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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산성터 유적이 있는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의 벽화산. 이 산은 사진으로 보아도 오르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이 된다. 사진의 오른쪽 봉우리 너머 산비탈에 상당 부분 복원된 벽화산성 유적이 있다. 사진의 능선을 타고 왼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정상에 닿는다. 산 아래에 보이는 집들은 척곡마을이다.
 벽화산성터 유적이 있는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의 벽화산. 이 산은 사진으로 보아도 오르기에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짐작이 된다. 사진의 오른쪽 봉우리 너머 산비탈에 상당 부분 복원된 벽화산성 유적이 있다. 사진의 능선을 타고 왼쪽으로 계속 나아가면 정상에 닿는다. 산 아래에 보이는 집들은 척곡마을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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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성을 보고 싶지만 높은 산이 무서워 아직 한 번도 답사를 못 해본 이에게 '마음 놓고 올라 보라'고 편하게 소개할 만한 곳은 어디일까? 경상남도 의령군 벽화산성만큼 그런 권유를 하기에  적합한 역사 유적도 드물 성싶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부대가 왜적을 크게 제압했던 벽화산성은 오르막이랄 것도 없는 산길을 약 30분만 걸으면 나타난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공식 해설부터 읽은 다음 벽화산성을 찾는다.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하리'에 있는 '벽화산성지(碧華山城址)'는 '경상남도 기념물 64호'로 지정되어 있다. 벽화산성은 '벽화산 줄기의 최고봉과 가운데 봉우리에 쌓은 2개의 산성으로, 상벽화성과 하벽화성으로 불리운다.'

경상남도 기념물 64호는 벽화산성인가, 벽화산성터인가

해설에 나오는 벽화산성과 벽화산성지는 서로 뜻이 다르다. 벽화산성은 말 그대로 벽화산에 쌓은 성이고, 벽화산성지는 벽화산성의 터(址)이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이곳의 공식 명칭을 '벽화산성'이 아니라 '벽화산성지'로 정했다. 이는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하리에 있는 경상남도 기념물 64호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벽화산성이 아니라 그 성의 터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즉, 벽화산성 유적이 임진왜란 당시의 산성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다고 해서 벽화산성터가 별로 볼 것이 없고, 벽화산 또한 오를 만한 재미가 없는 곳이라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 비교적 평탄한 산길을 30분 정도만 걸으면 만나는 벽화산성 유적지는 거닐기 편안하게 잘 복원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저 멀리 아득한 남천 가의 의령읍 쪽 경치까지 시원하게 보여준다. 이곳에 오른 답사자는 산성 구경은 물론 푸른 공기를 만끽하며 한껏 상쾌한 기분까지 누릴 수 있다. 망설이지 말고 올라보라.

일부가 복원되어 있는 벽화산성의 서쪽 성곽 위를 찍은 사진이다. 오르기도 편하고, 멀리 의령읍이 잘 보이는 전망을 즐기며 성곽 위 넓은 터에서 휴식 시간을 즐기기에도 아주 좋다.
 일부가 복원되어 있는 벽화산성의 서쪽 성곽 위를 찍은 사진이다. 오르기도 편하고, 멀리 의령읍이 잘 보이는 전망을 즐기며 성곽 위 넓은 터에서 휴식 시간을 즐기기에도 아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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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산성은 임진왜란 중에 처음 축성된 것은 아니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가야 때 성으로 추정되는' 벽화산성을 두고 '1589년(선조 22) 임진왜란 직전 의령읍성을 쌓으면서 전란을 대비하여 부분적으로 고쳐 쌓은 것으로 보인다'면서 '(벽화산성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홍의장군 곽재우가 고쳐 쌓은 산성으로, (그가) 의병을 거느리고 수천 명의 왜적을 무찔렀던 전승지로 유명하다'라고 해설한다. 또 '1876년(고종 13)에 크게 고쳐 쌓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라는 말도 덧붙인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처럼, 임진왜란 직전 조선 조정은 전쟁에 대비하여 전국적으로 성을 수리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200년 태평세월을 누려온 백성들은 축성 공사에 강제로 끌려가고, 화살이나 칼 등 무기를 만드는 일에 동원되는 것을 참아내지 못했다. 백성들을 영도할 능력이 없었던 조정은 모든 시도를 포기했고, 결국 선조는 '해민지금(害民之禁)' 지시를 전국에 내려보냈다. 백성들에게 부담이 되는 성 수축이나 전쟁 물자 조달을 금지한다는 왕명이었다. 이때가 1591년 12월, 임진왜란이 터지기 불과 4개월 전이었다.

