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유아인 분).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원(유아인 분).
ⓒ SBS

관련사진보기


조선시대에 관해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아는 것 중 하나는 왕들의 순서다. '태정태세 문단세'로 시작하는 이 순서는 많은 사람들의 머릿속에 안정적으로 입력되어 있다. '태정태세 문단세' 같은 글자에 조(祖)나 종(宗)을 붙인 칭호를 묘호라고 불렀다. 사당 묘(廟), 부를 호(號), 묘호다. 이것은 임금 부부가 죽어서 국가 사당인 종묘에 모셔질 때 받는 칭호였다.

그런데 '태정태세 문단세'란 순서에는 모순된 면이 있다. 관점에 따라서는 모순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칭호가 동아시아의 전통적 관행에 따라 제정되었으며 조선왕조가 그런 관행을 매우 중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태정태세 문단세'는 분명히 모순된 면이 담겨 있다.

그 모순이란 것은 이방원을 가리키는 태종이 세 번째 자리에 있다는 점이다. '태○태○ ○○○'처럼 클 태(太)가 첫 번째와 세 번째에 있는 것이 문제였다는 것이다. 원칙대로라면 '태태○○ ○○○'처럼 '태'가 첫 번째와 두 번째에 있어야 했다.

기원전 3세기에 농경지대 중국이 유목지대 몽골초원을 제치고 동아시아 최강이 되면서, 동아시아에서는 중국의 묘호 제정법이 국제적 관행으로 정착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태조라는 묘호는 명나라 태조 주원장의 경우처럼 건국 시조에게만 붙이고, 태종이라는 묘호는 당태종(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경우처럼 제2대 군주한테만 부여하는 관행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가장 좋은 글자인 태(太)자를 초대 및 2대 군주한테 부여하는 이런 관행 덕분에, 태종 칭호를 받은 제2대 군주는 초대 군주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건국시조한테 무조건 태조를 붙이고 제2대 군주한테 무조건 태종을 붙인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태조라는 칭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그 대상은 건국시조여야 한다는 것이고, 태종이란 칭호를 부여하고자 한다면 그 대상은 제2대 군주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초대 군주에게 태조를 붙이지 않을 수도 있었고 제2대 군주에게 태종을 붙이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관행은 이따금 변칙적으로 운영되었다. 한나라에서는 초대 황제인 유방에게 태조라는 묘호를 붙였다. 유방은 흔히 고조(高祖)로 불리지만 정식 묘호는 태조였다. 그런데 한나라에서 태종 묘호를 받은 이는 제5대 황제인 유항이다.

한나라에서는 제2대부터 제4대까지의 황제들에게 아무런 묘호도 부여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항은 묘호를 받은 두 번째 황제였다. 묘호를 두 번째로 받았다는 점에서 그는 제2대 군주였다. 그래서 태종 묘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변칙적 사례들이 간혹 있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볼 때 태조 칭호는 초대 군주에게 붙이고 태종 칭호는 제2대 군주에게 붙이는 것이 관행으로 이어졌다.    

이런 관행은 한국과 중국뿐 아니라 베트남에서도 대체로 지켜졌다. 일례로, 조선 세종과 같은 시기의 인물인 후레 왕국의 제2대 군주도 그랬다. 레 응우옌 롱(재위 1434~1443년)이란 이름을 가진 이 군주는 태종을 묘호로 받았다. 또 조선 중종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막 왕국의 제2대 군주도 마찬가지였다. 막 당 조안(재위 1530~1540년)이란 이름을 가진 이 군주도 태종을 묘호로 받았다.

 종묘.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에 있다.
 종묘. 서울시 종로구 훈정동에 있다.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한국에서 태종 묘호 받은 사람은 '이방원·김춘추' 둘

한국 역사에서 태종 묘호를 받은 이는 둘이었다.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의 조선 이방원이 대표적이다. 이방원 이전에 태종 묘호를 받은 사람은 신라 김춘추뿐이었다.

그런데 김춘추는 제2대가 아니라 제29대 군주였다. <삼국사기> 신라 본기 신문왕 편에 따르면, 김춘추가 죽은 뒤에 신하들이 태종이란 묘호를 부여한 것은 당태종이 중국을 통일한 것처럼 김춘추 역시 삼한 통일의 기초를 세웠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2대 군주가 아닌데도 김춘추한테 태종 묘호를 부여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적 관행에서 본다면 김춘추는 진정한 의미의 태종은 아니었다. 

