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 대선 TV토론 지난 11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버니 샌더스와 힐러리 클린턴이 위스콘신 대학에서 열린 PBS TV토론에 참석했다.

▲ 미국 민주당 대선 TV토론 지난 11일,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선 버니 샌더스와 힐러리 클린턴이 위스콘신 대학에서 열린 PBS TV토론에 참석했다. ⓒ 연합뉴스/EPA


지난 9일 치러진 미국 뉴햄프셔 예비선거(primary)의 승자는 버니 샌더스(74)였다. 무려 총 투표의 60%를 독차지하며 38.4%를 받은 힐러리 클린턴 후보를 20%p 이상의 격차로 따돌렸다. 아직 대세를 속단할 수는 없지만, 소도시 시장으로 정치 경력을 시작한 지난 1981년 이후, 34년 동안이나 전국적 관심에서 떨어져 있던 샌더스가 전국구 유력 대선후보를 압도한 기념비적 순간이었다.

아이오와 코커스에 이어 뉴햄프셔 예비선거까지 승리로 장식한 버니 샌더스는 이제 네바다와 사우스캐롤라이나를 거쳐 다음 달 1일 전미 13개 주에서 한꺼번에 치러지는 '슈퍼 화요일'까지 단숨에 내달릴 기세다. 현재의 기세를 그때까지 이어갈 수 있다면 미국 대선에선 이제껏 단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흥미로운 광경이 펼쳐질 것이다.

버니 샌더스에게서 스미스씨를 보다

<스미스 씨 워싱톤 가다> DVD 표지 1939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스미스 씨 워싱톤 가다>의 국내 발매 DVD 표지. 국회발언권을 이용한 스미스의 필리버스터는 버니 샌더스를 떠오르게 한다.

▲ <스미스 씨 워싱톤 가다> DVD 표지 1939년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스미스 씨 워싱톤 가다>의 국내 발매 DVD 표지. 국회발언권을 이용한 스미스의 필리버스터는 버니 샌더스를 떠오르게 한다. ⓒ 아이씨디

나는 버니 샌더스를 떠올릴 때면 <스미스씨 워싱톤 가다(Mr.Smith Goes To Washington)>라는 영화가 함께 생각난다. 1939년에 만들어진 이 흑백영화는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방해)를 소재로 한 작품들 가운데 가장 유명하다. 이 영화로부터 1941년생 '민주적 사회주의자(Democratic Socialist)' 버니 샌더스의 일면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12월 10일 오전 10시경, 당시 버몬트의 무소속 상원의원이던 버니 샌더스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공화당과 부자 감세 법안을 합의한 데 대한 항의의 표시로 상원 의회 연단에 올랐다. 그로부터 무려 8시간 37분 동안 이어진 연설에서 샌더스는 소득과 부의 불평등 문제부터 정계에 흘러드는 부적절한 자금 문제, 각종 차별에 관련된 사항, 월가 개혁 등 다양한 주제를 오가며 자기 뜻을 밝혔다.

연설문은 그 날을 위해 새로 쓴 것이 아니었다. 이제껏 그가 많은 자리에서 해온 연설을 다시 읽은 것이었다. 그건 과거부터 그 날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갈 버니 샌더스의 생각이었다. 불평등한 사회엔 미래가 없다, 불평등을 가속하는 부조리를 차단해야 한다, 고소득자의 탐욕을 막아야 한다, 그날 샌더스가 내놓은 연설 대부분은 대선후보가 된 오늘도 유효하다. 백발이 성성한 정치인이 8시간이 넘는 연설을 이어간 이색적인 장면, 이 장면이 샌더스를 오늘의 자리로 이끌었다.

