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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화에서 이어집니다.)

다케우치 속셈은 실현되지 못했다. 동북수용소를 일본판 '테레지엔슈타트'로 만들어 국제사회를 속이려던 계획이 유야무야됐다는 것이다. 미국이 현지 조사단 파견을 멈췄고, 다른 나라들 역시 수용소에 대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연구단에서는 다나카 단장이 구태여 미심쩍은 행동을 하기보다 그냥 무관심 속에 묻자는 논리로 다케우치 의사를 뭉개버렸기 때문이다. 다케우치는 그 같은 처사에 대해 영 께름칙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다나카 단장의 명을 뒤집을 힘이 그에게 쥐어지지 않았다는 것만 탓했다.

연구단이 그러는 동안 K가 떠난 동북수용소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었다. 수감자들이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지역에 투입되면서 일었던 공포와 분노의 산물이었다. 그들에게 점조직이 생긴 것이다.

전일본공동체 본부 엔도 명예본부장 육감이 맞았다. 우토로 마을 폭력 사건 때 마을 사람들을 도와 맞섰던 교토대 학생 3명이 그곳에 있다. 공안부 경찰에 잡혀 수용소에 감금된 것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잡아들였다. 그러나 대학가 소음을 잠재우려 한 그들 뜻은 달성되는 줄 알았지만 결과적으로 물거품이었다. 오히려 그들에게 몰래 재소자들을 포섭하고 조직화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수용소 안 은밀한 모임이라는 불씨를 키운 것이다.

교토대 경제학부 3학년인 요시다 지로가 그 모임 책임자다. 그리고 '세포'를 만드는 것은 법학부 2학년 혼다 마쓰야가 담당한다. 문학부 2년생 가네다 사사키는 전략과 기획을 맡는다. '3다[田]'로 일컬어진 그들은 학생 운동가답게 뜨거운 심장을 지녔다.

게다가 그들이 벌이는 일에는 제법 치밀한 면모도 보인다. 그들은 1차 목적을 수용소에서 탈출하는 것으로 삼았다. 그 실행을 위해 사람들을 모으는 일도 꾸준했다. 그 덕에 수용소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채 안 된 시점에 벌써 20여명의 동패를 만들었다. 이제 그간 틈틈이 짜 놓았던 탈출계획을 실행시키려 고민하고 있다.

"요시다 선배. 우리가 수용소에서 도망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폭력 밖에 없습니다. 방사능 피폭물 수거 작업 나갈 때가 기횝니다. 일하는 척하다가 간수들을 제압시키고, 트럭을 빼앗아 탈출하는 것뿐이라는 얘깁니다."

가네다가 궁리에 궁리 끝에 내놓은 결론이다. 끊임없이 탈출하고 잡혀오는 '쿨러 킹' 힐츠(스티브 맥퀸)의 오토바이 타는 모습이 그리운 고전영화 1963년작 <대탈주(The Great Escape)>처럼 한 '병영 막사(barrack)'에 있는 수감자들이 모두 한뜻의 한패도 아니다.

더욱이 바닥을 야금야금 파내 땅굴을 만들기는 더 어렵다. 대형 건물 세 동으로 이뤄진 3층 구조에다가 지은 지 얼마 안 된 튼튼한 콘크리트 건물인 탓에 손작업으로 구멍 뚫기조차 엄두를 못 낸다.

1963년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에서 끊임없이 탈출하고 잡혀오는 '쿨러 킹' 힐츠(스티브 맥퀸)의 오토바이 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1963년 영화 <대탈주(The Great Escape)>에서 끊임없이 탈출하고 잡혀오는 '쿨러 킹' 힐츠(스티브 맥퀸)의 오토바이 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 영화 <대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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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네다, 자네 말이 맞는 것은 인정해. 하지만 어떤 수로 간수들을 따돌린다는 것인가?"

요시다가 물었다. 가네다는 기다렸다는 듯 답한다.

