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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을 준비하면서 참 많이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청소년의 권리다. 세월호 참사가 청소년이나 교육 문제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는 것이므로 4.16인권선언에도 그런 내용이 충분히 담겨야 한다는 의견들이었다.

지난해 7월경부터 풀뿌리토론이 열렸다. 4.16인권선언의 내용을 함께 만들기 위해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권리를 제안했다. 세월호 참사를 떠올릴 때의 마음들을 서로 나누고, 세월호 참사를 통해 확인하게 된 한국사회의 문제들을 지적하며, 우리가 지키고 누려야 할 권리들을 꼽아보았다. 11월까지 이루어진 풀뿌리토론의 결과로 수백 개의 권리가 제안되었다. 그런데 청소년의 권리에 주목하는 제안들은 많지 않았다.

그 많던 말들은 어디로 사라졌나

뭔가 더 신경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를 말할 때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고, 청소년의 권리가 무시되는 현실을 개탄했지만 무엇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는 찾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의 불편함에 공감하면서도 어떻게 더 '잘해줄 수 있는지' 고민하게 되는 사람들의 난감함에 말을 걸고 싶었다. 그래서 토론회를 준비하게 됐다.

2015년 12월 <청소년과 세월호> 토론회가 열렸을 때 발제자로 나왔던 공현 활동가가 물었다.  "세월호 참사가 왜 청소년 문제죠?" 얼얼했다. 뭔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그랬다. 세월호 참사를 청소년의 문제로 이야기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아이들의 문제로 이야기하게 되는 경향이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그 이야기들은 청소년의 권리를 오히려 무시하거나 왜곡하는 방향으로 뻗어나간다. 그렇다면 이제 세월호 참사와 '청소년'을 연결시키지 말아야 하나?

아니다. 재난을 겪게 된 가족을 만나온 한 연구자의 글에서 이런 말을 봤다.

"부모를 잃는 것은 과거를 잃는 것이고 자식을 잃는 것은 미래를 잃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아이들의 죽음으로 설명하게 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미래를 함께 잃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아이들'을 말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할지 찾아가야 한다.

사라진 것은 무엇인가

과거를 잃거나 미래를 잃거나 상실의 고통을 비교할 수는 없다. 아이들의 죽음이 아니라 죽은 아이들을 알게 되면서 생기는 깊은 공감과도 다르다. '아이들'이 자꾸 불려나오는 것은 세월호 참사가 '참사'였기 때문이다. 사회가 무너지는 경험으로서의 참사, 내일을 예감할 수 있는 오늘이 사라진 참사. 사라진 미래는 사라진 아이들에 투사되었다. 그래서 오히려 아이들이 사라졌다.

"너희가 부모님 잘 돌봐야 한다." 희생학생의 형제자매들은 장례식장에서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너희가 힘들어하면 안 된다"는 말로 이어지기도 했다. 가슴 속에서 슬픔과 분노와 후회와 그리움이 터질 듯이 들뛰었지만 형제자매들은 마음을 숨겨야 했다. "부모님 힘들어하시니 이제는 너희가 해야지." 시간이 흐르며 어른들은 이렇게 말했다.

세월호 참사를 또래의 일로 받아들인 많은 청소년들도 그랬다. 내 친구일 수도 있었던 아이들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프고 괴로웠지만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잘 열리지 않았다. 집회에 나가보려고 해도 부모님 눈치를 봐야 했고 노란리본을 달려고 해도 학교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동안 마음이 있어도 아무것도 못했어요. 이제 고등학교 졸업하니까 열심히 찾아다니려고요."

광화문광장에 찾아온 한 청소년의 이야기다.

한편에서는 어른들이 이렇게 말한다. "이젠 너희들이 해야지." 젊은 사람들이 나서야 한다고. 나서기 어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 살피지 않고 등만 떠민다. 물론 '너희들이 무엇을 하든' 바뀌는 건 없을 거라고 찬물 끼얹는 어른들보다는 낫다.

그러나 '아는 게 많고 해온 게 많은 어른의 조언'이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아직 미성년이니까' 이건 안 되고, '이제 성년이 됐으니' 저걸 해야 한다. 미래를 아이들의 것으로 투사하는 말들도 마찬가지다. 청소년은 유보된 존재가 아니다.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이다. 함께 하자는 제안을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

팽목항으로 가는 '기다림의 버스'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다.

"돌아가신 선생님 중에 일본어 교사가 있어요. 저도 일본어 교사거든요. 제가 학생들이랑 수학여행 갈 때 그 학생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었다는 걸 깨닫고 너무 당혹스러웠어요. 한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거든요. 그런데 저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어떻게 지킬 수 있을지." 

많은 사람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미안함은 어떤 책임감이기도 했다. 그리고 지켜주지 '못하는' 위치에 우리 모두 놓여있다는 자각이기도 하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솔직한 고백이 아닐까. 내가 널 지켜줬어야 했다는 오지랖도 아니고 이제 널 지켜주겠다는 섣부른 욕심도 아니라, 우리는 우리를 지킬 방법을 아직 모른다는 막막함의 고백.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가 어떻게 각자의 책임으로 떠넘겨지고 있는지 알아버렸다. 그것이 어떻게 불평등하게 떠넘겨지고 있는지도 드러났다. 스스로 탈출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살아남을 수 없는 시스템, 그러나 스스로 탈출하지도 못하게 만드는 시스템. 그러니 함께 시스템을 바꾸기 전에는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 누구도 혼자 탈출할 수 없다면, 우리가 시작해야 할 출발선은 누구나 서로 지켜줄 관계가 필요하다는 인정이지 않을까.