당시 샌더스의 연설은 일견 필리버스터처럼도 보였지만 실제로는 어떤 의정활동과도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이뤄진 행위였다. 8시간 37분에 걸친 그의 연설은 어느 절차도 방해하지 못했고 감세 연장안은 그대로 통과됐다. 샌더스의 연설은 필리버스터를 가장한 쇼처럼 보이기도 했으나, 그보다 훨씬 더 큰 의미가 있었음이 이내 밝혀졌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난 2016년 2월, 버니 샌더스는 상대가 없으리라 여겨진 대선후보 힐러리 클린턴과 맞상대하는 민주당의 유력 대권 주자가 되었다. 그뿐인가.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힐러리와 팽팽한 승부 끝에 석패했고, 뉴햄프셔 예비선거에선 말 그대로 대승을 거뒀다. 30년이 넘는 정치경력 가운데 가장 무의미해 보였던 순간, 즉 의사진행을 방해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5년 전 그 날이 없었더라면 결코 다다르지 못했을 소중한 자리다.

그가 스스로 연단에 오르고 했던 연설은 어떤 실질적 권한도 갖지 못한 한 명의 무소속 상원의원이 벌인 무력시위에 불과했지만 이를 지켜본 사람들의 가슴에 버니 샌더스의 이름을, 현실 정치에의 희망을 일깨워준 소중한 계기가 되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나는 이와 같은 장면을 오래된 흑백영화 한 편에서 먼저 본 적이 있었다.

미국의 가치, 정치의 가치, 미국 정치의 가치

필리버스터가 시작된다 페인(클로드 레인스 분)을 압박하는 제퍼슨 스미스(제임스 스튜어트 분), 이 정치인의 가슴에 불을 당긴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 필리버스터가 시작된다 페인(클로드 레인스 분)을 압박하는 제퍼슨 스미스(제임스 스튜어트 분), 이 정치인의 가슴에 불을 당긴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 콜롬비아픽쳐스


오래전 내 키가 1m를 겨우 넘던 시절에, 정의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지만 정의롭고 싶었던 바로 그 시절에, 나는 보이스카우트가 되고 싶었다. 나는 보이스카우트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집단이라 생각했고 결국 국민학교(당시는 국민학교였다) 3학년이 되던 해 그토록 바랐던 보이스카우트의 일원이 되었다. 보이스카우트가 모두 정의로운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지금도 보이스카우트가 된 사실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영화를 만났기 때문이다.

다른 보이스카우트 아이들과 함께 교실에 옹기종기 모여 봤던 이 영화에서 나는 보이스카우트가 어떤 가치 아래 만들어진 조직인지 알게 되었다. 가장 보이스카우트다운 감독이 찍어낸 가장 보이스카우트다운 영화에서 나는 초기 미국의 드높은 이상과 정신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이 자신의 역사와 미덕을 어떻게 존중하고 지켜내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다.

영화는 시골 마을의 보이스카우트 지도자 제퍼슨 스미스가 부패한 정치인들에 의해 허수아비 상원의원으로 지명되지만, 점차 현실을 깨닫고 부패한 세력에 맞서 싸워나간다는 내용을 줄거리로 한다. 아이들도 즐겁게 볼 수 있는 단순한 구성의 드라마지만 중요한 정치적 사안을 가십거리로 전락시키는 언론과 작은 이익을 탐내는 부패한 정치인 등 현실을 적절히 반영한 부분도 적지 않다.

시골의 보이스카우트 리더에 불과했던 제퍼슨 스미스가 출신지를 대표하는 미국 상원의원의 자격으로 워싱턴에 가서 선조들이 지켜온 정의와 자유의 상징들을 돌아보던 순간을 잊기란 어려운 일이다. 제퍼슨 스미스가 워싱턴에 내린 그 순간부터 영화는 독립기념관, 링컨 동상, 국회의사당, 국립묘지 등을 보여주며 미국의 자랑스러운 역사에 대해 소리 없이 웅변한다. 그리고 그 웅변은 모든 관객의 가슴에 커다란 파장으로 울려 퍼진다.

길어야 300여 년의 역사를 가진 미국이 이토록 그들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는 데 한국은 오늘은 대체 어떤 모습인가 하는 물음이 그 어린 머리에 떠올랐던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자주 자신을 비하하고 정치인과 운동권 학생들에겐 손가락질부터 하는 어른들의 모습이 익숙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 영화가 보여준 미국의 자화상은 내게 꽤 큰 충격이었다.

