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열린 제88회 아카데미 시상식.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드디어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거머쥐었다. 디카프리오는 수상 소감을 이야기하며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적절한 촬영장을 찾지 못해 헤매던 기억을 더듬었다. 그리고 기후변화, 공해 등으로 파괴된 자연을 살리기 위해 하루빨리 힘을 모으자고 역설했다.

"<레버넌트>는 인간과 자연의 교감에 관한 영화입니다. 우리 모두 대자연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맙시다!"

알레한드로 이냐리투 감독도 "이 영화에서 자연은 장소 그 이상이다. 글래스를 보호하고 위협하고 변화시키는 인물에 가깝다. 글래스는 죽음의 문턱에서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삶의 조각을 맞춰본다. 그의 고독한 여정에 영적인 면을 더하고 싶었다"라며 이미 디카프리오와 같은 맥락의 말을 한 적이 있다.

 <레버넌트>는 디카프리오의 '살아 있는 눈빛'을 자주 클로즈업한다.

<레버넌트>는 디카프리오의 '살아 있는 눈빛'을 자주 클로즈업한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영화 곳곳에 숨겨진 부활의 상징

굳이 디카프리오나 이냐리투 감독의 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죽은 아들의 복수를 위해 사투하는 어떤 사내의 모습을 그린 영화가 아니다.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라는 제목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기고 여러 차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살아난 한 남자의 부활과 신생(新生)을 다룬 영화다.

엄밀하게 말하면 영화에서 주인공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죽은 적이 없다. 죽지도 않았는데 어찌 다시 살아난단 말인가? 여기에 영화의 핵심이 있다. 휴 글래스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초주검 상태에서 '상징적인 죽음'을 경험하고 또 '상징적인 부활'을 반복한다.

영화 초반에는 주인공이 아들에게, 나중에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계속하여 "숨을 쉬라!"고 요구한다. 환상 속에 나타난 죽은 아내도 마찬가지로 "숨을 쉬라!"고 격려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서 주인공의 '거친 숨소리'가 대사보다 더 많은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냐리투 감독은 영화의 방점이 죽음이 아니라 삶에 있다는 것을 일관되게 보여준다. 공기를 호흡하는 거친 숨소리보다 생명체의 살아있음을 더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어디 있겠는가. 디카프리오의 '살아 있는 눈빛'을 자주 클로즈업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아들의 죽음과 아들을 죽인 자에 대한 불타는 복수심은 그의 '생존' 의지를 부각하는 도구로 작용할 뿐, 영화의 내러티브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아니다. 이냐리투 감독은 이를 증명하려는 듯 죽음과 부활에 관한 여러 가지 상징들을 영화 곳곳에 숨겨두고 있다. 이냐리투 감독이 숨겨 놓은 이런 상징과 상징의 의미를 모르면, 영화의 재미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극 중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백인 사회를 떠나 아메리카 선주민인 포니족 여인과 결혼해 아들 호크(포레스트 굿럭 분)도 얻는다. 하지만 아내는 포니족 근거지를 침략한 백인 병사의 손에 죽고 부족민이 몰살당하고 만다.

극 중 휴 글래스(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백인 사회를 떠나 아메리카 선주민인 포니족 여인과 결혼해 아들 호크(포레스트 굿럭 분)도 얻는다. 하지만 아내는 포니족 근거지를 침략한 백인 병사의 손에 죽고 부족민이 몰살당하고 만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백인:인디언=물질문명:자연

영화의 배경은 서부개척시대 이전인 19세기 아메리카대륙이다. 북미대륙으로 이주한 백인들이 총과 대포를 바탕으로 원주민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에 대한 폭압과 수탈을 자행하던 시절이다. 백인 침략자들의 장총과 대포에 맞서는 인디언들은 고작 활과 쇠로 만든 창을 가진 것이 전부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백인과 인디언으로 대변되는 현대인 호모 사피엔스다. 그러나 영화의 갈등구조나 영화 속 인물들의 내면 심리나 행동 양태는 돌칼이나 돌화살로 맞서던 원시 네안데르탈인의 그것과 하등의 차이가 없다. 물질문명의 이기(利器)로 무장한 백인세력들은 자연 친화적인 인디언들에 대한 무자비한 강탈과 살육을 자행한다.

