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순정>에서 형준 역을 맡은 배우 박용우.

박용우는 영화 <순정>에서 라디오DJ 형준 역을 맡았다. 어릴 적 범실(도경수 분)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그는 소년 시절 친구들과 나눴던 우정과 사랑을 그리워 하는 인물이다. ⓒ 유성호


사전에 존재하지만 쉽게 꺼내지 못하는 단어들이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모든 게 빠르게 변하는 요즘 괜히 사용했다가 쑥스러워질 법한 말들이 대개 그렇다. 그중 몇 단어를 복기해본다. 순정 역시 그중 하나가 아닐까.

이 단어를 그대로 제목으로 쓴 영화 <순정>이 그래서 처음엔 낯설게 다가온다. 십 대 소년 소녀들의 우정과 사랑, 엇갈림을 그린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인간의 순수한 감정을 바라보고자 한다. 도경수, 김소현, 연준석, 주다영의 청년 배우들이 저마다 장기를 뽐내며 이야기를 이끌었지만, 누구보다 <순정>이 품은 영화적 감성을 아우르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박용우(45)다. 도경수가 맡았던 소년 범실의 현재 인물인 형준을 연기한 그를 지난 24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복잡함과 단순함 사이



박용우는 이 영화의 출연을 몇 번 거절했다. "잘하지 못하면 소용없는 영화고, 못 하면 손해인 작품으로 생각했다"며 솔직한 이유를 전했다. "인생에서 그런 본연의 감정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다지만 그것을 잘 표현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애써 무시하거나 합리화시킬 수도 있는 순정의 영역을 영화화했으니 여러 걱정이 들 만했다. 하지만 막상 결정을 내린 후 그는 빠르게 작품에 녹아들고자 했다.

 영화 <순정>의 한 장면.

영화 <순정>의 한 장면. ⓒ 주피터필름

"(대중성에 대한 걱정도) 물론 여러 번 했죠. 하지만 글쎄요. 인생에서 중요한 게 참 많고 걱정할 것도 참 많아요. 반대로 그런 복잡한 세상에서 최대한 단순해지려 노력하는 것도 꽤 의미 있을 거 같아요. 현실적 조건도 중요하지만,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사는 것도 보람 있지 않을까요. 특히 감정을 표현하며 문화 영역에 참여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필요가 있지요.

순정은 학창시절에 갖고 있었을 수도 있고 현실 속 나의 일부일 수도 있어요. 답은 가까운 곳에 있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를 할 때 굳이 과거를 떠올리며 접근하진 않았어요. 지금의 제 모습을 투영시켰죠. 미처 내가 생각 못 했거나 부정했지만, 그 마음 그대로 가진 지금의 제 모습을 가져오려 했죠."

풋풋했지만 친구와 사랑의 대상에겐 덜 성숙한 태도를 보인 소년은 어른이 되어 깊은 아쉬움을 안고 산다. 누구나 그 비슷한 아쉬움을 안고 살고 있지 않을까. 박용우로선 그게 순정일 수 있다. 이미 결론이 난 인간관계를 떠올릴 때마다 따라붙는 숱한 가정법들과 아쉬움들, <순정>에 참여하며 박용우 역시 비슷한 종류의 생각으로 내심 애틋해지기도 했다.

그렇기에 <순정>은 사춘기 감성을 자극할만한 여러 음악이 등장한다. 연출을 맡은 이은희 감독이 신경 써서 결정한 노래들이다. 영화의 첫 장면, 라디오 DJ인 형준이 소개하는 그룹 캔자스의 'Dust in the Wind'를 비롯해 칼라 보노프의 'The Water Is Wide' 등이 그 예다. 특히 시골 친구들이 마을 노래자랑에서 단체로 부르는 '보랏빛 향기' 장면은 박용우가 직접 드럼 연주를 자청해 OST에 참여한 결과물이다. "시나리오를 읽으면 음악이 들리는 기분이었다"며 박용우는 "좋고 싫음을 판단하기 전에 마음을 울리는 노래들이 다들 있잖나. 그게 이 영화에 실렸다"고 설명했다.

치유의 과정

 영화 <순정>에서 형준 역을 맡은 배우 박용우.

<순정>에서 박용우는 수십 초간 이어지는 오열 연기를 보인다. 이를 위해 당시 현장에서 약 5분 가량 눈물을 흘렸다. 박용우는 "감정과 상황에 몰입했고, 그 상황을 즐기기까지 했다"며 "눈물 연기를 하면서 스태프와 교감까지 하는 게 드문 일인데 다 이뤄졌다"고 기억을 전했다. ⓒ 유성호


언제부턴가 박용우는 변했다. 그 지점을 명확히 짚긴 어렵지만 적어도 최근 그가 참여하는 작품들을 보면 알 수 있다. <봄>(2014)과 <순정>이 묘하게 정서적으로 이어진다. 인간 본연의 감정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그렇다. "상업적 성공도 중요하지만 그런 본질의 것을 건드리는 작품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박용우는 품고 있었다.

"현실에선 뭔가 닫혀있고 일그러져 있는 답답한 경험 등을 하잖아요. 제겐 참여한 작품들이 치유의 과정이자 성장의 과정이었어요. 생각하기 나름인데 배우가 작품을 한다는 건 흥행 여부와 상관없이 성장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그래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작품이 있더라고 그걸 통해 전 성장했으니까요. 무엇을 보고 느끼느냐에 따라 작품을 대하는 자세가 달라지는 거 같아요."