이방원은 진정한 의미의 태종이 되고 싶었다. '제2대 태종'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손에 피를 묻히며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 피 묻은 손으로 곧바로 왕이 되기 민망해서 그는 둘째형 이방과를 왕으로 옹립했다. 2년 뒤인 1400년, 이방과는 이방원 측의 압력을 받고 스스로 왕위를 포기했다. 그 결과, 이방원이 제3대 군주가 되었다. 이렇게 제3대 군주가 됐다는 사실은 '제2대 태종'을 꿈꾼 그에게 법적 장애가 되었다.

이방원은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군주였다. 이방원과 가까운 명나라 정부가 정도전 정권을 흔들지 않았다면, 이방원은 정도전을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이방원이 정권을 잡은 뒤에 명나라 정부는 무역특혜를 주는 방법으로 이방원에 대한 지지를 표시했다. 이 때문에 이방원은 명나라에 더욱 더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는 묘호 제정과 관련해서도 중국의 관행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의 관행을 따를 것 같으면, 이방원은 태종 묘호를 차지할 수 없었다. 그것은 제2대 군주인 이방과의 몫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방원한테는 장애도 아니었다. 아버지도 몰아내고 형제들도 죽인 사람한테 둘째형의 칭호를 빼앗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이방원은 중국의 관행을 교묘히 피해가는 방법으로 결국 태종 칭호를 차지하게 된다.

둘째형을 상왕으로 밀어낸 이방원은 18년간 임금 노릇을 하다가 1418년 스물두 살 된 충녕대군(훗날의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앉았다. 이방원은 형식상으로만 상왕이 됐을 뿐, 실제로는 여전히 최고지도자였다. 음력으로 태종 18년 8월 10일자(1418년 9월 9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상왕이 된 그는 "주상이 서른 살 정도 될 때까지는 내가 군사권뿐만 아니라 주요 권한까지 계속해서 행사하겠다"고 선언했다.

이 선언은 선언으로 그치지 않았다. 상왕으로 물러난 직후, 이방원은 최측근인 병조참판 강상인이 자기를 제치고 세종에게 곧바로 보고하자 강상인을 처형해버렸다. 이 사례에서 드러나듯이, 이방원은 상왕이 된 뒤에도 실질적인 임금 역할을 했다. 그래서 세종이 왕이 된 뒤 4년간은 세종이 아니라 이방원이 실질적인 왕이었다. 이 4년 동안 세종은 아버지 눈치를 보면서 허수아비 임금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과(서동원 분).
 <육룡이 나르샤>의 이방과(서동원 분).
ⓒ SBS

관련사진보기


이렇게 상왕 이방원이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을 때, 또 다른 상왕인 이방과가 세상을 떠났다. 이때가 1419년이다. 이방원이 실권을 잡고 있을 때였기 때문에, 장례절차를 실질적으로 주관하는 몫은 이방원한테 있었다. 이방과에게 어떤 묘호를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권한이 실질적으로 이방원에게 있었던 것이다. 

이방원은 제2대 태종이 되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제2대 군주 이방과의 존재는 상당한 고민거리였을 것이다. 이방과에게 태종이란 묘호를 주게 되면, 이방원은 이 묘호를 받을 수 없게 된다. 다른 묘호를 주는 경우에도 결과는 같았다. 제2대 군주가 태종이 아닌 다른 묘호를 받게 되면, 그 후로는 태종 묘호를 사용하지 않는 게 관행이었다. 태종 묘호를 줄 수도 없고 다른 묘호를 줄 수도 없는 게 이방원의 고민이었다.

그런 이방원에게 참고가 될 사례가 바로 옆 명나라에서 있었다. 이방원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4년 뒤에 명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만나 친분을 쌓은 적이 있는 영락제가 쿠데타로 조카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던 것이다. 

영락제는 여러 가지 면에서 이방원과 닮은꼴이었다. 둘 다 건국시조의 아들이라는 점, 야심이 가득했다는 점, 장남이 아니라서 후계자가 되기 힘들었다는 점,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는 점 등이 그러했다.