복원된 벽화산성 성곽의 모습
 복원된 벽화산성 성곽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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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처구니없는 일은 그것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조선 조정은 1592년 2월 1일 신립과 이일 두 장군에게 전국 곳곳의 성곽과 진지들을 두루 순찰, 상황을 점검하게 했다. 두 사람은 한 달 뒤인 3월 1일 한양으로 돌아와 '걱정할 것 없다(不足憂)'라고 보고했다. 부산진성이 함락되는 4월 14일보다 겨우 달포 전, 전쟁 발발 바로 코앞의 일이었다.

문화재청 누리집은 벽화산성이 '의령읍 하리'에 있다고 소개하지만, 현장을 답사하려면 하리가 아니라 '중리로 85'를 찾아야 한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이 이곳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벽화산성은 척곡마을 한복판 중천 개울가에 세워져 있는 등산로 이정표와 반갑게 인사를 나눈 이에게만 문을 열어준다. 이정표가 수문장인 셈이다.

이정표의 화살표를 따라 중천 작은 다리를 건너고, 정자를 스쳐 지난 다음 천천히 걷는다. 길은 밭들 사이의 포장 도로로 시작되지만 이내 양옆으로 거목들이 줄을 선 숲속 산책길로 변한다. 아무도 주워가지 않고, 나무들에 막혀 날아갈 수도 없어 그냥 제자리에 쌓인 솔잎들이 마치 노란 눈처럼 길을 덮고 있다. 발걸음 밑이 솜이불처럼 폭신폭신하다.

20여 분 지나면 집을 다섯 채가량 지을 만한 공터가 나타난다. 그 공터 끝, 산으로 더 들어가는 길 첫머리에 비석 하나가 서 있다. 앞면에 '준공 기념' 네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고, 뒷면은 본문으로 가득찬 비석이다. 비문 전문을 가다듬어 가며 읽어본다. 혹 이곳에 찾아왔다가 비문 내용을 이해해 보려고 애쓰는 학생이 있을까 싶어 원문의 한자를 모두 살려가며 읽는다.

'이 길을 따라 산정(山頂, 산꼭대기)으로 오르면 곽재우 홍의장군 휘하(麾下, 소속)의 의병들이 임진왜란 때 가야 시대 고성(古城, 옛성)을 수축(修築, 고치고 쌓음)하여 지키면서 왜적을 무찌른 전승지(戰勝地, 전쟁에서 이긴 장소) 벽화산성에 닿습니다. 이 일대는 호국(護國, 나라를 지킴)의 얼이 깃든 벽화산성지(山城址, 산성터)와 가야 고분군(古墳群, 옛날 무덤들이 무리를 이룬 곳)이 있는 유서(由緖, 예전부터 전해져오는 역사) 깊은 유적지(遺蹟地, 선조들의 자취가 서린 땅)입니다.

그러나 이 성채(城砦, 성과 요새)는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제대로 돌보지 않고 던져져 있었습니다. 이곳 출신으로 일본에서 주식회사 광건설을 경영하는 류광웅 사장께서 이를 안타깝게 여겨 성채를 잘 보존하고 또 정화(淨化, 깨끗하게 만듦)하기 위해 거액의 정재(淨財, 깨끗한 돈)를 희사(喜捨, 기쁘게 기부)함으로써 임도(林道, 산속에 낸 길) 1.7km가 개설되었습니다. 조국과 향토를 위하는 그의 지극한 정성과 남다른 덕을 오래도록 기리고자 여기 작은 돌비 하나를 세웁니다. - 1988년 2월 14일 의령군수 손태병'

류광웅 씨가 사재를 기부하여 이곳까지 길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준공기념'비의 뒷면에는 벽화산성의 유래와 길이 조성된 경위가 새겨져 있다. 토씨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자로 쓰여 있어 읽고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류광웅 씨가 사재를 기부하여 이곳까지 길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준공기념'비의 뒷면에는 벽화산성의 유래와 길이 조성된 경위가 새겨져 있다. 토씨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한자로 쓰여 있어 읽고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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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광웅 선생에게 마음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후 준공기념비 뒤로 난 산길을 들어선다. 그런데 기념비 바로 뒤에 작은 빗돌이 하나 외롭게 서 있다. 지금 서서 바라보고 있는 빗돌 뒤쪽이 '벽화산 고분군'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빗돌이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주변 마을에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과 유물, 삼국시대의 무덤들이 발견되었다'라는 표현도 이 고분들에 근거를 둔 해설이었다.

