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풀 포스터

▲ 데드풀 포스터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약육강식이란 말이 있다. 약자는 먹히고 강자는 먹는다는 뜻이다. 아주 오랜 세월동안 변치 않는 자연법칙처럼 여겨져온 이 말은 사실 근시안적 사고에서 나온 현상적 용어에 불과하다. 약자라 해서 항상 먹히는 게 아니고 강자라 해서 늘 먹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강자가 늘 승리했다면 지구는 공룡이 지배하고 있었을 게 아닌가. 생물학의 역사에서 약자가 강자를 이기고 더욱 오래 살아남는 모습을 발견하는 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허버트 스펜서가 처음 사용하고 찰스 다윈이 일반화시킨 적자생존(survival of the fittest)이란 말은 이 같은 현상을 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적자생존은 자연 생태계에서 더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더욱 적합한 자가 살아남는다는 뜻이다. 찰스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늘의 강하고 약함보다는 변화하는 환경에 적합하게 변화할 수 있느냐가 더욱 중요한 능력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20세기 폭스가 내놓은 마블 히어로물 <데드풀>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가운데 약자에 가깝지만 동시에 적자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왠만한 마블 코믹스 히어로물이 1억달러를 훌쩍 뛰어넘는 제작비로 만들어지는 데 비해 <데드풀>의 제작비는 5800만 달러에 불과하다. 이는 <어메이징 스파이더맨2>의 1/5, <아이언맨3>의 1/4, <토르: 다크 월드>의 1/3 정도 되는 돈이다.

하지만 <데드풀>의 기세는 다른 히어로물 못지 않다. 개봉 2주만에 전세계 흥행수입 5억달러를 돌파했고 세계 각국 박스오피스 수위권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검사외전>의 독주체제를 하루아침에 끝장내버리고 '볼 영화가 없다'고 푸념하던 관객들을 극장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개봉 열흘이 채 되기도 전에 관객수 200만을 훌쩍 넘어선 <데드풀>은 조만간 지난 가을 <앤트맨>이 기록한 280만 관객도 넘어설 것이 확실시 된다.

마블 히어로물은 이미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지난 2008년 개봉한 <아이언맨> 이후 무려 9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오는 작품마다 전 세계 극장가를 휘어잡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스파이더맨> 시리즈와 <X-맨> 시리즈 등 <아이언맨> 이전에 개봉한 마블 히어로 영화가 적지는 않았으나 개별 작품을 넘어 세계관을 공유하는 마블 히어로물의 오늘은 마블 스튜디오가 직접 제작에 참여한 <아이언맨>부터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마블 스튜디오만 마블코믹스를 영화화하는 건 아니다. 마블이 열심히 판권을 팔던 시절엔 유니버설픽처스, 뉴라인시네마, 컬럼비아픽처스, 20세기 폭스, 라이언스게이트 등 이름만 대도 알 만한 할리우드 제작사들이 캐릭터 판권을 구입해 독자적인 영웅물을 제작하고 나섰다. <스파이더맨>시리즈와 <X-맨>시리즈를 연달아 흥행시킨 20세기 폭스는 그 중에서도 주목할 만한 제작사다. 두 시리즈 외에도 <데어데블>과 <엘렉트라>, <판타스틱 4>시리즈 등이 20세기 폭스가 제작한 마블 코믹스다.

<데드풀>은 마블 코믹스에 각별한 애정을 보여온 20세기 폭스가 새롭게 집어든 카드다. 울버린을 연상시키는 힐링팩트(자가치유) 능력에 타고난 나불거림까지 장착한 데드풀은 마블 히어로 가운데 가장 독특한 캐릭터란 평가를 받아 왔다. 독특한 만큼 인기도 적지 않아 무리없이 영화화가 결정됐다.

주연으로는 코믹한 청춘스타에서 액션연기를 능숙하게 소화하는 존재감 있는 배우로 꾸준히 입지를 넓혀가던 라이언 레이놀즈가 낙점됐다. DC코믹스를 원작으로 한 <그린 랜턴: 반지의 선택>에서 아쉬움만 남겼던 그가 마블코믹스 캐릭터를 통해 히어로의 세계에 연착륙할 수 있을지 기대가 적지 않았다.

좁은 운신의 폭

데드풀 <데드풀>은 근래 유행하는 B급코드를 한 층 진화시킨 병맛 액션물이다.