이냐리투 감독이 말처럼 인간의 처지에서 볼 때 자연은 우리에게 무한한 혜택을 주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무섭고 가혹한 존재이기도 하다. 첨단과학의 시대인 지금도 감당하기 어려운 무서운 자연재해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이 두려워하고 또 초라해지는가.

대략적으로 볼 때, 영화에서 백인은 물질문명을, 인디언은 자연을 상징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언제 어디서나 좋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듯, 물질문명을 상징하는 백인 중에도 호인(好人)도 있고 악인(惡人)도 있다. 자연 역시 무섭기도 은혜롭기도 하듯, 인디언이라고 해서 당연히 좋은 사람만 있는 것도 아니다.

휴 글래스가 모피 사냥꾼으로 설정된 이유

 휴 글래스의 극 중 직업은 모피 사냥꾼이다.

휴 글래스의 극 중 직업은 모피 사냥꾼이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주인공 휴 글래스는 백인이다. 그는 백인 우월주의의 삶과 서구 물질문명에 회의를 품고 백인 세계를 떠났다. 글래스는 아메리카 선주민인 포니족 여인과 결혼해 아들 호크(포레스트 굿럭 분)도 얻었다. 하지만 아내가 포니족 근거지를 침략한 백인 병사의 손에 죽고 부족민이 몰살당하자, 아들을 데리고 백인부대 소속의 모피 사냥꾼이 됐다. 우리는 글래스의 직업이 모피 사냥꾼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통상 동물의 모피(가죽)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말하고, 뼈(골격)는 사물의 본질을 가리킨다. 게다가 당시에 모피는 백인 상류층의 물질적 욕망을 채워주는 사치품이었다.

백인중심의 물질문명이 싫어서 자연 친화적인 인디언 세계로 떠났던 글래스. 그가 하필 백인과 인디언이 가장 치열하게 부딪히는 최전선 백인부대의 일등 모피 사냥꾼이 되었다는 데 영화의 아이러니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모피 사냥군들의 사냥터는 대개 인디언 거주지와 겹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휴 글래스 이름의 어원은 휴(Hugh)는 '마음, 정신'을 뜻하고 글래스(Glass)는 '빛난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글래스는 자신의 세계관과도 맞지 않고, 본질적이지 않은 피상적(皮相的)인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상태인 것이다. 이것은 모피 사냥꾼 글래스에게 닥칠 운명이 결코 녹록지 않을 것임을 예시하는 설정이다.

영화 중반에 글래스가 동물의 뼈가 가득한 '뼈 무덤' 앞에 서는 장면이 나온다. 이 무덤 앞에서 글래스는 무얼 생각했을까? 아마도 자신의 내면에서 들려오는 '가죽이라는 허상에 연연하지 말고, 뼈가 상징하는 본질을 추구하라!'는 목소리를 듣지는 않았을까?

물론 휴 글래스에게 본질이 복수인지, 용서인지 아니면 단순한 생존을 뛰어넘는 한층 높은 차원의 다른 어떤 것이었을지는 그 자신이 더 잘 알았을 것이다.

흐르는 강물은 신의 은총, 때로는 형벌을 상징한다

글래스 부자가 엘크를 죽이고 가죽을 벗기는 장소는 숲 속의 흐르는 강물 위에서다. 흐르는 강물은 신의 은총을 뜻하기도 하고 반대로 공포나 형벌을 뜻하기도 한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하기도 한다. 정화와 재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영화 <레버넌트>에서 이냐리투 감독은 흐르는 강물의 이러한 상반된 상징성을 수미쌍관의 형식으로 초반부와 결말 부분에 나란히 배치했다.

영화 초반부에서 강물은 '정화'와 '재생'을 상징한다. 현세에서는 엘크를 사냥하고 엘크의 가죽을 취하는 반자연적인 행위를 하고 있지만, 이 흐르는 강물에 몸을 씻긴 엘크가 내세에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간구하는 글래스 부자의 무의식적인 바람이 들어있을 것이다.

반면, 영화 후반부에서 악당 존 피츠제럴드(톰 하디 분)가 글래스에 의해 초주검이 된 상태에서 인디언 쪽으로 흘러내려 간다. 피츠제럴드는 아리카라족(=리족) 인디언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의 시체는 다시 강물을 통해 흘러내려 간다. 이 장면에서 강물은 명백하게 글래스가 피츠제럴드를 응징하는 '형벌'을 상징한다.

