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동주>에서 독립운동가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

영화 <동주>에서 독립운동가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 오늘날 사람들이 많이 알지 못하는 이 청년 운동가를 표현하며 박정민은 "결과 뿐만 아니라 과정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자"는 화두를 던지게 됐다. ⓒ 권우성


사진 속 두 청년이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은 다소곳하고 얌전한 미소, 오른쪽은 자신만만한 기개가 느껴진다. 영화 <동주> 속 윤동주(강하늘 분)와 그의 사촌이자 친구 송몽규(박정민 분)다. 많은 이들이 윤동주를 기억하고 시를 품고 있으나 정작 송몽규는 잘 알지 못한다. 위대한 시인이 된 동주에 비할 때 일체 치하 어두운 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했던 한 청년을 너무도 쉽게 스쳐지나간 건 아닌지.

 영화 <동주>의 포스터

영화 <동주>의 포스터. 왼쪽이 윤동주(강하늘 분), 오른쪽이 송몽규(박정민 분)다. ⓒ 메가박스 플러스엠

그래서 박정민(30)은 울었다. 지난 1월 28일 <동주>가 언론에 처음 공개되던 날 그는 무대 위에서 한동안 꺽꺽 울음을 삼켰다. 시간이 좀 흐른 뒤인 2월 11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영화로 그 분을 잘 소개해드렸어야 했는데 죄송했다, 30년 가까이 그 분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내가 부끄러웠다"고 고백했다. 그 마음을 안고 무대에 올랐는데 마침 세워져 있던 대형 포스터에 감정이 터진 것이다. "마치 증명사진처럼 박힌 두 얼굴이 싸하게 다가왔다"고 그가 말했다.

알려고 할수록 더 멀어지던 몽규

이 부끄러움은 이준익 감독이 이 영화를 만든 이유기도 하다. 더 나아가 윤동주 시의 미학이기도 하다. 일본의 한 대학교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를 보고 이 감독은 "윤동주를 죽인 일본에서도 시인의 시비를 세울 정도로 그를 좋아하는데 정작 난 그의 삶을 잘 모른다는 게 죄스러웠다"고 말한 바 있다.

시대의 아픔 속에서 윤동주는 적극적으로 항거하지 못한 스스로를 부끄러워했고, 바로 그 부끄러움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은 존재가 송몽규였다. 12살 나이에 동네 어른들 앞에서 일장 연설을 했고, 고교생 나이 때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돌연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한 인물이다. 불꽃처럼 자신을 태우다가 스물아홉 나이에 윤동주와 함께 옥사한다.

"단순히 흉내만 낼 순 없었어요. 그 분의 삶이 너무 고귀하잖아요. 제가 아무리 멋있게 한다 한들 그 분의 삶은 못 따라갑니다. 물론 (연기로) 흉내는 낼 수 있겠지요. 근데 과연 그게 관객에게 통할까요? 그건 나에 대한 배신일 수도 있고요. 아무리 준비해도 그 사람보다 진짜일 수 없으니 까불지 말고 진정성으로 다가가자고 생각했죠."

대본이 새까매질 정도로 많은 걸 준비했고, 1·2차 세계대전과 일제강점기 민중사, 심지어 최남선·윤치호 등 당대 관련 인물들을 공부했지만, 그럴수록 "송몽규는 멀어져갔"다. 답답한 마음에 그는 중국 용정에 있는 고인의 묘소를 찾기도 했다. 연기에 대한 도움을 얻고자 왔다가 "무슨 염치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 스스로가 부끄러워 울기도 했"다.

열등감이 땔감이 되다

 영화 <동주>에서 독립운동가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

스물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던 그때를 박정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멋있는 서른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며 "마흔이 되면 혹은 그 이후가 될때면 뭔가 이룬 게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연기를 그만 두려고도 했던 당시 내적으로 고민이 컸던 그였다. 그리고 운명처럼 <동주>가 다가왔다. ⓒ 권우성


일본에 저항하고자 했고 분위기를 전복하고자 했지만, 송몽규는 끝내 열매를 맺진 못했다. 영화 말미 그가 내뱉는 "나라를 잃어 억울하고, 무언가를 이루지 못해 억울하다"는 대사가 그래서 아프게 다가온다.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던 몽규의 동력이 바로 이 억울함이었다면, 박정민의 동력 역시 따로 있었으니, 바로 열등감이었다.

4년 전 일화를 소개한다. 영화 <댄싱퀸>에 출연했을 무렵 박정민은 이제 막 소속사와 계약했을 때였다. 당시 매니저에게 그는 "난 늦게 될 배우인데 기다려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 일을 복기시키니 쑥스러운듯 박정민이 미소를 지었다. 참고로 강하늘 역시 그와 같은 소속사다.

"맞아요! 열등감입니다. 피해의식까진 아닌데 어떤 열등감이 절 움직여요. 저보다 잘하는 또래 친구들을 볼 때 확 느낍니다. 안 느낀다면 그건 문제가 좀 있지 않을까요(웃음). 친한 황정민 형, 배성우 형 등을 보면서 언젠가 사람들이 알아줄테니 잘 해보자고 다짐하곤 했어요.

함께 연기한 강하늘에게도 비록 동생이지만 열등감을 느껴요. 진짜 열심히 하는 친군데 현장에선 열심히 안 하는 척 해요. 굉장히 유연하고, 저보다 어른입니다. 촬영장 분위기를 혼자 다 띄우는 걸 보면 부럽기도 하고. 전 또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조용히 구석에 있지요(웃음).