▲ 데드풀 <데드풀>은 근래 유행하는 B급코드를 한 층 진화시킨 병맛 액션물이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사실 <데드풀>은 운신의 폭이 큰 영화는 아니었다. 한 해에도 제작비 1억달러를 훌쩍 넘는 작품이 여러편 쏟아지는 할리우드에서 5800만달러로 만든 히어로물은 여러모로 모자란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액션의 규모가 히어로물의 생명으로까지 여겨지는 상황에서 부족한 제작비는 여러모로 발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액션이 대부분 자잘한 총격전과 칼싸움으로 꾸며지는 건 이 때문이다.

부족한 제작비는 제작진과 출연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장편 연출을 처음 맡는 팀 밀러가 감독이란 것부터 라이언 레이놀즈 이외엔 이렇다 할 유명 배우가 출연하지 않는다는 점까지 아쉬운 부분이 적지 않았다. 영화가 데드풀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것처럼 수많은 마블 캐릭터 가운데 <X-맨>시리즈의 비주류 캐릭터 둘만 등장하는 것도 제작비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야기 면에서 뚜렷한 승부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영화가 시작부터 공표하고 있는 것처럼 <데드풀>은 말 그대로 한 편의 사랑이야기다. 그것도 매우 단순한 구성의.

줄거리는 불과 두세줄로 요약이 가능할 정도다. 영화는 우선 더없이 행복한 나날을 보내는 연인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들 중 남자가 불치병에 걸려 고통받는 모습을 그려낸다. 그러던 중 병을 치료해준다며 정체불명의 남자가 접근하고 주인공이 꾀임에 넘어가 생체실험을 당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그로부터 돌연변이의 DNA가 깨어나지만 동시에 얼굴이 망가져 사랑하는 연인에게 돌아갈 수 없게 된 주인공은 스스로를 데드풀이라 이름짓고 자신의 삶을 망친 악당에게 복수를 시작한다.

스스로 적자임을 입증한 '병맛 아가리 파이터'

데드풀 <데드풀>은 웨이드(라이언 레이놀즈 분)와 바네사(모레나 바카린 분)의 사랑이야기다.

▲ 데드풀 <데드풀>은 웨이드(라이언 레이놀즈 분)와 바네사(모레나 바카린 분)의 사랑이야기다.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의 특별함은 이야기 그 자체보다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에 있다. 다른 영화에서 보기 힘든 독특한 구성과 형식, 그리고 개성 넘치는 캐릭터가 승부의 지점이다. 여타 히어로물처럼 지구, 못해도 도시 하나의 존망을 위협하는 강력한 악당은 등장하지 않는다. 자신의 행복한 연애를 방해한 악당에게 처절한 응징을 가하는 데드풀의 한 판 놀음이 영화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그 과정에선 B급 정서 가득한 유머가 넘쳐 흐른다. 어떠한 순간에도 위트를 잃지 않고 단순한 말장난부터 19금 유머와 자학개그, 유명 작품 패러디를 넘나드는 다채로움이 가히 일품이라 할 만하다. <대부>, <쥬라기 공원>, <테이큰>, <에이리언>, <127시간>, <스타워즈: 제국의 역습>, <그린랜턴>, <엑스맨 탄생: 울버린>, <로보캅>, <나이트메어> 등 유머의 소재로 쓰이는 작품만도 10편이 넘는다. 영화 이외에도 음악과 드라마, 만화 등 대중문화를 웃음의 소재로 활용한 경우가 적지 않다.

한마디로 <데드풀>은 잘 만들어진 B급정서 오락물이다.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 <스파이> 등 근래 흥행한 B급정서 영화보다도 성향이 한 층 짙어졌다. 소위 '병맛'이라 불릴 법한 수준이다. 독특한 캐릭터와 폭주하는 유머가 훌륭한 번역팀과 만나 맛깔나는 106분을 선사한다. 작지만 임팩트 있는 액션도 힘을 더한다.

관객들이 이 영화에 환호하는 건 이같은 정서가 새롭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줄거리 면에선 특별할 게 없지만 캐릭터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 상당히 참신하다. 규모와 세기로 승부하는 블록버스터가 넘쳐나는 할리우드에서 부족한 제작비 탓에 자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 오늘의 <데드풀>을 탄생시킨 게 아닐까?

주어진 환경에 안주하기보다 저만의 무기를 갈고 닦아 치열하게 승부한 <데드풀>은 스스로 자신이 새 시대 액션 히어로물의 적자임을 입증해나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데드풀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팀 밀러 라이언 레이놀즈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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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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