"경찰들이 시위대를 잡아갈 때 쓰는 방법처럼 3인 1조가 돼서 간수들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팔과 허리춤을 잡은 상태에서 나머지 한 사람이 간수들에게 얼굴 보호 마스크를 벗겨버리겠다고 위협하면 됩니다. 총이든 뭐든 던져버리고, 마스크를 벗기지 못하도록 안간힘을 쓸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도 방사능에 오염된 곳에서 마스크 없이 얼마나 많은 방사능에 노출될 것인지 우리보다 훨씬 더 두려워하니까요."

요시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만일 실패할 경우 플랜B는 있나?"

가네다는 즉답한다.

"어차피 1차에서 실패하게 되면, 잠시 우왕좌왕하는 상태가 생깁니다. 그때 우리 동패들이 사방으로 동시에 뛰쳐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트럭 한 대에 20명씩 5대에 나눠 타고 오니까, 그들 중 최소한 우리 동패 네댓 명은 포함됩니다. 우리까지 8명이면 각각 사방으로 내달릴 수 있다는 얘깁니다. 최악의 경우 총성이 울리겠지만요."

"총성이라…."  
   
요시다가 잠시 얼굴을 찡그리며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마음이 섰는지 단호하게 말한다.

"어차피 여기를 탈출해야 해. 그래서 일등국가라고 우쭐대는 일본, 그곳에 존재하는 이 지옥, 이 망할 놈의 현실을 까발려야 된다는 거지. 세부적인 내용은 가네다가 사람들과 상의해서 만들어.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마칩시다."

어쩌면 이 계획은 그들 젊은 날을 마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그만큼 절박했고 단호했다. 우토로 마을에서 우익 전문 시위꾼들을 공격한 때도 그랬다. 젊은이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용납할 수 없는 일이 현실로 벌어졌다. 정의, 자유, 평등, 박애는 아무 데도 없었다.

겉만 번지르르한 일본 민주주의 이면에는 폭력과 증오로 가득 찬 기름진 속살만 썩어갔다. 학교에서 배운 것 모두가 한낱 글자들의 나열에 불과했다. 이제는 스스로 그들 이상을 현실 속에서 되찾을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걸작 영화 <플래툰>(Platoon)에서 젊은 신병 크리스(찰리 쉰)는 감독 올리버 스톤의 젊은 날을 모티프로 삼았다고 한다. 대학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전쟁터로 나선 크리스는 죽임과 죽음이 교차하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낀다. 살아 돌아온 다음 술 마시고, '마리화나 파티'를 벌인다. 살아있는 전설이 된 그룹 '스모키 로빈슨 앤드 더 미러클즈'(Smokey Robinson and The Miracles) 노래 <트랙스 오브 마이 티어즈>(Tracks of My Tears)를 따라 부르다가 쓰러져 잠든다.

다음날 다시 삶과 죽음을 기약할 수 없는 전장에 습관처럼 나간다. 그게 현실에서 도피한 또 다른 인생이었다. 마리화나에 취해 다시 권력자들 전쟁 놀음에 나서는 그는 개인이 파괴되는 현장을 경험한다. 그리고 다친 몸을 이끌고 전쟁터에서 일상으로 돌아간다. 적은 자신 마음속에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으며.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올리버 스톤 감독의 걸작 영화 <플래툰(Platoon)>에서 일라이어스(오른쪽, 윌렘 데포)와 반즈(톰 베린저)는 선과 악의 화신으로 연기한다.
 베트남 전쟁을 다룬 올리버 스톤 감독의 걸작 영화 <플래툰(Platoon)>에서 일라이어스(오른쪽, 윌렘 데포)와 반즈(톰 베린저)는 선과 악의 화신으로 연기한다.
ⓒ 영화 <플래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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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토대 학생들은 달랐다. 승부가 정해져 있는 대결이었다. 굳은 제도와 강한 편견 사회에 부딪히는 대부분은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들은 가능성을 믿었다. 자신의 적이 마음 안에 있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현실에서 적을 인식하는 그 마음 자체를 파괴시키는 세력을 발견하고는 그 적과 기꺼이 싸운다. 결국 정의를 위한다는 신념을 접지 않고 무모한 게임을 시작한다.