또 하늘이가 언제부턴가 자기 대사가 아닌 상대방 대사에 밑줄을 긋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었어요. 그 친구 기사를 쭉 찾아보거든요. 그게 무슨 말인지 정확히 압니다. 자기 대사와 차례만 외우는 게 아니라 상대 연기를 받아줄 줄 아는 거죠. 저도 그렇게 해오던 차에 진짜 반가웠어요. 진짜 이 친구가 연기를 좋아한다는 걸 느꼈죠. 그러니까 <미생>의 주연급도 하고, 영화 주인공도 하죠. 그런데 사람이 안 변해요. 그 정도면 저 같은 건 무시해도 되는데(웃음). 어른이에요 진짜."

시대에 대한 고민

 영화 <동주>에서 독립운동가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

느리지만 보다 깊고 넓게 그는 성장해왔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가 1년에 하나씩 생기듯 말이다. 영화 <파수꾼> 출연 당시 제작 일기를 재치있게 써놓을 정도로 글재주도 있다. 현재 그는 한 연예매거진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기도 하다. ⓒ 권우성

강하늘에 대한 박정민의 말에서 연기를 대하는 자세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철저한 반성파다. 어쩌면 <동주> 속 윤동주와 가장 가까운 심성일지도 모른다. 앞서 언급한 자신을 '늦게 되는 배우'라고 설명하던 일화도 그 예다. "타고난 것, 잘하는 것들이 거의 없기에 매번 반성하고 반성한다"라며 "늦게라도 되면 다행이지 않나"라고 그가 되묻는다. 그만큼 정확히 자신을 가늠하는 일이 습관처럼 배 있었다.

너무 자신에게 냉정한 게 탈이었을까. 지난해 초 그는 연기를 그만 두려고도 했었다. 한창 드라마를 찍고 있을 무렵 "여전히 드라마 시스템에 녹아들지 못하는 나 자신이 너무 미웠다"는 생각에 유학까지 알아보던 차였다. 갑작스럽게 주어진 영화 <동주>가 아니었다면 박정민의 송몽규는 등장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날 안다는 생각 자체가 건방진 것일 수도 있지만 제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는 파악하고 있었어요. 이준익 감독님이 강조하시더라고요. '늦게 된 자가 성공하고 더 오래 간다'고 하셨어요. 그건 괜찮아요! 다만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드는 건 여전히 숙제입니다. 언제까지 당신의 아들이 이렇게 아무도 몰라봐주는 걸 기다리셔야 할지. 그럼에도 새삼 느꼈어요. <동주>를 통해 제가 진짜 연기를 하고 싶어하고, 잘하고 싶어한다는 걸요. 그래서 그간 마음이 힘들었다는 것도요."

<동주> 이후 변한 게 또 있다면 바로 삶을 대하는 그의 자세다. 그간 철저한 개인주의자였음을 고백하며 박정민은 "나름의 시대적 고민을 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왜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그간 자신 내면에서 답을 찾아왔"던 그는 "보다 범위를 넓혀 생각하게 됐다"고 말했다.

"70여 년 전 잊힌 수많은 송몽규들과 안중근, 윤봉길 등 수많은 투사가 있었기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편하게 커피를 마실 수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의 우리가 어떤 선택과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70년 후 또 다른 이들이 어떤 세상에 살지도 결정될 수 있겠죠. 나 죽을 때까지만 잘 살면 된다던 사람이었는데, 그게 아닌 걸 알았죠.

결국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반성하느냐가 관건인 거 같아요. <동주>에 나온 것처럼 부끄러움을 아는 게 부끄러운 게 아니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부끄러움을 아는 시대가 올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어요."

그는 이제 막 서른을 지났다. "어렸을 때 막연하게 꿈꿨고 기대했던 서른의 모습은 아니"라지만, 적어도 그는 부끄러워 할 줄 아는 사람이다. <동주>를 통해 여러 사람들이 그에게 이후 연기 인생이 바뀔 수도 있다고 말하곤 한다. 인기와 인지도가 올라간다는 뜻이다. "기대를 일부 하면서도 덜어내고 있"단다. 그런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우리 한번 생겨먹은 대로 잘 하면서 부끄럽지 않게 살자'고.

"정답!" 딱! 하고 그가 핑거스냅을 쳤다.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송몽규는 결국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그 과정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박정민이 그걸 치열하게 표현해냈다. 영화 <파수꾼> 이후 6년 만에 꾹꾹 자신의 인장을 송몽규 안에 새겨 넣었다. 이 아름다운 명함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보길 권한다.

 영화 <동주>에서 독립운동가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

"철저한 개인주의자에서 시대를 조금 더 고민하게 됐다" 영화 <동주> 이후 맞이한 변화다. 예능 프로 <썰전>을 봐도 예전엔 단순히 웃고 즐겼다면 이젠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 유심히 보고 그것과 관련된 정보를 찾아보게 됐다"며 그가 웃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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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3같은 글을 쓰고 싶다. 될까? 결국 세상을 바꾸는 건 보통의 사람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 정신차리고 보니 기자 생활 20년이 훌쩍 넘었다. 언제쯤 세상이 좀 수월해질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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