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얼음> 프레스콜

▲ 혁이를 취조하는 형사들 지난 2월 17일, 서울 대학로 수현재씨어터에서 열린 연극 <얼음> 프레스콜 현장에서 형사1(박호산)과 형사2(김무열)이 빈 의자를 바라보며 용의자 혁이를 취조하고 있다. 박호산 배우가 연기하는 형사1은 베테랑이다. 그의 행동 동기도 명확하지 않고, 전사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불친절'한 캐릭터이지만, 불친절함을 불편함이 아닌 매력으로 끌고 가는 완급이 돋보인다. 소극장으로 돌아온 김무열 배우는 형사2 역할을 굉장히 '차진' 욕과 함께 물 흐르듯 소화한다. 인상적이지만 지나치게 튀지도 않는 그 선을 잘 유지한다. ⓒ 곽우신


어두운 취조실, 낡은 조명은 깜박거리고 책상에는 두 개의 의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아무도 없는 이 공간에 나이 든 형사가 들어온다. 그는 자신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빈 의자를 향해 부드럽게 말을 건다. 비어 있는 의자에는 사실 용의자가 앉아 있다. 관객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형사의 눈에는 똑똑히 보인다.

18살 혁이는 살인사건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다. 피해자는 유영지. 잔혹하게 토막 나서 각 신체 부위가 따로 흩어진 채 발견됐다. 그리고 유영지와 가장 마지막까지 함께 했던 사람이 혁이었다.

마음이 아픈 혁이, 하지만 순수한 혁이. 영지 누나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혁이는 정말로 영지 누나를 잔인하게 살해했을까? 혁이를 어르고 달래며 자백을 받으려는 베테랑 형사1, 그리고 혁이를 윽박지르며 강하게 압박하여 진술을 이끌어내려는 젊은 형사2. 형체가 없는 용의자를 두고 두 경찰의 취조가 시작된다. 과연 이 사건의 진범은 누구인가.

신작 <꽃의 비밀>로 순조롭게 대학로에 복귀한 장진 감독이 '백투백 홈런'을 쳤다. <꽃의 비밀>과 같은 시기에 썼다는 또 다른 그의 신작 연극 <얼음>이 오는 20일 서울 대학로 수현재씨어터에서 성공적으로 막을 내린다. 장진은 전형적 캐릭터들의 뻔한 이야기를 실험적인 방법으로 풀어냈다. 덕분에 신선도를 유지하면서도 낯설거나 어색하지 않은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전형성과 독창성을 적절히 섞어 만든 <얼음>은 분명 재미있는 작품이다.

특히 관객이 적극적으로 극에 채워넣어야 할 공간을 미리 비워둔 게 탁월했다. 실체가 없는 혁이와 두 명의 형사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관객은 혁이가 형사들의 질문에 뭐라고 답하고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상상해야만 한다. 극이 진행되면서 관객은 저마다의 혁이를 완성해 나간다. 물이 얼어서 얼음이 되는 것처럼, 그렇게 혁이라는 실체는 갈수록 확고해진다. 관객이 단서를 찾아 추리에 동참한다는 점에서 <쉬어 매드니스>와 비슷하지만, <쉬어 매드니스>처럼 관객투표를 통해 범인이 바뀌지는 않는다. 프레스콜 현장에서 밝힌 것처럼, 장진 감독이 낸 문제의 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

<얼음> 속 얼음 지난 2월 17일, 연극 <얼음> 프레스콜 현장에서 형사2 역의 배우 김무열이 아이스커피를 타기 위해 얼음을 머그컵에 넣고 있다. '얼음'의 상징은 무엇일까? 극 중 유일하게 진짜 얼음이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그 상징성에 대한 해석은 열려있다. 참고로 배우들은 '정말로' 아이스커피를 마시기 위해 얼음을 넣는 식으로 연기한다고 한다.

▲ <얼음> 속 얼음 지난 2월 17일, 연극 <얼음> 프레스콜 현장에서 형사2 역의 배우 김무열이 아이스커피를 타기 위해 얼음을 머그컵에 넣고 있다. '얼음'의 상징은 무엇일까? 극 중 유일하게 진짜 얼음이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그 상징성에 대한 해석은 열려있다. 참고로 배우들은 '정말로' 아이스커피를 마시기 위해 얼음을 넣는 식으로 연기한다고 한다. ⓒ 곽우신


형사2는 아이스커피 타는 순서가 엉망이다. 형사1의 지적에도 자신이 뭐가 틀렸는지를 잘 모른다. 그냥 자신의 입에 들어갈 커피가 완성만 된다면 상관 없다. 잘못된 순서로 커피를 타듯이, 형사2의 취조도 이상하다. 그는 혁이가 살인범이라고 확신한다. 결론을 미리 내려놓고, 그 결론을 위해 가장 그럴싸한 답을 내놓으려고 한다.

나중에 차갑게 먹기 위해 냉동실에 넣어둔 아이스커피. 하지만 극이 끝날 때쯤 다시 꺼낸 커피는 완전히 얼어서 먹을 수 없게 됐다. 물처럼 흐물거리던 단서들이 모여 단단한 진실이 완성되는 것 같았지만, 혁이의 실체도 눈에 보일 것처럼 구체화된 것 같았지만, 정작 그 '얼음'을 우리는 먹을 수 없다.

4막까지 숨막힐 것 같은 긴장감 속에 극이 막을 내리고 나면, 관객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래서 진짜 범인은 대체 누구야?'

연극 <얼음>은 아르키메데스 퍼즐 같은 작품이다. 관객에게는 여러 개의 퍼즐 조각이 주어진다. 관객이 손에 쥔 조각들을 어떻게 맞추느냐에 따라 정답에 가까워질 수도 있고, 혹은 정답과 전혀 다른 모양의 도형이 완성되기도 한다. 그것이 틀린 답은 아니다. 다만, 장진이 본래 의도했던 답이 아닐 뿐이다.

장진이 낸 수수께끼의 답을 맞출 것인가, 아니면 당신만의 또 다른 답을 만들 것인가. 당신의 손에는 아직 얼지 않은 퍼즐 조각이 쥐어져 있다. 어떤 모양의 조각으로 얼려서 사용할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연극 <얼음> 포스터 지난 2월 13일에 개막해 오는 20일에 막을 내리는 연극 <얼음>. 전작 <꽃의 비밀>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이 극은 전혀 다른 종류의 재미를 관객에게 보장한다. 커튼콜 오픈 등 여러 이벤트가 진행 중이다. 당신 손에 쥐어진 퍼즐조각이 녹아내리기 전, 이 극을 보러 갈 것을 추천한다.

▲ 연극 <얼음> 포스터 지난 2월 13일에 개막해 오는 20일에 막을 내리는 연극 <얼음>. 전작 <꽃의 비밀>과 완전히 다른 분위기의 이 극은 전혀 다른 종류의 재미를 관객에게 보장한다. 커튼콜 오픈 등 여러 이벤트가 진행 중이다. 당신 손에 쥐어진 퍼즐조각이 녹아내리기 전, 이 극을 보러 갈 것을 추천한다. ⓒ (주)수현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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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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