 흐르는 강물은 신의 은총, 공포나 형벌, 때로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정화와 재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흐르는 강물은 신의 은총, 공포나 형벌, 때로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인간의 욕망을 상징한다. 정화와 재생을 상징하기도 한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욕망에 찌든 피츠제럴드

피츠제럴드는 물질적인 욕망에 찌든 백인 우월주의자다. 유색인종에 대한 강한 편견과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문명인'임을 자부하는 피츠제럴드에게 인디언은 '자연'이 아니라 '야만'이고 '미개'한 어떤 것에 불과하다. 피츠제럴드는 같은 부대에 근무하는 글래스를 눈엣가시로 여긴다. 글래스가 야만인인 인디언 아내와 결혼했고, 혼혈인 아들 호크를 애지중지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부대장인 앤드루 헨리(돔놀 글리슨 분) 대위는 자신보다는 글래스를 훨씬 더 신뢰한다. 글래스가 사냥경험도 많고 지역 지리에도 밝을 뿐만 아니라 침착하고 팀워크를 중시하기 때문이다. 반면 피츠제럴드는 제멋대로의 독불장군이다. 성격도 포학하고 구성원과의 화합에는 관심도 없는 천방지축이다.

피츠제럴드와 같은 악당은 공감능력이 없다. 상대방이 대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조차 없다. 감정이입 자체가 불가능하니 동정심도 생겨날 리 없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소통이 안 된다. 오직 자신의 이익과 안위만 생각하는 지독한 이기주의자다. 진화심학에서는 이런 자들을 '사기꾼'이라고 부른다. 피츠제럴드는 어원상 피츠(Fitze)가 '아들'이라는 뜻이고 제럴드(gerald)가 '창을 휘두르는 사람'이니 '함부로 총칼을 쓰는 자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적절한 명명이다.

피츠제럴드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장기적 설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그저 지금 당장 먹고사는 생존(survival)만을 고려한다. 부대장의 질책을 받은 피츠제럴드의 신경질적인 외침이 이를 잘 보여준다.

"나에게 인생이란 건 없어. 난 그저 사냥한 가죽을 가지고 돌아가서 먹고 살아야 한다니까!"

돈이 탐나 글래스의 아들 호크를 무참히 살해하고 글래스를 생매장하고서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유유자적한다. 피츠제럴드는 일종의 사이코패스다.

 피츠제랄드(톰 하디 분)는 유색인종에 대한 강한 편견과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피츠제랄드에게 인디언은 '자연'이 아니라 '야만'이고 '미개'한 어떤 것에 불과하다.

피츠제랄드(톰 하디 분)는 유색인종에 대한 강한 편견과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피츠제랄드에게 인디언은 '자연'이 아니라 '야만'이고 '미개'한 어떤 것에 불과하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모든 것을 빼앗긴 인디언들, "복수는 신의 뜻"

리족 인디언의 추장은 백인부대의 침략으로 부족 전체가 궤멸되다시피 한데다가 딸 포와 마저 납치당했다. 인디언 추장은 주인공 휴 글래스, 그리고 점박이 말을 탄 또 다른 인디언과 함께 '모든 것을 잃었다'는 공통점과 보이지 않는 심리적 연대감이 있다. 리족 추장은 협상을 위해 만난 백인들에게도 한탄한다.

"너희들은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우리의 땅도, 동물도, 사람도, 모든 것을 말이야!"

글래스를 도와주고 지극정성으로 치료해주었던 점박이 말을 탄 인디언. 그도 백인들에 의해서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는 뜻밖에도 또 다른 일군의 백인들에 잡혀서 나무에 목이 매달려 죽고 만다. 백인들은 인디언의 목에 나무판자를 걸어놓았다. 나무판자에는 "우리는 야만인이다"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마치 '유대인의 왕'이라는 팻말이 달린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처럼, 이 인디언도 무고한 희생양이 되었다.

휴 글래스 역시 백인들에 의해 인디언 아내를 잃고, 다른 백인 즉 피츠제럴드에 의해 아들까지 잃었다. 요컨대 원래부터 인디언인 2인, 그리고 인디언과 결혼한 휴 글래스. 이들 세 사람은 말하자면 서구 물질문명의 희생양들인 셈이다. 그들은 물질문명에 침탈당한 자연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영화 말미에 휴 글래스가 아들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피츠제럴드를 직접 죽이지 않고 리족 추장으로 하여금 대신 처단하게 한 행위는 피츠제럴드를 용서해 주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상은 자신이 직접 복수한 것이나 진배없다.

