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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광화문.
 경복궁 광화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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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광장 북쪽에 경복궁이 있다. 조선이 태어나고 3년 뒤인 1395년 완공된 궁궐이다. 조선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해는 1394년이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최근 방영분에서도 한양 천도가 이루어졌다.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부터 경복궁이 완공되기 이전까지 태조 이성계는 한양부 관사에 기거했다. 한성부는 처음엔 한양부로 불렸다. 이성계가 한양부 관사를 떠나 경복궁에 들어간 때부터 경복궁은 조선왕조 제1궁궐이 되었다. 이른바 법궁(法宮)이 된 것이다. 法에는 '법률'뿐 아니라 '모범, 표준'이란 뜻도 있었다.

그런데 경복궁은 조선시대 내내 법궁의 기능을 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이전인 조선 전기에도 그랬고 이후인 후기에도 그랬다. 그래서 경복궁이 법궁이란 말은 공허한 소리에 불과했다.

조선 후기에 경복궁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한 이유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성난 백성들이 방화하는 바람에 불타버렸던 것이다. 지금 서울에 있는 5대 궁궐 즉 경복궁·창덕궁·창경궁·덕수궁·경희궁 중에서 임진왜란 발발 당시에 있었던 왕궁은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다. 이 세 궁궐이 임진왜란 초기에 불탔다. 선조 임금이 도성을 버리고 도망가자, 백성들이 분노해서 불을 놓았던 것이다.

그 뒤, 경복궁 자리는 오랫동안 공터 혹은 폐허 상태로 남았다. 정부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다시 짓고 덕수궁과 경희궁을 새로 지으면서도 경복궁만큼은 복원하지 않았다. 비용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에 못지않게 관심 부족 때문이기도 했다. 왕들은 다른 궁궐을 다시 짓거나 새로 지으면서도 경복궁에 대해서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말로는 법궁이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외면만 했던 것이다.  

경복궁이 복원된 것은 흥선대원군 이하응에 의해서였다. 이때가 1868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 근 300년이나 지난 뒤였다. 이하응이 경복궁을 중건하느라 당백전이라는 화폐를 발행했다가 화폐 질서를 혼란에 빠뜨렸다는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렇게 해서 겨우 복원됐지만, 경복궁은 오래 쓰이지 못했다. 1895년 경복궁 내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고 1896년에 고종이 일본의 간섭을 피하고자 경복궁을 탈출했다. 궁을 빠져나온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기거하면서, 경복궁은 또다시 외면을 받게 되었다. 러시아공사관을 나온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경복궁의 위상은 한층 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조선 후기의 경복궁은 정치 중심의 기능을 거의 해내지 못했다.

사정은 조선 전기에도 다르지 않았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경복궁은 법궁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경복궁을 대신해 제1궁궐의 위상을 가진 곳은 창덕궁이었다. 왕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더 많이 찾았다. 후기뿐 아니라 전기의 왕들도 경복궁에 대해 애착을 갖지 않았던 것이다.

이방원에서 시작된 '경복궁 홀대'

경복궁 근정전 내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이다.
 경복궁 근정전 내부. 임금의 공식 집무실이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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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은 조선왕조와 함께 탄생한 궁궐이다. 그래서 역사적 의의가 매우 큰 궁궐이다. 그런데도 오백년 내내 찬밥 대우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바로 태종 이방원한테 있었다. 경복궁 홀대의 역사가 이방원으로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경복궁이 완공된 지 3년 뒤인 1398년. 이때까지도 경복궁은 법궁 역할을 잘 하고 있다. 그런데 이 해에 이방원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이복동생 이방석과 실권자 정도전을 죽였다. 이것이 제1차 왕자의 난이다.

실권을 잡은 이방원은 둘째형(당시엔 장남) 이방과를 왕으로 추대했다. 훗날 정종이란 타이틀을 갖게 된 이방과는 1399년에 자신의 거처를 한양에서 개경으로 옮겼다. 사실상의 개경 천도를 단행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경복궁은 불과 몇 년 만에 법궁의 지위를 잃게 되었다. 