그를 스타덤에 올린 <혈의 누>(2005), <달콤 살벌한 여인>(2006) 이후 변한 작품 선택 방향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았다. 작품 참여가 뜸해지더라도 그는 천천히 가고 싶어 했다. 물론 "인기를 얻고픈 마음도 있"다. "교감에 대한 욕구는 늘 있지만, 단순히 인기에 대한 욕망 자체가 의미 없다는 걸 깨달았"기에 다른 길을 가기 시작한 셈이다.

"스스로가 작품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출발점이 돼야죠. 결과는 관객들이 평가하는 거고요. 최대한 일희일비하지 않으려고요. 어떤 작품 현장에선 제가 정말 엉망으로 연기했는데 연출력에 따라서 잘한 것처럼 보인 것도 있었고, 현장에서 즐겼는데도 화면에선 잘 안 나오는 것도 있었어요. 그래서 더욱 흥분하거나 희열감에 취하지 않으려 합니다.

음악으로 치면 배우는 연주자들이잖아요. 주인공이 수석 연주자라면 조연, 단역 역시 하모니를 위한 주요 연주자죠. 작품을 위한 좋은 배우가 되는 게 중요해요. 개인의 욕망보단 작품이 지닌 주제의식을 명확히 품는 거죠. 그런 배우는 주연이 안 될 수 없어요! 본래 배우는 다들 튀어 보이고 싶어 하고, 상대를 받아주고 에너지를 나눠주면 손해하고 생각하거든요. 그걸 깨 가는 겁니다."    

진짜 자유를 느끼다

 영화 <순정>에서 형준 역을 맡은 배우 박용우.

역할의 비중을 따지지 않는다. 작품의 주제의식에 공감하면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주의다. 다만 그는 "나쁜 시나리오에서 좋은 영화가 나올 수는 없지만, 좋은 시나리오에서 나쁜 영화가 나올 수는 있다"며 "그럼에도 최대한 공감 가는 시나리오를 택해야 한다"고 전했다. ⓒ 유성호


1994년 MBC 공채 탤런트 출신에 본격적인 데뷔작은 영화 <올가미>(1997)니까 어느덧 그의 연기 경력도 20년 가까이 됐다. "처음부터 배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없었"고 "그저 TV에 나오는 걸 동경했다"며 호탕하게 웃었지만, 지금의 그는 달랐다. 교사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가르침을 받다 문득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연기를 파고들었다. 여러 작품을 겪으며 대중의 관심도는 부침이 심한 변수였지만, 적어도 박용우의 연기 열정만큼은 변함없는 상수였다.

"물리적 조건은 항상 변하기 마련이에요. 경제 상황에 따라 시대에 따라 그렇죠. 거기에 대해선 할 말이 없어요. 그런데 열정, 진심, 사랑 이런 건 원형의 것이잖아요. 변함이 없는 겁니다. 전 이걸 믿어요. 변하는 것들은 사람을 약하게 하고 결국 변하지 않는 것들이 사람을 강하게 만듭니다. 모두 그걸 추구하며 사시겠지만, 저 역시 그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제 경력을 20년이라 치면, 16년 정도는 시력이 몹시 나쁜 배우였어요. 그 후 한 3·4년은 시력이 어느 정도 좋아졌다고 할까요. 막연했고, 안갯속에 있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연기자로서 명확해요. 평생 연기할 겁니다. 누가 시켜주지 않아도 찾아서라도 할 각오예요. 물론 (잊힐 수 있다는) 두려움도 있죠. 그게 절 성장시키기도 합니다. 무릎이 꿇렸으니 일어날 수 있는 거죠. 위기가 없는데 희망이 어찌 올 수 있겠어요(웃음)."

박용우는 세상을 살만하게 만드는 수많은 보통의 존재들을 믿고 있었다. "보이지 않게 자신의 역할을 진심으로 다 하는 사람들 덕에 세상이 좋아지는 것"이라며 그의 눈이 조금 더 깊어졌다. 영화 <순정> 속에서 분량이 채 몇 분 되지 않는 형준이라는 사람을 진심으로 연기했던 것도 그 이유였다. 박용우가 품은 영화에 대한 순정이 <순정>을 더 풍부하게 만든 주요 재료였다.

"왜 연기를 하냐고요? 평생 질문하고 답할 거 같네요. 뭐라 단정할 수 없지만, 그 질문은 제게 '너는 왜 사니?'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제 수준에서 그렇다는 말이에요. 연기를 통해 날 조금 더 사랑할 수 있다면 좋겠고, 그걸 공유하고 싶어요. 그 사랑스러움을 최대한 많은 관객과 나누는 시간이 생기길 바랍니다."

 영화 <순정>에서 형준 역을 맡은 배우 박용우.

언제부턴가 박용우는 자신을 소모하는 게 아닌 작품을 통해 치유받고 자신을 채우고 있었다. 여전히 부족함을 고백하면서도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위기를 겪을수록 침착하게 해 나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 유성호



순정 박용우 도경수 엑소 김소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