"복수는 신의 뜻이다!"

글래스가 추장에게 피츠제럴드의 처단권을 넘길 때 한 말은 틀렸다. 복수는 쉬워도 용서가 어려운 법이다.

한 심리학 연구에 의하면 '치명적인 보복은 학대 받은 사람들이 먼 옛날부터 모든 문화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해온 수단'이라고 한다. 복수는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일이었음을 역사는 잘 보여준다. 인류학적으로 볼 때, 휴 글래스나 리족 추장은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일을 한 것뿐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복수는 인간의 일이고, 용서는 신의 일"이라는 서양속담이 더 마음에 다가오는 것은 그런 이유일 것이다.

글래스 공격한 곰, '재생'을 상징

극 초반 일행들과 떨어져 사냥을 나섰던 휴 글래스는 회색곰의 습격을 받아 빈사상태에 빠진다. 북미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곰은 이중의 상징성을 가진다. 곰은 사냥의 대상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어떤 경우에서든 그들에게 곰은 두려움과 신성성을 동시에 가진 존재였다. 특히 동면하는 관계로 겨울에 사라졌다가 봄에 나타나는 곰의 습성 때문에 전통적으로 북미에서는 곰을 '재생(再生)'의 상징을 가진 동물로 본다.

영화에서 글래스는 회색곰의 습격을 받아 완전히 초주검 상태가 되지만 결국 회색곰의 목을 찔러 죽이고 그 자신은 혼절한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글래스의 몸 위로 회색곰이 덮친다. 거대한 곰의 육중한 사체가 글래스를 덮은 모습은 천상 글래스가 곰의 사체로 만든 무덤에 묻힌 모양새였다.

이것이 글래스의 첫 번째 '상징적인 죽음'이다. 동료들에 의해서 발견된 글래스는 가까스로 깨어나고 목숨을 부지한다. 첫 번째 '상징적 부활'이다. 빈사상태에 빠진 글래스의 작은 가방 속에 이타주의자인 소년 프리저(윌 폴터 분)가 곰 발톱을 넣어두는 것도 곰이 가지는 '재생'의 상징을 믿는 습속이 있음을 보여준다.

"그럼 네가 곰처럼 강해질 것 같니?"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에요!"

소년의 대답 속에는 글래스가 곰처럼 재생하기를 바라는 간절한 염원이 들어있는 것이다. 나중에 되살아난 글래스가 곰 발톱을 꺼내어 만지작거리는 것도 물론 같은 의미다.

글래스의 '두 번째' 상징적 죽음

사지를 거의 못 쓰고 들것에 실려 다니는 신세가 된 글래스. 리족 인디언들의 추적을 피해 달아나고 있는 부대원들에게 글래스의 존재는 생명을 위협하는 중대한 걸림돌이다. 부대장 헨리 대위는 전 부대원이 먼저 떠난 뒤에, 후방에 남아 글래스를 돌볼 대원들을 상금을 걸고 모집한다.

아들 호크가 당연히 자원하고, 소년 프리저도 대가 없이 자원한다. 문제는 사기꾼 피츠제럴드가 돈에 눈이 멀어 자원했다는 점이다. 불행한 예감은 언젠가 적중한다고 했던가. 애초부터 글래스 보호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피츠제럴드는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다가 결국 글래스의 아들 호크를 죽이고, 글래스를 생매장한 채로 도망을 간다.

곰에게 당한 부상의 후유증으로 사지를 못 쓰고 말도 하지 못하는 글래스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들이 죽는 절망적인 상황과 마주한다. 설상가상으로 피츠제럴드는 글래스를 미리 파둔 흙구덩이에 밀어 넣고 흙을 덮어 파묻는다.

가도 가도 하얀 눈 밖에는 보이지 않는 끝도 없는 침엽수 울창한 심산유곡. 그 극한의 자연 속에 거동조차 힘든 글래스를 홀로 두고 떠나는 것은 죽음보다 더 무섭고 가혹한 일이다. 이것이 글래스의 두 번째 '상징적인 죽음'이다.