동문터 지나면 곧이어 나타나는 벽화산성 복원 성벽

'벽화산 고분군' 빗돌을 지나면서 오른쪽 산비탈을 바라보면 다시 무슨 표지석이 서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벽화산성의 동문이 있었던 자리에 세워진 '벽화산성 동문지(東門址, 동문터)' 표지석이다. 성문이 있었던 곳답게 땅이 평평하고, 사람의 손으로 다듬은 흔적이 역력한 네모난 돌들이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있다. 이곳에서 복원된 성곽까지는 약 600m 거리이다. 물론 성곽 첫머리에 가면 안내판을 만날 수 있다. 이곳 안내판에는 한자 노출이 전혀 없다. 그래도 학생 답사자를 위해 문장을 약간 가다듬는 한편, 어려운 어휘에 풀이를 달아가며 읽어본다.

동문터 표지석
 동문터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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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화산성은 의령읍 중리 척곡마을 북쪽 벽화산 8~9부(전체 높의의 80~90%) 능선(산등성이를 따라 이어진 선)을 두른 테뫼식 산성(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둘러싼 산성)으로, 둘레는 약 800m 정도이다. (둘레가 작은 테뫼식 산성은 대체로 삼국 시대 때 축조된 것으로 방어에 유리하다. 골짜기를 포함하여 넓게 성을 쌓는 포곡식 산성은 규모가 크고, 테뫼식보다 후기의 성이다.)

산성 내부는 일제 시대 이후 공동묘지가 조성되어 대부분 민묘(일반 백성의 무덤)로 채워져 있다. 산성 남(남쪽 성곽)으로 7부 능선 정도에는 벽화산성 고분군이 위치한다. (옛날 무덤이라고 해서 모두 고분으로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시기적으로는 삼국 시대까지, 계층상으로는 당대의 역사와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부장품들이 다수 묻혀 있는 상류층의 무덤을 고분이라 한다. 부장품은 죽은 사람 외에 그와 함께 묻힌 물건들을 가리킨다.)

경남문화재연구원은 2000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벽화산성 복원 정비를 위한 시굴(시험삼아 파봄) 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에 따르면 벽화산성은 축조(쌓음) 시기가 다른 두 개의 성, 즉 삼국시대 성(늦어도 통일신라 시대)과 조선시대 성이 존재했다. 후대(늦은 때)에 설치된 조선시대 성은 삼국시대 성이 폐기(없앰)된 이후 폐성(버려진 성)을 기단(받침)으로 하여 축조되었다. 삼국시대 성은 대부분 0.5~2m 정도 남아 있으며, 구간(부분)에 따라 축성(성을 쌓음) 기법을 달리함이 확인되었다.

후대에 설치된 조선시대 성은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의 급박한 상황에서 수축(고치고 쌓음)된 것으로 보인다. 벽화선성에는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왜적 수천 명을 섬멸하였다고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후 조선시대 말기인 1876년(고종 13) 의령현감 송기노가 대대적으로 성을 정비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벽화산성의 본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는 흔적들. 고성 흔적은 복원된 성곽이 끝나는 지점부터 100m 이상 이어지다가 문득 90도로 각도를 꺾어 산능선 쪽으로 다시 이어진다.
 벽화산성의 본래 모습을 떠올리게 해주는 흔적들. 고성 흔적은 복원된 성곽이 끝나는 지점부터 100m 이상 이어지다가 문득 90도로 각도를 꺾어 산능선 쪽으로 다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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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원된 성곽이 끝나면서 등산로는 왼쪽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곳은 옛성의 흔적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성곽의 본래 모습을 고이 간직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엄청난 성돌들이 산비탈을 타고 쌓여 있다. 그 슬픈 모습이 어쩐지, 많은 사람들이 죽어 있는 광경을 보는 것만 같이 느껴져 갑자기 온몸에 싸늘한 식은땀이 흐른다. 저 돌들을 쌓느라고, 다 쌓은 성곽을 지키느라고 일본군들과 죽음의 혈투를 벌인 임진왜란 당시 의령 지역 의병들의 피눈물나는 노고 앞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복원된 성곽을 지나면 옛성의 흔적이...