화요일 오전 여느 때처럼 트럭 다섯 대는 수용소를 출발한다. 비가 오려는지 날은 끄느름하다. 두 번째 트럭에 가네다와 혼다가 탔다. 요시다는 네 번째 차에 올랐다.

혼다는 전날 저녁 식사 후 잠시 쉬는 시간에 각각 다른 방에 있는 6명 세포들에게 마지막 다짐을 받았다. 잘못하면 총상을 입을 수 있다, 최악의 경우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중 한 명은 얼굴에 주저함을 보였지만 나머지 대부분은 결연했다. 어차피 수용소에 있어도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 당국은 예상하지 못했다. 방사능 공포가 사람들에게 죽음을 무릅쓰는 일종의 동기가 될 줄은 짐작할 수 없었다.

운 좋게도 두 번째 차에 가네다와 혼다를 비롯 동패 5명이 모여 있다. 서로 비밀스러운 눈빛을 주고받는다. 작업 현장에 도착한 다음 내린 후 다시 점호를 한다. 각 차별로 내린 수감자들은 한 차에 20명 내외로 모두 100여명. 5대 차에는 총을 든 간수가 1명, 총이 없는 간수 2명, 그리고 운전하는 다른 간수 1명, 전부 합해 20명이 고작이다. 총의 위력을 믿어서다. 대중의 광기를 간과해서다.

점심때까지는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잠시 짬이 났다.  수감자를 위한 휴식이 아니다. 오후 작업에 들어가기 전 간수 자신들이 차 한 잔 마시고, 담배 한 대 피우기 위해 만든 10여 분의 시간이다. 몰래 가져온 술도 마신다. 이윽고 그들은 담배를 두툼한 방호 부츠로 짓이겨 끈다.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가 이어진다. 다시 작업 점호다.

"정렬! 정렬!"

제일 어린 간수가 수감자들에게 명령한다. 여기저기서 구시렁대는 소리가 들린다.

"지네들 담배만 피우고, 우리는 꽁초 주워 피울 시간도 안 주냐?"

집합 명령에도 간수들이 쳐놓은 경계선 밖 수감자 둘이 점호에 늦는다. 날카로웠던 호루라기가 이젠 찢어진다.

"어떤 놈들이 아직까지 꾸물거리나? 이것들이 쓴맛을 봐야겠네."

술 한 잔 걸친 최고참과 '군기 고참' 간수 둘이 눈을 부라린다. 두 사람 입은 동시에 거품을 문다. 그래도 두 수감자는 굼뜨다. 그러자 로마 병정들이 십자가를 멘 예수 등을 채찍으로 후려친 것처럼, 두 간수는 '수감자의 지팡이'로 그들 등짝을 사정없이 갈긴다.

"짜작. 짜작."

약간 시간 차로 들리는 소리가 뜻밖에 조화롭다. 하지만 맞는 이들 등짝은 핏빛이 배어난다.

"아악!" "억!"

자지러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덩치 큰 어른 둘이 방사능으로 오염된 흙바닥을 구른다. 작업으로 흘린 땀에 흙먼지가 들러붙는다. 더러운 악의 인연처럼 끈끈하다. 땀인 줄 알았는데 두 번째 맞은 지팡이가 정통으로 한 수감자 이마를 내리치며, 흘린 피다. 그러니까 등짝에선 피가 배어나오고, 마빡에서는 피를 철철 흘리는 영화 같은 장면이다.

명배우 타이론 파워 젊은 시절, 투우사의 욕망과 비애를 보여준 1941년 영화 <혈과 사(Blood and Sand>, 그리고 동명 영화를 새롭게 꾸민 1989년 영화가 떠오른다. 팜므 파탈 도나 솔(샤론 스톤)과 불륜에 빠진 투우사 후안(크리스토퍼 라이들)에게 찔린 소 피와 함께 소가 들이받아 상처 난 투우사 피가 모래와 뒤섞인다. 마치 사랑과 증오가 버무려져 땅바닥에 팽개쳐지는 영화 전체의 주제처럼.