개경으로 천도한 이듬해인 1400년, 이방원은 이방과를 밀어내고 제3대 주상에 등극했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405년에 이방원은 정부를 이끌고 한양으로 다시 천도했다. 한양으로 돌아왔으니 경복궁에 들어가야 했지만, 이방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광화문을 열고 경복궁에 들어가는 게 꺼림칙했던 것이다.

이방원의 입장에서 볼 때, 경복궁은 아버지를 몰아내고 가정을 참극으로 이끈 자신의 패륜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그곳은 살인의 추억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경복궁에 들어가는 게 섬뜩할 수밖에 없었다.

1405년 한양으로 재천도할 당시, 신하들의 대체적인 분위기는 경복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방원은 거부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반론을 폈다. 이방원이 어떤 논리로 경복궁 환궁을 거부했는지는, 그로부터 6년 뒤에 작성된 <태종실록>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음력으로 태종 11년 10월 4일자(양력 1411년 10월 21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이방원은 '경복궁은 음양이 조화롭지 못하다고 어느 역술가가 말했다', '경복궁은 내가 아버지를 몰아내고 집안을 참극으로 몰아넣은 곳이라 차마 갈 수 없는 곳이다' 같은 말들로 경복궁에 대한 거부감을 피력했다. 자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차마 경복궁에 갈 수 없었다고 토로한 것이다.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유아인 분).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유아인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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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원이 경복궁을 거부한 의도는 다른 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조선 건국의 설계자인 정도전에게 열등감 비슷한 경쟁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조선 건국 직전에는 정몽주를 죽이고, 건국 뒤에는 정도전을 죽였다. 그는 나중에 정몽주는 높여주면서도 정도전에 대해서는 끝내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만큼 정도전에 대해서 만큼은 심사가 뒤틀려 있었다.

그런 이방원의 입장에서 볼 때, 경복궁은 정도전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곳이었다. 왜냐하면, 경복궁이 정도전의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정도전은 경복궁을 만드는 과정은 물론이고 경복궁 내 곳곳에 명칭을 붙이는 과정에까지 개입했다. 태조 4년 10월 7일자(1395년 11월 19일자) <태조실록>에는 정도전이 각각의 건물에 대해 왜 그런 명칭을 붙였는지를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방원은 경복궁이 싫었다. 아버지 생각이 나서 괴로운 곳이었고, 정도전 생각이 나서 역겨운 곳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이 새롭게 건설한 궁궐이 경복궁 동편의 창덕궁이다. 비원으로도 유명한 창덕궁은 그런 배경에서 생겨났다. 경복궁에 대한 이방원의 트라우마 때문에 생긴 궁이었던 것이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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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저러한 이유로 경복궁이 꺼림칙해서 이방원이 창덕궁 공사에 착수했다 해도,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한 직후에는 경복궁에 기거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한양으로 재천도한 1405년만 해도 한양에는 궁궐이 경복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방원은 경복궁에 가는 게 싫었다. 그래서 창덕궁이 완공되기 전까지 신하의 집에 기거했다. 한때는 정도전의 편이었다가 나중에 자기 편이 된 조준의 집에 머물렀다. 경복궁에 대한 이방원의 기피 의식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방원한테 경복궁은 악몽 같은 곳이었다. 가족에 대한 패륜을 떠올리게 하고 정도전에 대한 열등감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이방원은 경복궁이 법궁이라는 점을 무시하고 창덕궁을 사실상의 제1궁궐로 활용했다.

이 같은 이방원의 태도는 그의 계승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왕들은 가급적 창덕궁에 머물렀다. 그래서 조선왕조 내내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훨씬 더 오랫동안 정치의 중심에 있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 이후의 왕들이 경복궁 중건에 열의를 보이지 않았던 원인 중 하나도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광화문광장 근처를 지나는 사람들은 경복궁과 광화문을 자기 머릿속에 담아두게 된다. 경복궁과 광화문은 이 주변을 지나는 이들의 머릿속에 오래도록 기억된다. 이방원의 경우도 그랬다. 그에게는 이곳이 패륜과 열등감을 떠올리게 하는 곳이었다. 어쩌면 그는 이곳을 지나거나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심쿵'하며 떨렸을지도 모른다.


태그:#육룡이 나르샤, #이방원, #경복궁, #창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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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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