의로운 일은 외롭다 '발언권 철회를 바란다'는 5만 통의 전보를 전해받고 절망하는 스미스. 이 장면으로부터 '역시 의로운 일은 외롭군요'라는 유명한 대사가 이어진다.

▲ 의로운 일은 외롭다 '발언권 철회를 바란다'는 5만 통의 전보를 전해받고 절망하는 스미스. 이 장면으로부터 '역시 의로운 일은 외롭군요'라는 유명한 대사가 이어진다. ⓒ 콜롬비아픽쳐스


"페인씨, 의로운 일은 역시 외로운 일이군요."

영화의 백미는 단연 주인공 제퍼슨 스미스의 연설 장면이었다. 그는 정의와 자유 그리고 진실과 같은, 그들의 선조들이 지켜온 가치들을 위해 국회에서 무려 23시간에 걸친 연설을 감행한다. 프랭크 카프라가 찍어낸 최고의 장면이자 영화사에 길이 남을 장면인 제퍼슨 스미스의 연설 신은 진실로 용감하고 정의로운 한 투사의 고독한, 그러나 완전히 외롭지는 않은 정의에의 투쟁을 그야말로 감격적으로 그려냈다.

이야기의 결말은 꽤 낭만적이다. 23시간에 걸친 연설이 한계에 다다라 스미스의 노력이 수포가 되려던 순간, 악당이 돌연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음모를 고백한다. 현실에서 일어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 영화를 보고 있자면 미국을 하나로 묶는 커다란 이념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어쩌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인 개개인을 공동체로 여기게끔 하는 연대의식의 발견 말이다.

달걀도 바위를 깰 수 있다는 믿음

필리버스터 지난 2010년 12월 10일, 공화당과 감세안에 합의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나선 당시 무소속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 그는 8시간 37분이라는 시간 동안 마이크를 잡았다. C-SPAN 채널의 라이브 중계 화면 갈무리.

▲ 샌더스의 필리버스터 지난 2010년 12월 10일, 공화당과 감세안에 합의한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비판하기 위해 나선 당시 무소속 상원의원 버니 샌더스. 그는 8시간 37분이라는 시간 동안 마이크를 잡았다. C-SPAN 채널의 라이브 중계 화면 갈무리. ⓒ C-SPAN2


다시 버니 샌더스의 이야기로 돌아오자. 그는 5년 전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유권자에게 분명한 목소리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의 주장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불평등을 해소해야 미국이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의 부가 소수의 특정 계층에 의해 독점되고 있기에 이를 흩어 모두가 정당한 부를 누릴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지금 많은 미국인이 샌더스의 이야기에 호응하고 있다. 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자는 바람이 일어나고 있다.

돌이켜보면 불평등은 미국의 문제만이 아니다. 소수의 특정 계층이 전체의 부를 독점하는 현상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당연히 한국사회에서도 일어나는 문제다. 지난 대선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됐던 건 한국의 경제가 민주적이지 않고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많은 시민이 공감했기 때문이었다. 다시 수년이 흘러 한국 경제에 봄은 올 줄 모르고 다들 손가락만 빨며 하늘 높이 매달린 수치만 바라본다. 유가증권시장의 지수가 오르면, 경상수지흑자가 늘어나면 내 주머니 사정도 나아질까 하는 게 이들의 기대다.

지구 저편 미국 대선후보 경선에선 민주적 사회주의자라 자신을 칭하는 버니 샌더스가 세찬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바보처럼 아무 효력도 없는 연설을 8시간 37분째 하는 그. 영화처럼 악당이 회개하는 일이 벌어지진 않지만, 누군가가 그를 지켜보고 감동할 수 있도록 꾸준한 걸음을 걷는 그런 정치인. 그가 세상을 뒤흔들고 있음을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다.

그의 선전이 우리에게 어떤 변화를 남겼으면 좋겠다. 아주 빠르게 던지면 달걀도 바위를 깰 수 있다는 바보 같은 믿음을 간직할 수 있도록. 의로운 일이 더는 외로운 일로 남지 않도록 말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김성호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goldstarsky.blog.m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스미스 워싱톤에 가다 콜롬비아픽쳐스 김성호의 씨네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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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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