그러나 글래스는 기적적으로 살아난다. 아들 호크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미한 희망이, 그래서 그 아들을 보호해야한다는 눈물겨운 부정(父情)만이 흙구덩이에 묻힌 글래스를 죽음의 문턱에서 되살아나게 한 유일한 동력이었을 것이다. 이것이 글래스의 두 번째 '상징적 부활'이다. 아들의 주검 앞에서 통한의 눈물을 삼킨 글래스는 결심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

이제 글래스가 살아야 할 이유는 더욱 단순하고도 뚜렷해졌다. 아들의 복수를 위해서라도 그는 살아남아야만 한다.

아들 복수 위한 새로운 여정

글래스는 아들 호크의 복수를 위한 생존의 여정을 시작한다. 생존에의 집념은 빈사상태에서 헤매던 글래스가 엉금엉금 길 수 있게 하고 결국에는 비록 비틀거리지만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만들었다. 들소의 사체에서 내장을 꺼내 먹고, 살아 있는 연어를 먹기도 한다. 목 부위의 상처에 화약을 밀어 넣고 불을 붙이는 식의 극한 처방까지 동원해가며 글래스는 삶의 의지를 불태운다. 땅바닥이나 동굴 벽에 원수 피츠제럴드의 이름을 새기며 설욕을 다진다.

여기서도 글래스가 곰의 털가죽을 방한복으로 삼아 여정에 나선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자신을 습격하여 죽일 뻔했던 그 곰의 가죽이 이제는 자신을 살리는 은혜를 베풀고 있는 것이다. 곰으로 상징되는 자연은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자애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복수의 여정은 결코 만만치 않다. 글래스는 납치된 딸을 찾아 백인들을 추적해오는 리족 인디언 추장 일행과 맞닥뜨린다. 피츠제럴드를 쫓는 글래스가, 인디언들에게는 쫓기는 험난한 여정이다. 사실 리족 인디안 추장의 딸 포와가를 납치한 백인들은 헨리의 부대가 아니다. 그러나 리족 추장에게 백인들은 다 같은 약탈자요, 납치범일 뿐이다.

 프리저는 자신의 수통에 나선무늬를 새긴다.

프리저는 자신의 수통에 나선무늬를 새긴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리족을 피해 급류를 타고 필사적으로 탈출하는 글래스. 그는 점박이 말을 탄 다른 인디언 한 사람을 만난다. 다른 인디언 부족인 수족에 의해 온 가족을 잃었다는 그 인디언은 굶주린 글래스에게 먹거리를 나눠 준다. 심리학적으로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 사이에는 소통과 공감을 통한 친밀감이 생긴다고 본다. 정서적인 일체감이 생긴다는 소리다.

글래스와 인디언 두 사람은 금세 친해졌다. 그들은 들소 고기도 나눠 먹고, 내리는 눈도 물 대신 받아먹으며 깔깔댄다. 눈은 순수함, 순결함을 상징하기도 하고, 고독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무엇보다도 눈은 '죽음'과 '재생'을 상징한다. 펑펑 쏟아질 듯이 내리다가도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또다시 쌓이는 눈의 속성 때문에 그런 상징성이 생겼을 것이다.

점박이 말을 같이 타고 함께 여정을 같이 하는 길동무가 된 글래스와 인디언. 곪아가는 상처와 극도의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글래스는 눈밭에 그대로 지쳐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이것이 세 번째 '상징적 죽음'이다. 인디언은 글래스를 위해 나뭇가지를 꺾거나 도끼로 베어 와서 작은 오두막을 짓는다. 설원에서 어렵사리 약초를 캐어와 썩어가는 글래스의 상처를 정성껏 치료해준다. 인디안의 전통적인 훈증(薰蒸)요법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오두막집에서, 인디언의 도움으로 치료받는 모습은 흡사 글래스가 작은 무덤에 안치된 모습을 연상시킨다.

 영화 중반에 글래스가 동물의 뼈가 가득한 '뼈 무덤' 앞에 서는 장면이 나온다. 통상 동물의 모피(가죽)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말하고, 뼈(골격)는 사물의 본질을 가리킨다.

영화 중반에 글래스가 동물의 뼈가 가득한 '뼈 무덤' 앞에 서는 장면이 나온다. 통상 동물의 모피(가죽)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을 말하고, 뼈(골격)는 사물의 본질을 가리킨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치료 중에 글래스는 꿈을 꾼다. 환상을 본다. 꿈속에서 글래스는 죽은 아내와 아들을 만난다. 폐허가 된 교회에서 종이 울리고, 교회 담벼락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교회의 종소리는 천상과 지상을 연결하는 소리다. 지상의 글래스가 하늘에 있는 죽은 아내와 아들을 부르는 초혼(招魂), 즉 혼을 부르는 소리다.

