정확하게 일러준다.

"이토 기자님,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의 극비 모임이 있습니다. 과거에 잘못했던 이들에게 속죄한다는 뜻에서 만든 것이죠. 지금 모임과 함께 K를 빼내오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만 알아 두세요. 조금이라도 비밀이 새 나가면 안 되는 일이니까요."
"그럼, 언제쯤요?"
"그냥 임박했다는 것만 아시면 됩니다. 실행하게 되면 바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미키는 기뻤다. 우선 K에 대한 소식을 들었고, 곧 이어 만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만으로도 눈물이 난다. 포트타워 전망대로 비쳐지는 해너미 풍경이 마치 지난겨울 K와 여행했던 해돋이에서 본 것처럼 붉디붉다.

"개자식들."

다케우치 심사가 뒤틀려 있다. 미나미 의원과 다나카 단장을 싸잡아 욕하는 소리다. 다나카 단장 주재로 최고의사결정연구단 전체회의가 열린 뒤다. 10여명 주요인사들이 모두 모인 회의에서 미나미는 동북수용소 수감자 탈출 사건에 대해 모든 책임을 다케우치에게 돌렸다. 그들 수감부터 관리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비난이었다. 다나카 또한 이는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며, 징계위원회 운운하면서 다케우치 신경을 긁었다.

그래서 다케우치는 철저하게 봉쇄돼 있는 상황이라 통제 가능하고, 현재 자위대 2개 대대가 도주자들을 추적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다케우치에게 미운털을 박아 놓은 두 사람은 '기회는 찬스'라고 외치듯 사사건건 다케우치의 발목을 잡았다. 그리고 급기야 이 사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한다는 명분으로 다음 주에 징계위원회를 소집한다고 일방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다.

"2개 대대 뿐 아니라 3개 대대를 더 동원해서 개미 한 마리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해. 만일 1명이라도 탈주자 봉쇄에 실패한다면 옷 벗을 각오 하란 말이야. 알아 들었어?"

언제나 폭력은 전이된다. 다케우치는 미나미와 다나카로부터 받은 수모를 애꿎은 육상자위대 동북방면대 총감부 책임자에게 투사한다. 전날 마신 술이 아직도 덜 깬 것처럼 얼굴이 달아오른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오하라의 빈자리가 크게만 느껴진다.


태그:#젊은이의 양지, #영화 레지던트, #육상자위대, #동북방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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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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