4.16인권선언 풀뿌리토론 중에 지역아동센터 교사라고 밝힌 분이 이런 얘기를 했다.

"인권교육을 하는데, 이 사회가 아무것도 지켜주지 못하는 것 같아 교육하기가 미안하더라."

생명과 안전에 대한 권리가 그저 말에 머물러 있을 뿐인 현실. 우리의 권리를 위해 무엇을 함께 말하고 배워야 할지, 아직 우리는 잘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우리는 함께 배울 수 있다.

아이들을 볼 때 봐야 할 것

참사를 겪게 된 사람들에게는 여러 갈래의 사회적 지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정서적 지지, 실질적 지지, 정보적 지지, 사회교류적 지지 등. '상황이나 사건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고통에 압도당하지 않고 스스로 사건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독려하는 지지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정보를 줄 필요를 별로 느끼지 못한다. "넌 몰라도 돼." 결정의 주체가 아니므로, 판단의 주체가 아니므로.

4.16인권선언 풀뿌리토론에서 제안된 권리 중에는 표현의 자유나 소통에 대한 권리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권리들은 그냥 혼자 떠들 자유와는 다르다. 나이나 성별에 따라 의견에 귀 기울이는 정도가 다르니 들리지 않는 목소리도 많다. 말을 하려면 돈도 시간도 정보도 필요한데 그런 자원에 대한 접근은 불평등하다. 집회 한 번 나오기 위해 부모한테 차비를 받아야 한다면 표현의 자유는 동등하지 않다.

청소년이 겪는 문제는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니다. 청소년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문제일 뿐이다. 가난한 사람도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도 말투가 어눌한 사람도 사회적 소수자들도 겪는 문제다.

집회 나오는 데에도 부모 허락이 필요한 아이들이나 노란 리본 달 때에도 직장 상사나 주위 사람들 눈치를 보는 어른들이나 다르지 않다.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결단이 요구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목소리를 내기 어려우니 그만큼 무시되고 무시되는 만큼 권리를 누리기 위한 자원들이 박탈되니 다시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진다. 물론 같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을 보면서 우리는 아이들 너머를 함께 봐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의 다른 사회를 열고 싶다면

세월호의 아이들에게서 우리가 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사회가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현실이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을 붙든 아이들이 어떻게 우리의 모습인지를 살피는 것은 4.16운동의 큰 과제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에 무기력하게 앉아있던 우리 자신을 발견하고, 이런 말에 더 큰 영향을 받게 되는 집단은 누구이며 이유는 무엇인지 탐문하고, 인간의 존엄에 대한 감각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지 못하게 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밝히고…….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침몰하는 한국 사회를 간파하게 되었다. 참사 이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참사 이후의 사회를 공모하고 싶어졌고 그 모의에 가담하고 싶어졌다. 만약 우리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고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가기를 원한다면, 세월호 참사 이후의 사회를 열어가고 싶다면, 그것은 아이들과 동료 시민이 될 때에만 가능하다. '아이들'을 보며 깨닫게 된 만큼 '아이들'과 함께 바꿔야 한다.

동료 시민이 되기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어린이와 어른이 다르다는 감각에 길들여진 우리 모두 그것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다. 누군가는 다 아는 것처럼 손 내밀었다가 거부당할 것이고 누군가는 잘 모르겠어서 쭈뼛쭈뼛 하다가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그러나 서투르고 어색하더라도 동등하게 만나려고 시도할 때 권리도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권리의 주체가 될 때 참사 해결의 주체가 될 수 있다. 더 권력을 가진 자와 더 배제되는 자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은 세월호 참사 이후의 다른 사회를 만들어가는 길 자체이다. 그래서 우리는 동료 시민 '하기'에 도전해야 한다.

'안 그런 어른' 말고

누군가에게 미안한 마음,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알고 누리기 위해 싸워야 한다. 이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사실은, 청소년들이 이미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란리본을 가방에 달고,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특별법 제정하라는 서명을 받았고,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선물했다. 친구들과 함께 북콘서트를 준비했고, 추모공연을 만들었고, 전시회를 열었다. 농성장을 지켰고, 집회에 참여했으며, 물대포를 함께 맞았다.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던 어른들은 청소년의 행동을 '기특한' 것으로 보며 예외로 받아들였다. 그러면서 동행하는 누군가의 존재를 지워왔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길을 열어왔고 함께 걸어왔다. 그리고 종종 말한다. "나도 저런 어른이 될까 두려워." "나는 저런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만약 우리가 아이들과 동료시민이 되기를 원한다면 방법은 하나다. '안 그런 어른'이 되려고 하지 말자. 동등한 권리의 주체로 함께 서자.

"13. (존엄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 권리) 모든 사람은 돈과 권력이 중심이 되는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꿔 자유와 평등, 연대와 협력, 인간의 생명과 존엄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 권리를 가진다."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인권선언'의 마지막 조항이다. 어쩌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존엄에 기초한 사회를 만들 권리'를 가진 '모든 사람'을 떠올릴 때 어른의 모습만 그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확신한다. 존엄에 기초한 사회는 '모든 사람'의 자리에 모든 사람이 들어설 수 있을 때에 가능해질 것이라고.

덧붙이는 글 | 미류 (인권운동 사랑방 / 4.16연대 인권선언제정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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