치료가 효험을 봤는지, 꿈속에 만난 처자식과 예수의 덕인지 몰라도 의식을 잃고 죽은 듯이 쓰러져 있던 글래스가 무덤 같았던 오두막의 나뭇가지를 젖히고 일어난다. 이것이 세 번째 '상징적 부활'이다. 글래스의 부활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 무덤 앞의 돌을 밀고 나온 그 날의 예수를 연상시킨다.

유감스럽게도 그 시각에 글래스를 지극 정성으로 돌봐줬던 그 인디언은 백인들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야만인'이라는 팻말을 걸고 말이다. 이 인디언의 죽음은 세상 죄를 대신하여 희생양이 된 어린 양 예수를 연상시킨다. 아무런 죄도 없는 그는, 다만 인디언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백인들에 의해 나무에 매달려야 했다.

인디언을 매달아 죽였던 백인부대는 바로 리족 인디언 추장의 딸을 납치해간 바로 그 무리였다. 그들의 야영지에서는 죽은 인디언의 점박이 말도 발견됐다. 글래스는 강간당하는 추장의 딸 포와가를 구해주다가 발각되지만 인디언이 생전에 타던 예의 점박이 말을 타고 도망친다.

추격을 벗어난 글래스가 야영을 하고 날이 밝아오는데 잠에서 채 깨기도 전에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다. 리족 인디언들이 쫓아온 것이다. 사력을 다해 달아나는 글래스. 그러나 어쩌랴? 글래스가 달아난 방향은 천 길 낭떠러지가 자리한 막다른 길이었다. 글래스는 점박이 말과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진다.

글래스의 거듭된 부활

점박이 말은 즉사하고, 글래스도 잠시 혼절했다가 곧 깨어난다. 글래스는 추위를 피하기 위해 죽은 점박이 말의 내장을 끄집어내고 완전히 벌거벗은 채로 말의 사체 속으로 들어가서 밤새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날이 새자 다시 나온다. 이것이 네 번째 '상징적 죽음'이자, 네 번째 '상징적 부활'이다. 맨몸으로 말의 몸체 속으로 들어갔다가 맨몸으로 다시 나온 글래스의 모습은 마치 엄마의 자궁으로 퇴행했다가 다시 태어나는(新生) 것을 연상시킨다.

이때 점박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죽은 인디언이 타고 다니던 점박이 말은 잡종이다. 잡종(hybrid)은 '서로 다른 인종, 변종, 생물 종의 속하는 부모 사이에서 나온 자손'을 말한다. 인간의 경우 혼혈아라고 부른다.

영화에서 점박이 말은 글래스가 인디언 여인과 어울려 낳은 글래스의 혼혈아들 호크를 상징한다. 좀 더 넓게는 서로 다른 인종과 친화력을 갖고 친밀하게 지냈던 글래스와, 글래스의 인디언 아내, 혹은 점박이 말의 주인 인디언을 상징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들은 백인 순혈주의에 빠져 친화력, 포용력은커녕 유색인종이나 혼혈아를 배척하고 탄압하는 피츠제럴드와 같은 부류의 인간들과 서로 대척 관계라고 볼 수 있다.

수통에 새겨진 달팽이 무늬의 의미

피츠제럴드가 헨리 대위의 부대가 주둔한 곳으로 돌아왔다. 그때 점박이 말 탄 인디언을 죽였던 백인들 무리 중에서 리족의 습격을 받아 몰살하고 겨우 살아남은 백인 하나가 헨리 대위의 부대로 찾아와 자신을 보호해달라고 구조요청을 한다. 그런데 그가 가져온 물품 중에 이타주의자 소년 프리저가 생매장당하는 글래스의 무덤에 던져 주고 간 물통이 발견된다.