평이한 등산로 대신 고성의 흔적, 무수하게 쓰러져 있는 돌무더기들을 따라 걸어본다. 다시 등산로와 만나게 될 때까지의 200m 남짓되는 울퉁불퉁한 돌길이다. 온갖 잡목들이 앞을 가로막지만 '이 길을 걸어보는 것이 지난 역사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일 아니겠나' 하는 마음으로 힘든 걸음을 내디딘다. 아카시를 비롯해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한 나뭇가지들이 불쑥불쑥 공격을 해올 때마다 문득 왜군들이 칼을 내미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벽화산 정상
 벽화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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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한 나뭇가지에 찔리기도 하고,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노라니, 옛성 흔적인 돌무더기들을 따라서 걸을 수 있는 오솔길이 그립다. 복원된 성곽 아래로 죽 이어지는 오솔길을 만들고, 성곽이 끝나도 거기서부터 옛성 흔적 아래를 따라 오솔길이 계속 이어지게 하면 좋을 것이다. 성곽은 낮은 곳에서 위로 쳐다보아야 제맛인데 벽화산성에서는 그것이 어렵다.

산성을 보는 데 주된 목적을 둔 답사자는 옛성 입구에서 발길을 돌릴 일이다. 지금껏 올라온 길을 되밟아 하산할 지점인 것이다. 줄곧 나아가 산 정상도 보고, 다시 임도를 따라 척곡마을에 닿으려면 두 시간가량 더 걸어야 한다. 오르막이 심하지도 않고, 험한 바윗길도 없어서 누구나 밟을 수 있는 산길이지만, 지금 본 것보다 더 뚜렷한 산성 유적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므로 꼭 끝까지 걸을 필요는 없다.

경남 의령 곽재우 생가터 앞에 세워져 있는 홍의장군 동상
 경남 의령 곽재우 생가터 앞에 세워져 있는 홍의장군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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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하산해도 경남 의령 충익사 기념관이 말한 '충익당 곽재우 장군 유적지' 중 한 곳인 벽화산성을 충분히 둘러보았다고 자부할 만하다. 충익사는 대구 망우공원, (대구 달성군) 현풍 예연서원, 신도비, (경남) 창녕 화왕산성, 망우정, 기강 전적지, (경남) 의령 충익사, 현고수(북을 걸어놓고 두드리며 처음 의병을 모은 나무), 생가, 정남진 전적지와 더불어 이곳 벽화산성을 곽재우 장군의 중요 유적지로 추천했다. 벽화산 정상에 가보라는 말은 없었다.

척곡저수지에서 한가하게 낚시를 즐기고 있는 평화

산꼭대기에 가서 정상석을 본 뒤 척곡마을까지 내려오는 길의 묘미는 벽화산 전경을 감상하는 즐거움에 있다. 본격적인 하산길의 첫머리는 산속의 등산로에서 나와 임도의 송전탑과 마주치는 지점이다. 여기서부터 마을까지는 줄곧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넓은 임도의 연속이다.

하산길에서 제일 먼저 보는 경치는 아득한 아래로 척곡마을이 내려다 보이는 시원한 전망이다. 그 후 점점 내려오면서 산의 정상, 그리고 능선 너머로 산성이 있는 벽화산 전경을 바라본다. 평지에 닿으면 척곡저수지에서 한가롭게 물고기를 잡고 있는 낚시꾼도 보게 된다.

'저 낚시꾼은 자신에 안겨진 이 평화가 벽화산성 등 무수한 역사의 싸움터에서 목숨을 내던진 의사들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노라니 '벽화산성은 벽화산 아래까지 연장되어 있었던 듯하나 지금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라는 문화재청 누리집의 문장이 문득 떠오른다. 벽화산성 성곽이 이곳 평지에까지 남아 있었더라면 후대인들이 역사의 교훈을 되새기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대는 부질없는 상상일 뿐이다. 그 점이 안타까워 류광웅 선생도 사재를 털어 동문터에 이르는 길을 닦았으리라. 그의 마음씀씀이가 새삼 따뜻하게 느껴진다.   

척곡저수지에서 바라보는 벽화산 정상
 척곡저수지에서 바라보는 벽화산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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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벽화산성, #곽재우, #임진왜란, #류광웅, #의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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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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