영락제는 1402년에 조카인 제2대 황제 건문제를 몰아낸 뒤 건문제의 정통성을 부정했다. 건문제가 황제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쫓겨난 건문제의 뒷이야기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았다. 불에 타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도 있고, 승려로 가장해서 유랑생활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건문제가 죽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영락제가 그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건문제가 종묘에 모셔져 묘호를 받을 가능성은 없었다. 영락제는 제3대 황제였다. 하지만 제2대 황제의 정통성이 부정됐기 때문에 영락제가 태종 묘호를 받을 가능성이 생겼다. 실제로 영락제는 죽은 뒤에 태종 묘호를 받았다. 그의 자손이 황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

 영락제. 베이징의 제례시설인 천단공원에서 찍은 사진.
 영락제. 베이징의 제례시설인 천단공원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관련사진보기


'태종' 이름 가로챈 이방원, 절반의 성공

그런데 영락제의 태종 묘호는 1세기 뒤에 취소되고 말았다. 1538년, 명나라 정부는 영락제의 묘호를 태종에서 성조로 개정했다. 한편, 건문제는 명나라가 망한 뒤에 명나라를 계승한 남명 정권에 의해 혜종이란 묘호를 받았다.

이방원이 살아 있을 때 목격한 것은 영락제가 조카의 정통성을 부정함으로써 자신이 사후에 태종이 될 여지를 만들어놓는 것까지였다. 이것은 태종 묘호에 욕심을 가진 이방원에게 좋은 참고가 되었다.

결국 이방원이 내린 결단은, 둘째형 이방과를 종묘에 모시되 묘호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방과는 묘호 없이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다. 연산군과 광해군이 '조'나 '종'으로 불리지 않고 '군'으로 불리는 것은 이들이 종묘에 모셔지지 못해 묘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어서 묘호를 받지 못한 왕은 연산군이나 광해군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이방과가 묘호 없이 죽은 상태에서 3년 뒤에 이방원이 세상을 떠났다. 이방원의 의중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세종과 신하들은 그에게 태종이란 묘호를 부여했다.

실제로는 이방과가 두 번째 임금이지만 그는 묘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제2대 군주로 불리기에는 뭔가 부족한 상태였다. 이방원은 실제로는 제3대 군주이지만, 태종이란 묘호를 받았다. 그래서 좀 뭣하기는 하지만, 이방원은 제2대 군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태종 묘호를 받음으로써 그는 태조 이성계에 버금가는 위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미세하게나마 이방원의 위상을 훼손하는 사건이 훗날 있었다. 이방원이 죽은 지 259년 뒤인 1681년이었다. 당시 임금은 숙종이었다. 이 해에 조선 정부는 '제2대 이방과에게 묘호를 주지 않은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판단 하에 이방과에게 묘호를 주기로 결정했다. 이방원이 이미 태종 묘호를 사용했으므로 이방과에게 같은 묘호를 줄 수는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정종이란 묘호다.

이방과가 정종이란 묘호를 받게 되면서 제3대 군주가 태종이란 묘호를 받은 것이 결과적으로 이상해지게 되었다. 제2대 군주가 태종이 되는 전통적 관행에 어긋나게 된 것이다. 이방원이 희망했던 구도가 깨지게 된 것이다. 영락제의 경우처럼 이방원도 결과적으로 이미지 훼손을 당한 것이다.

이방원은 남의 것을 많이 빼앗은 인물이다. 테러를 통해 정몽주의 목숨도 빼앗았고, 쿠데타를 통해 아버지의 자리도 빼앗고 정도전의 목숨도 빼앗았다. 또 형제들의 목숨도 빼앗았다. 그런 뒤에 그는 인생 막판에 둘째형의 묘호까지 가로챘다.

하지만 묘호를 가로챈 일은 결과적으로 절반의 성공이 되고 말았다. 12대손인 숙종이 이방과에게 정종이란 묘호를 부여함에 따라 그는 '제2대 태종'이 아니라 '제3대 태종'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의 가로채기는 절반의 성공이 되고 말았다.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

저서: 역사 추리 조선사, 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 못하나,발해고(4권본,역서),패권 쟁탈의 한국사,신라 왕실의 비밀,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상고사(역서),조선 노비들,왕의 여자,철의 제국 가야,최숙빈,한국사 인물통찰,동아시아 패권전쟁 등. www.kimjongsung.com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