투우사의 욕망과 비애를 보여준 1941년 영화 <혈과 사(Blood and Sand>에서 '팜므 파탈' 도나 솔(리타 헤이워드)은 유부남 투우사 후안(타이론 파워)과 불륜을 일으킨다.
 투우사의 욕망과 비애를 보여준 1941년 영화 <혈과 사(Blood and Sand>에서 '팜므 파탈' 도나 솔(리타 헤이워드)은 유부남 투우사 후안(타이론 파워)과 불륜을 일으킨다.
ⓒ 영화 <혈과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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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수들의 잔혹한 행태는 요시다, 가네다, 혼다도 계산하지 못했던 변수다. 매 맞는 두 사람을 보면서 전체 수감자들은 흥분했다. 그 흥분은 이성을 잃게 만든다. 다음 단계는 광분(狂奔)이다. 그 광분이 요시다 동패의 탈출구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애초에 계획했던 네 방향 탈출 계획이 저절로 다방면 도주로 진화했다. 군중이 한 번에 달려들면 걷잡을 수 없다. 간수 몇몇은 넋이 빠져 도망친다. 몇몇은 그나마 수감자들을 말리려고 달려든다. 중과부적이다. 결국 총을 버리고 달아나는 데 급급하다.

"총을 챙겨! 그리고 트럭 키를 빼앗아야 돼!"

가네다가 동패들에게 소리친다. 간수들의 느긋한 점심시간이 끝난 지 채 5분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간부들은 총을 빼앗긴다. 도망치는 수감자들을 망연하게 바라본다. 그래도 임무에 충실한 간수 한 두 명이 자신들 주변만 맴도는 호루라기를 삑삑 분다. 멈추라고 소리치지만 도망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독기 오른 간수 중 하나가 도망치는 떼에 총구를 겨눈다.

"탕! 타당! 탕! 탕!"

네 발 총성이 울린다. 조준 사격한 총탄 하나가 혼다 허벅지를 가른다. 대동맥 혈관을 건드렸다. 피가 치솟는다. 혼다는 그 자리에 쓰러진다. 마흔 줄을 넘은 동패 중 하나가 지혈을 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

"먼저 도망가세요. 제가 여기서 멈추면 저들이 데려갈 테니까요."

동패도 망설인다. 함께 가자는 눈빛이다. 하지만 사회에 남겨두고 온 어린 딸이 눈에 밟힌다. 아쉬움만 남기고 떠난다. 혼다를 빼고 요시다와 가네다, 그리고 수십 명 수감자들은 혼다의 시야에서 멀리 사라진다.

뒤늦게 쫓아온 간수들이 씩씩댄다. '군기 고참' 간수가 반쯤 누워 있는 혼다를 죽일 듯 쳐다본다. 약간 술김에 살의 담긴 총은 혼다의 목을 짓누른다. 동료 간수가 그를 막는다. 하지만 그 간수는 동료를 뿌리친다.

"너 같은 조센징을 돕는 일본인은 일본인이 아냐. 너 같은 놈들 때문에 조센징들이 날뛰는 거야. 제 나라로 돌아가지도 않고. 일본 국민들 세금만 파먹고 있지. 게다가 배은망덕하게도 우리에게 덤비고…."

"당신 같은 일본인 때문에 우리 일본이 세계에서 2등 국가라는 치욕적인 말을 듣습니다. 그걸 왜 모르시죠? 최소한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덕목이 있습니다. 자이니치나 한국인들이나 우리와 같은 사람이에요."

혼다가 지지 않고 말한다. 그 말이 더욱 총을 든 간수를 자극한다.

"이 새끼, 너 같은 놈은 죽어 마땅해."

의도적이든 사고였든 관계없다. 방아쇠는 당겨졌다. 총성이 메아리친다. 혼다는 허벅지 총상에 이어 심장을 관통하는 총상을 입고 숨진다. 젊음을 자신의 이상과 맞바꿨다. 가네다가 걱정했던 총성 둘이 혼다를 앗아갔다.


태그:#영화 대탈주, #영화 플래툰, #영화 혈과 사, #올리버 스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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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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