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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이란 이름으로 은폐하는 것

박근혜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 차기 국회는 "사리사욕을 버리고 오로지 국민만 바라보고 ··· 국민들한테 희망을 주는 그런 국회가 됐으면 한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표도 신년 기자회견에서 "국민의 먹고사는 문제", "국민의 생명과 안전" 등을 언급하며 '국민'을 강조했다. 안철수 의원은 자신의 정당을 '국민의 당'이라 부르며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주장했다. 조경태 의원도 여당으로 이적하면서 '오로지 국민만 바라보는 정치'를 하겠다고 말했다. 심상정 대표는 정의당이 "모든 국민을 위한 노동조합"이라고 선언했다.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한 정치, 국민만 바라보는 정치"를 하겠다고 똑같이 외친다. 그런데 이들은 왜 여야로 나뉘어 있고, 서로 싸우는가? 그 이유는 이들이 말하는 국민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국민'이란 말이 등장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가장 처음 사용된 것은 일제 때였다. 황국신민의 줄임말이 국민이다. '국민학교'에서 사용된 국민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일제가 만든 국민보다 우리 고유의 인민이란 용어가 보편적이었다. 인민이란 말에는 피지배자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해방 이후 공산주의자들이 인민을 강조하자, 국민이란 용어가 새롭게 등장했다. 노동자라는 말을 근로자로 대체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국민의 뜻은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 또는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네이버 사전)이다. 인민이란 말에 내포된 지배/피지배의 차별적인 의미가 사라지고 국가를 중심으로 단일성을 강조하는 말로 변한 것이다.

그런데 국민은 결코 단일하지 않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부자와 빈자, 자본가와 노동자, 상공인과 농어업인, 노인과 젊은이, 남자와 여자, 경상도와 전라도 주민 등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국가의 정책 중에 이들을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계층과 세대, 지역 등에 따라 이해가 엇갈리는 경우가 오히려 많다.

국가가 집값을 떠받치는 정책을 펴면 집 가진 사람은 좋지만, 집값을 낮추면 집 없는 사람에게 유리하다. 국가가 노동조합을 보호하고 최저임금을 올리는 정책을 쓰면 노동자들은 좋지만 기업들은 반대한다. 복지정책의 경우 더욱 명확하다.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더 많은 복지 혜택을 주려면 세금을 더 걷어야어 하고,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 부자들은 이를 반대한다. 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으면 경쟁력이 강한 반도체나 자동차 산업 등은 유리하지만, 농업은 불리하다.

이처럼 국가의 정책은 차별적인 효과를 내는 만큼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할 때 어떤 국민을 뜻하는지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국민이란 말을 남용한다. 그 이유는 국민이란 무차별적인 용어를 통해 자신들이 진정 누구를 위한 정치를 하는지 숨기려는 것이다.

경제성장의 논리 속에 배제되는 국민들

분단 이후 대한민국의 국민은 모든 차이를 떠나 오로지 하나여야 했다. 그 외는 모두 배제되었다. 먼저 반공 이데올로기 하에 좌파에게는 빨갱이 딱지가 붙고 국민에서 배제되었다. 박정희 정권 이래 추진해온 재벌 중심의 경제성장 정책은 노동자를 최대한 쥐어짜고, 농업을 말살하였다. 반공과 경제성장 논리가 결합하면서 재벌의 이익에 저항하는 세력, 즉 노동자와 농민, 그리고 그들의 권익을 주장하는 세력은 빨갱이로 몰리며 국민에서 역시 배제되었다. 급기야 재벌들이 동네 상권까지 침투하면서 이에 반발하는 중소 상공인들도 국민에서 배제되고 있다. 이에 비해 재벌기업의 경영진들은 국가의 온갖 특혜 속에서 노동자들을 착취해 수출을 늘려, 이윤은 이윤대로 거두고, 국가로부터 경제발전의 공로로 훈장까지 받았다. 대한민국에서 축복받은 유일한 국민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전경련이 주도하는 입법촉구 서명운동에 동참하고 "엄동설한에 오죽하면 국민이 나섰겠느냐"고 호통을 쳤다. 박 대통령은 똑같은 노동입법에 반대하고 농촌을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민중총궐기 대회 참가자들에게는 엄동설한에 물대포로 응수한 바 있다. 박 대통령이 바라보는 국민이 누구인지 명확히 보여주는 장면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벌써 70년이 되어간다. 이제 모든 국민을 최소한 차별하지 않는 정부를 갖고 싶다. 올해 총선이 그 출발점이 되었으면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슨 이용마님은 MBC 해직기자입니다. 정치학 박사이고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입니다. . 관악산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부지런함의 공존 불가를 절실히 깨닫고 있습니다.



태그:#정치 , #재벌 ,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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