피츠제럴드가 글래스의 아들 호크를 죽인 줄 모르는 프리저는 호크가 살아있다고 생각하고, 부대원들은 수색에 나섰다가 뜻밖에 글래스를 발견하게 된다. 이 물통은 이냐리투 감독이 숨겨놓은 대표적인 상징 중의 하나다. 처음 이 물통의 주인인 프리저는 글래스를 후방에서 보호해주기 위해 자원 했을 때 이 금속제 물통의 겉면에 달팽이 모양의 나선형을 그려 넣는다. 이때 화면 가득히 달팽이 두 마리가 클로즈업되는 것을 눈 밝은 관객은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달팽이는 서양에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서양인들은 달팽이는 자신의 껍질에 들어가 겨울을 보내다가 그다음 부활절 즈음에 다시 태어난다고 믿는다. 또한 '육체적인 에너지나 영적인 에너지가 나선형으로 흐른다.'고 믿었다. 달팽이 모양의 나선형 무늬가 영화에서 특별한 상징성을 갖는 이유다. 인류학적으로 이런 나선형 순환(spiral dynamic)은 자연이 평형을 유지하는 원리를 뜻하기도 한다.

달팽이 모양의 나선형 무늬는 바로 글래스가 부활할 것이라는 것을 예시하는 강력한 상징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프리저가 처음에 물통 겉면에 달팽이 모양의 나선형 무늬를 그릴 때 피츠제럴드가 "제발 그 소리 좀 내지 마"라며 신경질 낸 것은 너무나 당연한 지도 모른다. 이냐리투 감독의 다분히 의도적인 설정이 매우 흥미롭다.

 서양에서 달팽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서양에서 달팽이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 (주)이십세기폭스코리아


죽음에서 돌아온 글래스, 다시 피츠제럴드를 만나다

글래스가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모두들 그의 생환을 반기지만, 피츠제럴드는 그럴 수 없다. 그는 도망간다. 피츠제럴드의 뒤를 헨리 대위와 글래스가 함께 쫓는다. 간교한 피츠제럴드는 자신을 추적해온 헨리 대위를 죽이고 글래스마저 죽이려 든다.

그러나 글래스는 쉽사리 피츠제럴드의 음모에 걸려들지 않는다. 두 사람은 총질을 주고받다가 드디어 일대일 육탄전에 돌입한다. 복부와 등 그리고 허벅지까지 찔려 글래스에게 완전히 기선을 제압당한 피츠제럴드. 글래스가 그를 죽이려는 순간 리족 인디언들이 나타나고 앞서 말한 것처럼 리족 추장이 피츠제럴드를 처치한다. 육박전을 벌일 때 글래스의 아들 호크를 '창녀의 자식'이라며 끝까지 글래스를 모욕하는 피츠제럴드. 그가 글래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냥 복수나 하러 왔어? 그럼 실컷 즐겨! 그런다고 죽은 네 아들이 살아 돌아올 것 같아?"

피츠제럴드의 시체가 강물을 따라 흘러내려 간다. 피츠제럴드의 죽음과 함께 글래스의 여정은 끝이 난다. 글래스는 또다시 아내의 환상을 본다.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예수를 맞았던 이가 막달라 마리아였던 것처럼, 무덤보다 더 잔혹했던 극한의 자연환경에서 살아난, 즉 '죽음에서 돌아온 자'인 글래스를 맞는 사람은 죽은 아내의 환상이다.

글래스의 아내는 웃으며 글래스를 떠나간다. 죽은 아내를 지금까지 떠나보내지 못했던 글래스가 이제 진정으로 아내를 떠나보내는 것이다. 지금까지 글래스의 죽은 아내는 환상 속에서 이렇게 말해왔다.

"바람은 결코 뿌리 깊은 나무를 쓰러뜨리지 못해요. 이파리는 떨어져도 나무 몸통은 굳건해요. 계속 숨을 쉬세요!"

자신을 '보호하고 위협하고 변화시키는' 자연 속에서의 고독한 여정을 마치고 글래스는 살아 돌아왔다.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회색 곰처럼 부활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가 다시 펑펑 쏟아지는 흰 눈처럼 글래스는 살아 돌아온 것이다.

'죽음에서 돌아온 자' 글래스는 이제 제대로 살아 숨 쉴 것이다. 부활한 글래스의 삶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삶이 될 것이다. 그는 현상(가죽)이 아니라 본질(뼈)에 한 발짝 더 다가갈 것이다. 자연이 역동적 평형을 유지하듯이 새로 태어난 것이나 마찬가지인 글래스의 몸 안으로 새로운 육체적, 영적인 에너지가 나선형으로 흐를 것이다.


레버넌트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이냐리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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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평론가 (심리학자. 의학자) 고려대 인문 예술과정 주임교수 역임. 융합심리학연구소장(현).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교수(현)

오마이뉴스 스타팀에서 방송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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